박신규
1972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2010년 『문학동네』로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시집으로 『그늘진 말들에 꽃이 핀다』가있다.- P-1
봄밤, 우주의 저편
야근을 멈출 수 없었다
위성도시로 가는 심야버스에 올랐다
졸다가 땀을 훔치며 내렸다
어린 시절 폐쇄된 간이역
백목련이 터진다- P10
너는 봄이다
네가 와서 꽃은 피고
네가 와서 꽃들이 피는지 몰랐다
너는 꽃이다
네가 당겨버린 순간 핏줄에 박히는 탄피들,
개나리 터진다 라일락 뿌려진다
몸속 거리마다 총알꽃들
관통한 뒤늦게 벌어지는 통증,
아프기 전부터 이미 너는 피어났다
불현듯 꽃은 지겠다 했다
죽을 만큼 아팠다는 것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
찔레 향에 찔린 바람이 첨예하다
봄은 아주 가겠다 했다
죽도록,이라는 다짐은 끝끝내
미수에 그치겠다는 자백
거친 가시를 뽑아내듯 돌이키면
네가 아름다워서 더없이 내가 아름다운 순간들이었다
때늦은 동백 울려퍼진 자리- P12
때 이른 오동꽃 깨진다, 처형처럼
모가지째 내버려진 그늘
젖어드는 조종(弔鐘) 소리
네가 와서 봄은 오고
네가 와서 봄이 온 줄 모르고
네가 가서 이 봄이 왔다
이 봄에 와서야 꽃들이 지는 것 본다,
저리 저리로 물끄러미
너는 봄이다- P13
김사인과 싸우다
다음 생이라는 게 있다면
나의 일상은 응당 이러할 것이다
그와 한마을 동갑내기로 태어나 이틀 걸러 하루는 드잡이하는 것
세번 싸워 두번은 지는데 결정적일 때는 꼭 이기는 것
멀리싸기 시합을 하다가 그의 언발에 오줌을 누는 것
‘말천천히하기‘ 대회에서 우승한 뒤 날로 경신
하는
우주에서 가장 느려터진 말투로
그의 복장을 터뜨리는 것
점빵집 딸내미를 먼저 찜했다고 밤새 싸운 뒤
서둘러 고백하고 껴안았다가 뺨 맞은 소문만쫙 퍼지는 것
그래도 그 맵짠 기억을 품고 청춘을 견디겠노
라며
고백도 못한 그에게 초를 치는 것
동네는 두메산골은 아니고 읍내도 아니고 면소재지 정도면 좋지
하나밖에 없는 구판장 막걸리는 항시 쌀되로 덜어줘야하지
안 서운할 만큼 사카린을 치고
넘치게 담아 주모 엄지 맛도 봐야 더 좋지- P22
취할수록 서운해져서 고래고래 노래 부르면
뉘 집 자식인지 이장집에서 무당집까지 죄 알게 되는
저지른 짓보다 곱절로 낯뜨겁다가
금방 다시 낯두꺼워질 수 있는 마을이면 적당
하지
아비 몰래 논 서마지기 팔아먹은 돈으로
나이 많은 과부와 밤도망치는 일은 있어야 하네
전주나 청주쯤에 살림 차렸다가 버림받고 돌아와
암시랑토 않은 척 처자빠져 있다가
쬐금씩 부끄럽고 쬐금 더 억울해지는 얼굴로 앉아 있다가
괜찮다, 괜찮어, 다 괜찮어.. 떼꾼하게 더듬거리는 그를붙잡고
청춘은 다 갔네 어쨌네 같잖지는 않게 재재
거리다
풀썩 낮술에 젖어드는 것
마실수록 자기가 담근 술이 더 맛있다고 우기
다가
두 항아리 다 비우는 것
벌게진 얼굴로 나란히 노을 붉은 수렁에 빠져
멍하니 끔벅거리다가 찔끔하다가 낄낄대다가
비로소 어깨에 기대 꺽꺽 울어제끼는 일은
반드시 있어야 하네- P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