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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암벽 접근을 막는 펜스 바깥, 넓은 잔디밭 한가운데에 벤치가있었다. 평생 ‘밟지 마세요‘라는 표지판만 보고 살아온 유자는 걱정 없이 잔디를 밟고 들어가 앉을 수 있는 그 벤치가 좋았다. 그게 실은 조경용이라 결코 잔디밭 안으로 들어가 앉으라는 의도가아니었다는 걸 몰랐을 때까지는 그랬다. 그후에도 가끔씩 잔디밭안으로 들어갔지만 전처럼 생각 없이 그곳에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펜스 앞에도 벤치가 있었다. 그녀는 이제 암벽을 등지고 앉아 잔디밭 한가운데의 벤치를 바라보았다. 잔디를 밟을 때의 폭신하고, 미끌하고, 심지어는 바삭하기까지 한 감촉이 그리움처럼남았는데, 그게 아무것도 몰랐을 때의 기억인지 금지된 것을 안후의 느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때때로 발밑이 아찔한 것을 보면,- P120
시작은 그랬다. 그게 유자에 대한 원망과 분노와 증오, 때로는 앙심 때문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런 모진 마음 그대로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걸 죄책감으로 변환해가며 살았다. 자기를 먼저 놓아버린 아빠 대신 쩔쩔매느라 자기를 놓아버리지도 못한 엄마를미워했던 건 그게 쉬웠기 때문이라고, 나중에 사이가 나빠진 후은율은 서슴지 않고 말했다. 매일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잠을 자는엄마는 할퀴기도 쉽고 꼬집고 물기도 쉬웠다고. 꿈속에서는 주먹질도 했다고. 유자는 이해했다.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다가 나중에는 일 년에 한두 번도 안 만나게 된 아빠에게는, 품고 있는 마음이 무엇이든 그걸 보여줄 수 있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을 테니까.
잔뜩 준비를 하고 나가도 다 쏟아붓기는커녕 잠깐 미워하기도 전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어버렸을 테니까. 그는 은율을 집으로 보낼 때마다 버스 창밖에서 손을 흔들었다고 했다. 나의 상처야, 안녕, 해맑은 웃음을 감추지도 못하며, 그래도 너무 해맑게 보이는 건 아닐까 잠깐씩 망설여가며.-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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