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저녁별 나오시니
오늘은 세상이 날콩처럼 비려서
세상에 나가 말을 다 잃어버려서
돌아와 웅크려 누운 사내는
사다리처럼 훌쭉하게 야윈 사내는
빛을 얇게 덮고 일찍 잠들었네
초저녁별 나오시니
높고 맑은 다락집에서 기침하며 나오시니
물그릇 같은 밤과
절거덩절거덩하는 원광(圓光)- P24
눈보라
들판에서 눈보라를 만나 눈보라를 보내네
시외버스 가듯 가는 눈보라
한편의 이야기 같은 눈보라
이 넓이여, 펼친 넓이여
누군가의 가슴속 같은 넓이여
헝클어진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고독한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기다리는 사람이 가네
눈사람이 가네
눈보라 뒤에 눈보라가 가네- P25
겨울 엽서
오늘은 자작나무 흰 껍질에 내리는 은빛 달빛
오늘은 물고기의 눈 같고 차가운 별
오늘은 산등성이를 덮은 하얀 적설(積雪)
그러나 눈빛은 사라지지 않아
너의 언덕에는 풀씨 같은 눈을 살며시 뜨는 나- P28
눈길
혹한이 와서 오늘은 큰 산도 앓는 소리를 냅니다
털모자를 쓰고 눈 덮인 산속으로 들어갔습
니다
피난하듯 내려오는 고라니 한마리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고라니의 순정한 눈빛과 내 눈길이 마주쳤습니다
추운 한 생명이 추운 한 생명을
서로 가만히 고요한 쪽으로 놓아주었습니다- P29
낙화
꽃이라는 글자가 깨어져나간다
물 위로
시간 위로
바람에
흩어지면서
꽃이라는 글자가 내려앉는다
물 아래로
계절 아래로
비단잉어가 헤엄치는 큰 연못 속으로- P32
감문요양원
꽃잎이 흩날리는 대낮에
노인이 환한 쪽을 바라본다
휠체어에 앉아
송홧가루 날리고 산비둘기 우는
앞산의
볼록한 봄까지
먼 눈길- P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