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희가 관음탱화 앞에 섰을 때 백씨는 불상 앞에서 예배를 시작했다. 무엇을 기원하는지 예배를 올리는 한복차림의 그의 모습은 매우 아름다웠다.
눈에 익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화에 대한 상식이 없었고 종교적 목적을 위한 하나의 도판쯤으로 인식했던 명희 눈에 처음 관음상이 비쳤을 때 그 현란함과 섬세한 데 호기심을 느끼긴 했다. 보관이며 영락, 투명한 옷자락의 유연한 선과 그것에 싸인 아름다운 자태는 정교했고 색조는 유려했다. 그리고 환국의 부친이자 서회의 남편 김길상에게 이와 같이 숨은 재능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다.
백씨는 계속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오십대 중반의 나이, 평소 집에 있을 때는 오래된 가구의 일부처럼 각별한 의미도 존재도뚜렷하지 않았는데, 하기는 모처럼의 나들이여서 차림이 달라지기는 했다. 은은한 보랏빛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은 모습은 오랜 세월 한복에 길들여진 독특한 멋이 있었고 또 서울 여자의 세련된 탯거리가 역력했지만 그러나 그저 그런가 보다 했던 사람이 피어오르는 향과 흔들리는 촛불 아래서 부처님 미소를 향해 나래를 펴듯,- P96
나래를 접듯 일어서고 엎드리는 동작을 반복하며 경건하게 예배를드리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탱화에서 눈을 떼고백씨를 바라보던 명희는 여간하여 그 예배가 끝날 것 같지 않아서다시 관음상으로 시선을 옮겼다. 순간 명희는 참으로 기이한 충격을 받는다. 그렇게 현란하게 보이던 관음상이 폐부 깊은 곳, 외로움으로 명희 이마빼기를 치는 것이었다. 어째서일까? 명희는 자기마음 탓이려니 생각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동이었다. 숙연한 슬픔, 소소한 가을 바람과도 같이 영성을흔들며 알지 못할 깊고도 깊은 아픔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원초적이며 본질적인 것으로 삼라만상에 대한 슬픔인 것 같았다.
법당에서 나왔을 때, 선명한 단풍과 아직은 푸름이 남아 있는 맞은편 숲이 투명한 푸른 하늘에 묻어날 듯 명희 시계에 들어왔다. 마치 인생의 한 고개를 넘은 듯 명희 입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새나왔다. 도대체 김길상이란 누구냐 하는 의문도 명희 마음속에서 강하게 소용돌이쳤다.- P97
그가 출옥한 지 십여년, 그러나 명희가 길상을 만난 것은 환국이 결혼할 무렵에서 그 이후 서너 번인가? 정확하게는 환국이 결혼하던 식장에서 처음 명희는 길상을 보았다. 투사형의 장대한 체구를 상상했던 명희는 뜻밖이라 생각했다. 키는 컸지만 다소 마른 편이었고 몸가짐이 매우 조용했다. 투사형이기보다 오히려 명상적이며현실과는 먼 곳에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언젠가 임명빈은
"출신 신분과도 다르고 활동을 한 행적과도 다르고, 학식이 있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지만 뭐랄까? 인간의 존엄성이라 할까, 범치 못할 그 무엇이 있는 것 같더군. 그분의 신분을 생각한다면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야. 말수도 적은 편인데 그 말도 아주 절제된것이라고나 할까? 그런 모든 것이 생래적인 것인지 아니면 인생- P97
역정에서 갈고 다듬어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사람의 인연이란 참 신비스럽다는 생각을 했지. 신분이 극과 극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어울리는 한쌍의 부부도 세상에 그리 흔치는 않을 거야. 그분들의 인생이야말로 굉장한 드라마다."
그런 말을 했다. 문청 시절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임명빈의 말투를 그때 명희는 민망스럽게 생각했다.
"드라마 아닌 인생이 어디 있겠어요."
"그, 그야 그렇지만."
해가 떨어지고 저녁을 끝냈을 때 산사에는 어둠이 밀려왔다. 상좌가 와서 불을 밝혀주고 간 절반은 한결 넓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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