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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멀리서도 가까이서도


멀리서 바라보는 산동네는 아름답다
언덕을 기어 올라간 집들은 당당하기 성곽 같고
집들을 반쯤 덮은 붉은 장미는 멀리까지 향기를 뿜는다
밤이면 창문마다 별들이 매달리겠지
새벽이면 기우뚱 마을 뒤로 초승달이 지고

골목에 나뒹구는 헌 옷가지가 낯익고
담 너머로 넘어오는 된장 냄새가 반갑다
음정이 맞지 않는 노랫소리가 정답다
개짖는 사이사이 숨죽인 시비까지 귀에 익어

들어가 걸어보면 산동네는 더 아름답다
멀리서도 아름답고 가까이서도 아름답다- P54
허공


해 지고 날 어두워지니 길이 보인다
밝은 대낮에는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인다
잡초만 어지럽게 자라고
잡초 속에 풀벌레가 숨죽인 길이 보인다

달과 별이 없어 더 아름다운 길이 보인다
잡초도 풀벌레도 잠들어 더 아름다운 길이 보인다

머지않아 내 그림자만 길게 드리울
마침내 그것마저 사라지고 없을
내가 휘적휘적 걸어갈 허공이 보인다

눈부신 햇살 아래서는 보이지 않던
허공이 보인다- P69



세상의 모든 소리들이 다
귀를 통해 들어오는 것만은 아니다
개중에는 집요하게 살갗을 파고들어
동맥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는 것이 있다
구석구석 그 소리가 닿을 적마다
우리들의 몸은 전율하고 절규하다가
드디어는 그것을 따라
통째로 밖으로 빠져나온다
한순간 높이 하늘로 치솟았다가
폭죽처럼 터져 지상으로 쏟아져

새파란 풀밭에
조각조각 꽃이 되어 흩어진다

해가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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