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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각인


그는 다섯 개의 칼을 가졌다

나는 색이 곱고 결이 유순한 나무 도장을 하나 집어
그에게 건넨다

그는 먼저 구획을 나눈 뒤
칼을 골라 든다
이 자리에서 삼십 년을 했어요
요즘은 기계로 파는 데가 많지만 도장이라는 게 필시 칼맛이거든요
묻지 않은 말끝엔 잘 왔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나는 잘 왔다는 말을 생일 축하인 양 곱씹으며
가게 내부를 둘러본다
한쪽 벽면 가득 열쇠가 걸려 있고
한낮에도 불을 켜야 할 만큼 침침해서
이름을 일으키려면 그의 이마에서 새어나오는 빛을 안내삼아야 한다

그는 여러 번 칼을 바꿔 든다
곡선을 위한 칼과 직선을 위한 칼
도려내는 칼과 깎는 칼
시작하는 칼과 끝맺는 칼을 지나- P110
서서히 떠오르는 이름을 보면서

당신도 나를 이렇게 만들었겠군요
저 먼 지평선을 향해
무릎을 꿇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런데 말이에요. 이것들을 열쇠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열쇠 이전의 열쇠들은
자신이 태어나는 순간 열거나 잠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을까요
여는 방향이 더 아플까요 잠그는 방향이 더 아플까요

너무 오래 의자에 앉아 있어 의자가 되어버린 적막에게
잠시 속내를 털어놓는 동안

도장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가까이에서 보니 생각보다 울퉁불퉁하고 기계로 판 것만큼 정교하지 않다

값을 치르고 미닫이문을 끼익 연다
등뒤에 다섯 개의 칼, 골몰하던 뒤통수를 남겨두고

문턱을 넘기 전 마지막으로 돌아본다- P111
칼과 열쇠가 한통속인 이유를
도처에 문이 있는 세계에
나를 외로이 남겨둔 이유를 묻고 싶었다- P112
물색


그 집에선 낙엽 냄새가 났다

순간 위령이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쳤지만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다 대신
단지 끝에 공원으로 연결되는 길이 있다던데 한번 가볼까. 말했다

그러나 그리로 가지는 않고

우리는 살 집을 찾으려는 거잖아
오전 열한시인데도 불을 켜야 할 만큼 어두웠어

살아 있는 집은 따로 있다는 듯이
말했다


*

그날은 도망치듯 낮잠을 잤다

수박 속살을 뭉개며 노는 아이들
팔뚝을 타고 흐르는 다홍빛 물

창을 열고 초를 켠다- P116
집은 가진 것을 내보이는데
그럼 나는 무얼 내보이는 사람인가 
생각하면서


*

집을 본다. 이불을 깨지 않는 집
집을 본다. 파충류를 기르는 집

서향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어요 암막 커튼이 필요 없거든요
벽면 가득 곰팡이가 피었는데 두 사람이 살기엔 이만한 집이 없다고


*

경사로를 따라 굴러간 수박은
너무 커서 맨홀에 빠지지 않았다
결국 쪼개져 붉음을 들키고 만다


*

모든 절단면은 칼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P117
집은 듣고 있었을까
유리컵에 실금이 가는 소리

모르고 물을 따라 마셨는데 목이 따끔하다
잔가시가 가득한 날들이다-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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