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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김탁환
소설가 이야기 수집가
서울대 국문학과에 진학하여 박사과정을 수료할 때까지 신화전설 민담 소설을 즐겼다. 고향 진해로 돌아가 장편작가가 되었다. 해가 뜨면 파주와 목동 작업실을 오가며 이야기를 만들고, 해가 지면 이야기를 모아 음미하며 살고 있다.
장편소설 『거짓말이다」 「목격자들」 「조선누아르」 「혁명」 「뱅크」「밀림무정」 「조선마술사」 「아편전쟁」, 산문집 『아비 그리울 때보라」 읽어가겠다」 「독서열전」 「원고지」 「천년습작 등을 썼다.
영화 <조선명탐정> <가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황진이><천둥소리>의 원작자이다. 문화잡지 1/n을 창간하여 주간을맡았고, 콘텐트기획사 ‘원탁‘의 대표 작가이다.
오래전부터 엄마에 관해 쓰고 싶었다.
내 나이 서른살에도, 마흔살에도, 엄마의 삶이 궁금했다.
그때는 써야 할 이야기가 넘쳤으므로, 엄마는 자꾸 밀렸다. 언제나 내뒤에서 계실 거니까. 이번이 아니라도, 곧 돌아와 쓰면 된다고 스스로를합리화했다. 한번 미루니 두서너 해가 휙휙 지나갔다. 그렇게 나는 장편작가가 되었고 등단 20년이 지났지만, 엄마의 삶을 오래 들여다보며 문장으로 옮기진 못했다.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금방 옮길 수 있다고 자신했다. 너무 늦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도 없이.- P8
기다린다는 말이 견딘다는 뜻임을 국민학교 6학년 때 처음 알았다. 단편에서도 썼듯이, 그해 나는 창원시 웅남국민학교에서 마산시 봉덕국민학교로 전학을 했고 폐결핵에 걸렸다. 다행히 전염성은 아니라서 휴학하진 않았지만, 체육 시간엔 언제나 혼자 남아 빈 교실을 지켜야 했고, 달리는 것이 금지되었다. 느릿느릿 걸으며 병이 완쾌될 때까지 1년을 기다렸다. 그때 나는 견뎌야 했다. 친구들처럼 운동장을 맘껏 달리고 싶은바람을 꾹꾹 눌러야 했던 것이다. 점심시간이나 체육 시간에 땀 냄새 풀풀 풍기며 들어오는 친구들을 피해 미리 뒤뜰로 나가 걸었다. 나무와 벤치 사이를 서성거렸다. 기다린다는 것은 견딘다는 뜻이고 견딘다는 것은 ‘혼자‘ 견딘다는 뜻임을 그때 또 깨달았다.
졸업을 며칠 앞두고 엄마와 함께 병원으로 갔다. 의사는 내 가슴을 찍은 엑스레이 사진을 곰곰이 들여다보더니, 완쾌 판정을 내렸다. 더이상약을 먹을 필요도 없고, 달리기를 금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나는 병원을 나서자마자 집까지 달려가고 싶었다. 버스를 타도 열두 정거장이넘는 먼 길이지만, 그날은 달리고 또 달려도 지칠 것 같지 않았다. 발뒤꿈치를 들고 무릎을 구부리며 엄지발가락에 힘을 실어 달려나가려는 순간, 작은 울음이 뒤통수에 닿았다. 돌아보니, 엄마가 오른손바닥으로 입을 막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내가 견디며 기다리는 동안, 엄마는 그런 나를 ‘혼자‘ 바라보며 견디고 기다렸던 것이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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