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길 위에서

나는 무거운 장롱과 서랍장을 뒤지러 침실로 향한다. 이 두 군데속에서 뭔가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장롱 안에는 낡고해진 티셔츠와 하도 많이 빨아서 형태를 잃어버린 바지들이 잔뜩들어 있다. 거의 다 내가 알아보지 못하는 것들이다. 집을 떠난 이후로 엄마를 본 적이 별로 없으니까. 나에게 익숙한 건 옷에 밴 냄새다. 눈을 감고 옷감을 어루만지니, 침대에 나란히 누워 엄마가 내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는 것 같다. 엄마를 향한 깊은 두려움, 그리고 똑같이 깊은, 엄마를 기쁘게 하려는 결의가 나를 채운다. 별들 사이를 오가는 빛처럼 엄마에게서 내게로 또 내게서 엄마에게로 흐르는, 너무 절대적이라 숨 막히는 우리의 사랑이. 엄마의 좀먹은 스웨터에 얼굴을 파묻고 눈물로 적신다. 수년간 기억조차 나지 않던 숱한 추억이 순식간에 생생히 아른거린다. 바가노바 오디션을 봤던날, 스베타 이모가 합격 소식을 발표하자마자 나는 건물 밖으로 뛰•어나갔다. 쌩쌩 내리쬐는 햇볕 아래 키 작고 통통한 엄마가 서 있었다. 그날 엄마는 하늘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도 왠지 흑곰처럼 어두워 보였고, 벌겋고 땀에 젖은 얼굴이었다. 어린 나이였는데도 그 더- P400
위 아래 한참을 서서 나를 기다렸을 엄마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나는 엄마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소리쳤다. "제가 해냈어요, 엄마를 위해서!" 그런 다음,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걸어간 우리 모녀는 가판대 앞에 서서 스타칸치크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그때 우리는 그런 군것질을 할 돈이 없었고, 풍미 진하고 농염한 햇빛에 살짝 녹아 더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은 내게 기적의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내 평생 가장 순수한 행복을 바로 그때 누렸다. 과거와미래를 통틀어서 내 인생의 가장 순수한 사랑을 느꼈기 때문이다.
죄책감이 해일처럼 나를 뒤덮으며 숨을 조른다. 어떻게 내가 엄마를 비난할 자격이 있다고 믿었는지 어처구니가 없다. 입을 채 틀어막기도 전에 짐승의 울음소리가 내 목구멍을 타고 나온다. 나는스웨터를 비틀어 잡고서 엄마를 부르며 흐느끼고, 급히 들어온 스베타 이모가 나를 두 팔로 안아준다. - P401
내 일에만 신경 쓰기에도 벅차게 삶은 이어졌다. ‘지젤‘로 데뷔한 후 나는 골절로 인해 파리에서 두 번째 시즌 대부분을 쉬어야 했다.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나를 한 조각씩 제자리로 돌리는 과정은 길고 예측할 수 없었다. 마침내 복귀했을 때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내 춤은 이전보다 더 나아졌고, 동시에 더 못해졌다. 전보다 나아진 부분은 명확했다. 나는더 이상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이 없었고, 그러자 내 존재감은 나만의 것이 되어 더욱 자유로워졌다. 정식 교육이 다듬고 망쳐놓기 전의 어린아이들이 이렇다. 전문 무용수 중에 그 정도로 자신의 내면에 충실한 사람은 극히 드물다. 실비 길렘이 그랬고, 남자무용수 중에는 블라디미르 바실리예프가 떠오른다. 이런 태도를허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극도의 예술적 진정성이라고 볼 수도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이런 자질은무용수에게 독특하고 대체 불가능한 특수성을 부여한다. 내가 무대에 복귀한 뒤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세월을 보내면서 얻은 게 바로 이것이었다.- P405
그러나 내 춤 실력은 예전 같지 않기도 했다. 거기에는 자유로운존재감 따위의 신비와는 거리가 먼 아주 간단하고 물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끊어진 백금 반지를 다시 용접해 놓은 듯, 금이 갔던 내뼈도 겉으로는 멀쩡히 붙은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약해져 있었다. 내 점프는 이제 믿기지 않게 가볍지도, 경이롭지도 않았다. 테크닉 면에서 나를 돋보이게 했던 폭발적인기교도 이미 잿빛으로 바래버린 뒤였다. - P405
여기서 잠시 명품 쇼핑에 별 관심 없이 살았던 그간의 세월을 후회했다. 내가 입은 샤넬 드레스는 발레단 의상 협찬과 함께 받은 선물이었다. 처음 파리에 왔던 그 주에 녹색 핸드백을 산 다음부터는아름다운 물건으로 나를 입증하는 일에 흥미를 잃었다. 그러나 현실이 무너져 내리는 시기에는 사물이 나를 받치는 발판이 되어주기도 한다. 별것 아닌 머그잔이나 소파 같은 물건이 때로는 인간의마음보다 훨씬 굳건하고 의리 있고 믿음직스럽다. 내가 조금 더 현명했더라면 칼라스처럼 내 상처를 휘황찬란한 보석으로 감추고 대중 앞에 나섰을 텐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감독에게 계약 해지를당했던 그날 밤, 칼라스는 자신이 소유한 모든 보석을 한꺼번에 휘감고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진 값비싼 보석이라고는 달랑약혼반지 하나뿐이었다. 나는 몇 분 동안 그 반지를 손가락에 끼웠다 빼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끼고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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