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시인‘이라는 이데아적인 관념이 실재한다면, 시집을 내기 전의 시인이 시집을 낸 시인보다 진짜 시인에 더 가까울 것같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시집을 펴내는 순간 시인에게는 어떤 불가항력적인 시험이 오는 것 아닐까. 작가와 시인에게 오만함은 어떤 부분에서는 필요한 것인데, 그것은 당당함과 의젓함의 표현이어야 한다. 자신을 타자와 구별 짓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다른 이에 대한 업신여김의 표현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작가나 시인은 걸인보다 낮을 수 있고 황후보다도 높을 수 있는 존재다. 그런데 다들 황후보다 높은 쪽만 되려고 하지는 않는가.
책을 내기 전과 후, 상을 받기 전과 후, 혹은 편집위원 같은 영향력 있는 자리를 맡기 전과 후가 늘 다름없는 소설가와 시인, 나는 이런 사람들에게서 문학의 희망을 발견한다. 내가 지지하는 문학은 낮아서 높아지는 문학, 세상의 그 누구도 억압하지 않는 문학이다. 이게 불가능한것이라면, 아마도 내가 마시는 술이 조금 더 늘겠지?- P171
누구나 살다 보면 수많은 선택의 순간을 만나게 되는데, 신중하면 신중할수록 좋은 선택의 순간은 세 가지라고 쓴 적이 있다. 배우자, 첫 직업, 칫솔이라고. 어디 이 세 가지뿐이겠는가. 모든 선택은 다 어렵고 그래서 신중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삶에 매우 중요하고 절대적이고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어떤 요소들에 대해서 우린 선택의 기회조차 가질수 없는 경우도 있다. 부모가 그렇고, 형제가 그렇고, 직장 상사나 동료가 그렇다. 심지어는 사는 도시나 동네조차 우리 맘대로 결정하기 힘들다. 내 쌍둥이 형만 해도 회사의 명령에 따라 근무 도시를 다섯 번이나 옮겨야 했다. 나는 그 도시들의 이름을 간혹 중얼거리곤 한다.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들의 내역에는 시와 소설도 포함시키고 싶다. 시와 소설은 매순간 마주치거나 쏟아지는 언어, 사고, 상상력을 분별하고 선택하는 작업이다. 남길 것과 버릴 것을 선택하는 동안의집중과 긴장을 쾌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시와 소설을 쓰면서 행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이 선택이란 사실상 시인과 소설가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것은 그냥 시와 소설이 하는 것이다. 작품과 작가를 분리해서 생각하자는 구조주의자들의 아이디어도 이런 생각에서 나왔을 것이다.- P175
시는 혹독한 결핍의 산물이어야 한다. 그 결핍은 영원히 채울 수 없는것이어서 참혹하다. 시 쓰기는 이 참혹의 진창을 뒤져 사금을 줍는 행위다. 여림 시인은 진창에 들어가 사금을 줍다가 평생토록 햇볕 한 번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나는 그의 죽음이 서럽다. 그를 지상의 영토에서 무자비하게 추방한 이는 다름 아닌 시인들이다. 그 잘나고 힘센 시인들은 지금 얼마나 행복하고 명랑한가.
여림 시인은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화려하게 등단했지만 세상을 뜨기전까지 단 한 편의 시를 발표했다. 이 사실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가얼마나 ‘세상에게 철저히 지기만 하는 시인이었는지를. 그래, 모름지기- P198
시인이라면 패배하는 데 성공해야 한다. 패배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 시인은 실패한 시인, 아니 가짜 시인일 뿐이다.
이제 와서 고백하지만, 나는 비겁하게도 세속의 편리와 풍요를 포기할 자신이 없어 시인의 길을 가지 못했다. 나는 비겁을 못 면했고 그 대가로 부끄럽게 살아남았다. 하지만 어느 날은 술의 힘을 빌어서라도 이렇게 묻고 싶은 것이다. 나는 지금 지나치게 불행과 멀리 있는 것이 아닌가. 불행이 너무 멀리 가지 않도록 불행의 옷소매를 붙잡아야 하지 않는가. 같은 해 같은 지면으로 등단한 시인이 죽음으로써 내게 심어준 편견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P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