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길 위에서

그렇게 2월이 계속되었다. 단조롭고 하얗고 추운 날들이 숱하게 지나갔다. 하늘은 종종 타운 변두리에 펼쳐진 지긋지긋한 설원처럼 하얀색이었고, 온 세상은 그렇게 끝없이 하얗게 뻗어 있었다. 지평선을 따라 얼어붙은 거무스름한 나무들과 낡아서 지붐이 내려앉고 있는 붉은 헛간만이 그 풍경을 깨뜨리고 있었다.
눈은 갑자기 녹았다. 찬란한 날이었다. 하늘은 푸르렀고, 햇살은눈 녹은 물이 똑똑 떨어지는 나무에 튕겨 흩어졌다. 세상은 메인스트리트의 보도에 또각또각 울리는 구두 소리와 눈이 녹으면서 길가에 생긴 개울로 생기가 넘쳤다.
"오늘 같은 날에 불쌍한 영혼은 자살이라도 하겠는걸." 이저벨은 칸막이 자리에 꼿꼿하게 앉아 확신에 차 말을 내뱉고는 달그락 소리를 내며 잔 받침에 스푼을 내려놓았다. 토요일 오후 그들은 다리가 끝나는 곳 옆에 있는 리오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창문으로 비쳐들어온 햇빛은 푸른색 리놀륨 탁자 위에서 한 번꺾여 이저벨이 잡은 금속 크리머에 닿았다가 튕겨나왔다.
"통계치에 따르면 그래." 이저벨이 커피에 우유를 따르려고잠시 손을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 "자살은 대부분 한파가 꺾인- P101
직후에 일어난다. 첫 햇살이 따스하게 비치는 날."
에이미는 도넛을 하나 더 먹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가 안 된다고 할까봐 지금 먹고 있는 것을 천천히 씹었다.
"예전에 알던 어떤 남자는, 엄마가 어릴 때 말이야." 이저벨이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주 과묵한 남자였어. 아내는 선생님이었고, 어느 날 아내가 집에 돌아왔더니 남편이 복도에 죽어 있었대. 스스로 총을 쏴서. 불쌍한 영혼.."
에이미는 도넛을 먹다가 엄마를 쳐다보았다. "정말요?
"그래. 정말 슬픈 일이지."
"왜 그랬대요?"- P102
낮이 길어졌다. 날도 더 따뜻해졌다. 눈은 더디더디 녹아 계단이나 보도, 도로 가장자리에서 질퍽거렸다. 에이미가 로버트슨선생과 대화를 나눈 날에는, 집으로 걸어 돌아갈 때 이제 엄마가 오기 전에 돌아오려고 학교에서 여유 있게 나섰지만ㅡ낮의따스함은 사라져 있었다. 아직 우윳빛을 머금은 하늘에서는 태양이 빛을 뿜는 하얀 웨이퍼처럼 빛나고 있었지만, 코트 지퍼를연 채로 가슴에 책을 끌어안고 걸어가면서 그녀는 드러난 목과손과 손목에 축축하고 싸늘한 공기가 닿는 것을 느꼈다. 라킨데일 들판 위로 펼쳐진 늦은 오후의 하늘, 흰색 비탈 위로 사라지는 돌담, 눈이 녹으면서 거뭇해지는 나무, 이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봄을 약속하는 신호처럼 보였다. 심지어 저멀리 하늘에서- P144
조그맣게 무리 지어 나는 새들도 더없이 고요한 침묵 속에서 묵묵히 날갯짓을 하며 뭔가를 약속하고 있었다.
에이미가 보기에는 천장도 더 올라간 것 같고 하늘도 더 높아보여서 이따금 차가 한 대도 지나가지 않으면 팔을 들어 공중에서 휘젓기도 했다. 로버트슨 선생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장난기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면 그녀의 가슴속에 커다란 기쁨이솟았다. 그에게 말하려 했지만 잊어버린 온갖 것들이 뒤엉켜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녀의 내면에는 어둡고꿈틀거리는 것이 가슴속 깊숙이 들어앉은 듯한 작은 슬픔의 조각들이 있었다. 이따금 혼자 고가도로를 걷다가 뭔가를 잃은 듯한상실감이 들면, 그녀는 어쩔 줄 몰라 걸음을 멈추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들을 내려다보았다. 그 느낌이 엄마에 대한 생각과연결되어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 듯했다. 그러면 에이미는 빈집에서 엄마의 흔적을 찾으려고 조바심을 내며 서둘러 집으로돌아갔다. 샤워기 꼭지에는 스타킹이 걸려 있었고 엄마의 서랍장위에는 베이비파우더가 놓여 있었다. 자갈 깔린 진입로로 엄마의 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릴 때처럼 이런 것들은 에이미를안심시켰다. 그러면 괜찮았다. 엄마가 집에 있다는 말이니까.- P145
서점에 난생처음 와본 정도는 아니지만, 맙소사. 책이 정말 많은 것 같았다. 그녀는 제목들을 읽으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셰익스피어가 이렇게 자그마한 보급판으로 나와 있는지 몰랐다. 한 권을 집어 보니 책의 두께가 얇고 표지 그림이 아름답고 글씨체가 장식적이라 굉장히 친근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좋아졌다. 『햄릿』.
『햄릿』 이저벨은 카펫 위로 걸어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햄릿』에 대해서는 당연히 들어보았다. 어머니와 미쳐버린 여자친구가 등장했다. 어쩌면 그녀가 뭔가 다른 작품을 착각한 건지도몰랐다. 그리스 작품이던가. 계산대 앞에 서서 그녀는 지금 자기가 떠안으려고 하는 것의 어마어마함에 불안을 느꼈다. 하지만턱에 듬성듬성 금발 수염이 난 젊은 점원이 계산대에서 삑삑 소리를 내며 심드렁하게 책값을 입력하자 그녀는 기뻤다. 겉보기에는 그녀가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사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명백한 근거가 없다는 의미였다. 알맞은 배역을 맡은 것처럼 보일 거야. (그녀는 자기가 방금 소소한 농담을 한 것을 깨닫고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구입한 책을 손가방에 넣고 바람 부는 거리를 가로질러 차로 걸어갔고, 다리를 건너 공장으로 돌아갔다.- P150
지금까지는 괜찮았다고, 이저벨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살면서녹아버리고 싶은 욕망, 사라지고 싶은 욕망은 그녀도 당연히 경험했다. 이슬이 되고 싶었던 적은 없었지만, 생각하면 그건 아름다운 표현이었고, 따지고 보면 그녀가 셰익스피어를 읽는 이유도 결국 그거였다. 그는 천재였고, 평범한 우리는 절대 생각하지못할 방식으로 사물을 표현할 수 있으니까. 그녀는 이 모든 것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며 자세를 더 꼿꼿이 했다. "영원한 존재가 자기 학살을 금하는 섭리를 마련하지만 않았다면! 오, 신이시여! 오, 신이시여!"
그녀는 이 부분을 몇 번 더 읽었다. "영원한 존재"가 대문자로되어 있어서 그녀는 셰익스피어가 여기서 신을 일컬은 거라고추측했고, 자기 학살에 관련된 부분은 자살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햄릿은 자살하고 싶었지만 신의 섭리가 그것을 금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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