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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우울증이 오래 간다.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다.
노인처럼 따뜻하고 좁은 곳에 숨어 있고 싶다. 날씨만 좀 따뜻해지면 한강에 나가보는 것이 제일 좋은데, 한강의 물빛은 내 멜랑콜리를 가장 오랫동안 보아왔던 대상이다.
추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무엇보다 마음이 얼어붙었다. 지금이 하루 중 기온이 가장 높을 시간인데도 영하 7도, 내일 아침 기온은 영하13도까지 떨어진다고 한다. 독한 술을 마시고 싶기도 하지만 내 몸이 버텨줄지 모르겠다. 우리 집은 간질환을 가족력으로 가지고 있다.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그 때문에 차례차례 쓰러졌다. 하지만 대수롭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심장병이 있다거나 신체적 기형을 갖고 태어나는 운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알코올이 그동안 나를 적잖이- P226
위무했다. 알코올은 견고한 생활의 질서를 견디는 동안 생채기가 난 영혼을 달래주었고, 얕은 상상력에 기름을 부어넣어 주었으며, 만성적인불안과 공포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게 해주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술을끊을 생각은 조금도 없다. 2011년 1월 29일 토요일, 생장점을 손으로가리고 무작정 불리한 날씨를 견디는 겨울나무들에게 눈길을 좀 더 줘야겠다.- P227
한국일보문학상 시상식장에 다녀왔다. 수상자인황정은 씨를 축하하기 위해서였는데 그녀는 우리 회사의 청탁으로 원고를 쓴 필자이기도 하다. 의외로 시상식장은 한산했다. 동료문인들도 그다지 보이지 않았고 또래 소설가들은 더더욱 없었다. 더욱 특이했던 것은 수상자의 가족조차 시상식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비로소 알게 되었다. 황정은 씨가 무척 고독하고 단출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니외롭고 높고 쓸쓸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황정은 씨의 소설을 더욱 신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뼈저린 맑은 적막이 그의 소설에푸른 독의 향기를 선사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어이없게도 어떤 작가들은 적막을 빌리기도 한다. 그의 내부에서는적막이 태어나지 않으므로 할 수 없이 적막을 어디선가 빌려오는 것이다. 그것은 가짜 적막이다. 그의 곁에는 사람들이 흘러넘친다. 그러면서그는 끝없이 외롭다고 하소연한다. 자신은 외롭고 고독한 존재라고 스•스로 맹렬하게 주문을 건다. 그의 적막은 인사도 잘하고 사회성도 밝은 이상한 적막이다.- P228
주간신문에 사진에세이 연재를 시작하기로 하고, 그동안 찍어서 남 몰래 보관해온 사진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첫 번째 연재물에 들어갈 사진으로 나무를 찍은 사진을 골랐다. 내가 찍어서보관하고 있는 사진은 사람을 찍은 것과 동물을 찍은 것, 그리고 날씨를찍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나는 첫 사진을 식물로 정했다. 이렇게생각했다. 내 안에 살고 있는 생명은 동물에서 식물로, 발언에서 응시로진화하기 시작했다고. 이것은 좀 경솔한 진술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다. 나는 노골적으로 움직이는 것들의 숨소리와 그것에서 나는 냄새를 예전만큼 긍정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전의 나는 그것들을 역동적인 생의 작용이며 절제의 유혹을 초월한 순수한 에너지라고 찬탄해왔다. 나는 욕망을 언어로 말하는 그들의 명료한 의지와 의사가 맘에 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 눈에 그것은 다만, 살아서 움직일 수있는 것들의 오만처럼 보인다. 살아 있지만 움직이지 않는 것이 훨씬 고귀하고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 그리하여 나는 고양이보다 선인장이 편하고, 강아지보다 벤자민이 편해졌다. 선인장을 물어뜯고 있는 고양이가 있다면 주저 없이 회초리 같은 것을 들고 고양이를 나무랄 것이다.- P285
투명하고 차갑고 푸르고 높고 따뜻한 상처의 힘


해거름의 술집에서 김도언을 처음 만났다. 술빛보다 찬란하고 깊은 눈동자는 황홀과 불안을 동시에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나는 피리에 홀린 물고기처럼 그의 틈새에 파랗게 깃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궁토록 불친절한 사람이어서 함부로 스스로에게 희망의 언약을 베푸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곧 구원을 믿는 자의 결벽 같은 것이었다. 나는 다만 그의 눈빛에서 더 이상 나의 슬픔이 내 내부에만 머물 수 없으리란 것을 예감하고 말았다.
김도언은 여전히, 또 오래도록 ‘잘 웃지 않는 소년을 살고 있는 사람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상처의 힘을 온 영혼으로 살아내는 사람의 자세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울지 않는 사람과 잘 웃지 않는 사람 사이에 어떠한 불화가 존재할 수 있는지 나는 아직 그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그러나 이 투명하고 차갑고 푸르고 높고 따뜻한 책 안에서 나는 그가 이 세계에 대해 꿈꾸고 있는 화해와 용서와 구원의 증거를 물빛처럼 환하게 읽을 수 있다. 그것은 김도언에게 한 번 호명된 사람과 사물과 책들과 언어들이 비로소 어떠한 생명력으로 스스로의 놀라운 길을 획득하게 되는지를 확인하는 순간 자명해진다.
경이로운 장르의 책 한 권이 우주 안에서 빠르게 하느님에게 잊혀지고 있는 지구의 위치를 다시 특별하게 붙들어 매어놓는다. 김도언의 사색가적 직관만이 베풀 수 있는 이적이다.

류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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