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의 전제조건은 되도록 적게 소유하는 거야. 많이 가지면 떠나기가 어렵거든. 사랑도 마찬가지야. 누구나 한번쯤은 목숨을 걸고 사랑을 하지, 청춘의 날들을 보내면서 사랑에 목숨을 걸어보지 못하는 것도 불행한 일이야, 그치? 너도 그랬겠지만 나도 한때는 목숨을 걸고 사랑했었고, 그 여자와 결혼했었어. 그런데 이혼했지. 이혼의 책임을 묻진 마. 중요한 것은 이혼 자체니까. 어쨌든 마흔이 넘어가니까 생각이 많이 바뀌더라.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몰라도 나는...... 사랑도 가벼워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청춘의 시절에는 결코 하지 않던 생각이지. 그런데 지금은 가볍게 사랑해야 떠나기도 쉽고 상처도 덜 받는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늙었거나 가벼워졌거나 둘 중 하나겠지. 뭐 어쨌든 다 좋아. 늙으면 어떻고 가벼워지면 어때? 나는 지금 자유를느끼고 있는걸. 유목의 핵심은 자유인데, 진정한 자유란 고독을견디는 정신의 힘에서 비롯돼. 외롭다고 징징거리는 사람은 결코 자유인이 될 수 없지. 그 사람은 외로운 사람이 아니야. 심심하기 싫다는 엄살쟁이인 것이지.‘- P55
춤추는 별 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내면에 혼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혼돈이 별로 탄생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상처와 고통의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
문제는 규의 혼돈이 무엇인지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외면에 드러난 행위로는 실존의 위기와 혼돈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내면을 뒤흔드는 혼돈일 텐데, 무엇이냐고 묻기가 두려웠다.
황무지를 걸으면서 나는 나를 극복하기 위해 애썼다. 앞서 간사람들의 발자국이 보이지 않으니 길도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도 이젠 지긋지긋했다. 규는 말없이 걷기만 했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아들 앞이라 꾹 눌러 참았다. 오로지 두 발로 걷는 속도만큼이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다. 내 삶의 그림자는 길고 짙어 발길이 무거웠지만, 그림자가 짧은 규의 발길은 가벼웠다.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자세히- P65
보면 조금씩은 다른 풍경이었지만 전체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삶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삶은 크게 다르지 않은 날들의풍경과 시간들로 채워져 있다. 나는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 절룩거렸다. 규는 여전히 날아갈 듯 가볍게걸었다.
"아빠, 전봇대."
규가 까마득한 지평선을 가리켰다. 규의 손끝을 따라가니 전봇대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전봇대를 따라가면 마을이 나올 터였다. 마을에서 휴식을 취한 뒤 지프를 빌리면 여행이 좀쉬울 것 같았다. 전봇대를 보니 힘이 솟았다. 규와 나는 또다시침묵 속으로 빠져들었고, 걷는 행위에 하염없이 몰두했다.
걸음마다 잠시 내 곁에 머물던 이름들이 호명되었다. 숙자, 재영, 운서, 추억이 된 이름들이 떠오르자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추억을 지우기 위해 빠르게 걸었다. 추억이란 과거의 어느순간을 왜곡하고 미화하여 편집된, 새로운 기억이었다. 나는 자주 추억에 속았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나는 언어의 바깥,
마음의 바깥에서 오로지 몸을 움직여 황무지를 건널 수 있기를 소망했다.- P66
봄이 오면 꽃이 필 것이고, 꽃이 지면 열매가 익어갈 것이다.
열매가 지상에 떨어져 긴 겨울을 견디면 또 새싹이 돋고 꽃이필 것이다.
새로울 것도 없고 빛날 것도 없는 다짐을 마음에 새기고 서재에서 나왔다. 하지만 다짐은 다짐에 불과했고 눈을 뜨나 감으나흉측한 악몽의 나날들이 이어졌다. 자주 죽고 싶었고, 무엇을 하든 흥이 나질 않았다. 아내와 나는 한동안 허깨비가 되었다. 그렇지만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면 언제나 밝게 웃었다.- P146
그때,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청명한 방울 소리를 냈다. 모두 나무를 쳐다보았다. 나무는 황금빛에 둘러싸여 있었다. 아, 모두 말을 잊었다. 바람이 방울을 흔들면 그 속에서 빛이 쏟아지듯 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무 뒤에서 어떤 사람이 서쪽으로 넘어가는 태양을 등지고 나타났다. 그림자처럼 검은 실루엣으로 다가오는 사람의 등뒤로 햇살이 아우라를 만들어 눈부셨다. 숨이 막혔다.
"모든 생명의 자궁 어머니 대지에게, 세차게
흐르는 대지의 딸에게, 내리쬐는 햇살 대지의 아들에게, 생명의 젖줄 초원의 풀에게, 바람과 눈보라와 소나기에게 복을 비나이다 비나이다. 아흔아홉 어워에 아흔아홉 번 절을 하고......"
그는 나무를 향해 방울을 흔들며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어워에서 나부끼는 하닥처럼 짙은 남색의 기운이 그의 몸에서 뿜어나오자 풀과 나무, 바람과 구름, 대지와 하늘이 깨어나는 느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