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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이별
- 편지 3


새벽 다섯시면
수유리 옹달샘 표주박 속에
드맑게 드맑게 넘치고 있는 사람
드맑게 넘치다가
아침 나그네 목 축여주고
머나먼 마을로 떠나고 있는 사람
머나먼 마을로 떠나다가
인천 만석동이나 온양에 이르러
한많은 사람들 발을 적시기도 하고
어린 물풀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없이 거대한 들판을 가로질러
까마득한 포구로 떠나고 있는 사람

떠날 수 없는 것들 뒤에 두고
바람처럼 깃발처럼 떠나고 있는 사람
아흐, 떠나면서 떠나면서
사라지지 않는 사람- P107
소외
- 편지 4


최후의 통첩처럼
은사시나무 숲에 천둥번개
꽂히니
천리 만리까지 비로
쏟아지는 너,
나는 외로움의 우산을
받쳐들었다- P108
고백
- 편지 6


너에게로 가는
그리움의 전깃줄에
나는




- P110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편지 10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목을 길게 뽑고
두 눈을 깊게 뜨고
저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는 저음으로
첼로를 켜며
비장한 밤의 첼로를 켜며
두 팔 가득 넘치는 외로움 너머로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라질 때까지
어두운 들과 산굽이 떠돌며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P115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달력 속에서 뚝 뚝,
꽃잎 떨어지는 날이면
바람은 너의 숨결을 몰고 와
측백의 어린 가지를 키웠다
그만큼 어디선가 희망이 자라오르고
무심히 저무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
나는 너에게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수없는 나날이 셔터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꿈의 현상소에 당도했을 때
오오 그러나 너는
그 어느 곳에서도 부재중이었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바람으로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P116



고향집 떠난 지 십수 년 흘러 어머니, 스무 번도 더 이삿짐을 꾸린 뒤 가상하게도 이 땅에 제 집이 마련되었습니다 경기도 안산에 마련한 이 집, 서른일곱의 나이에 가진 이 집, 열쇠를 가진 지 두 해가 넘도록 아직 변변한 집들이 한번 못 하고 동당거려온 이 집에 어머니, 오늘은 크낙한 고요와 청명이 찾아오고, 구석구석 청소를 끝낸 후 저 들판 마주하여 마음을 비워내니, 간절한 사람, 어머니가 이 집에 들어서는 꿈을 꿉니다 어머니가 이 집을 돌아보는 꿈을 꿉니다
공부방 둘러보고 이부자리 만져보고 유리창 
활짝 열어 햇빛 들여오시며 이제 네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 해거름녘 정물처럼 웃으시는 당신, 그 얼굴 그리워 몸서리칩니다 그 얼굴 보고 싶어 가슴 두근거립니다
왜 그닥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불현듯 상경하신 지난 가을, 얘야, 이승길 마지막 나들이다 네가 사는 문지방 넘어보고 싶구나 왜 단호하게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바쁘다 매정하게 돌아서는 저에게 그냥 탈진한 사람처럼 손 흔들며 그래 내년 봄에 다시 오마 해놓고선 정작 꽃삼월엔 아주 가시다니요 이게 살아 있는 날들의 아둔함인가싶어 하염없는 눈물만 못이 되어 박힙니다-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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