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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내가 사는 마을은 강이 있는 산골 마을, 산을 그려주며 내려온 눈송이들이 강으로 간다. 검은 바위 위에도 새들이 지나다니는 마른 풀잎 사이에도 뒤꼍 감나무 꼭대기 까치집에도 홀로사는 산골 사람들의 지붕 위에도 눈이 오는데, 문태준의 시를읽는다. 시집을 다 읽고 눈 오는 마을을 한바퀴 돌고, 집에 돌아와 또 시집을 읽고 눈 그친 마을을 한바퀴 돌아도 자꾸 생각이 끊기고 말문이 막혔다. 해가 지고 어둠이 오고, 어둠 속으로 눈발이, 그리고 내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나는 눈보라가 치는 꿈속을 뛰쳐나와 새의 빈 둥지를 우러러밤처럼 울었어요"(「이별」), 태준아, 나는 울기 싫다.
김용택 시인



당신은 꽃봉오리 속으로 들어가세요
조심스레 내려가
가만히 앉으세요
그리고
숨을 쉬세요
부드러운 둘레와
밝은 둘레와
입체적 기쁨 속에서- P10
첫 기억


누나의 작은 등에 업혀
빈 마당을 돌고 돌고 있었지

나는 세살이나 되었을까

별바른 흰 마당과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깰 때 들었던
버들잎 같은 입에서 흘러나오던
누나의 낮은 노래

아마 서너살 무렵이었을 거야

지나는 결에
내가 나를
처음으로 언뜻 본 때는- P11
음색(音色)


시월에는
물드는 잎사귀마다 음색이 있어요

봄과 여름의 물새는 어디로 갔을까요
빛의 이글루인 보름달은 어디로 갔을까요
뒤섞여 있던 초록들은 누구의 헛간으로 갔을까요

나는 갈대의 흰 얼굴 속에 있었어요
마른 잎에서는 나의 눈을 보았어요

얇고 고요한 물, 꺾인 꽃대, 물에 잠기는 석양
그리고 그 곁엔
간병인인 시월- P12
수평선


내 가슴은 파도 아래에 잠겨 있고
내 눈은 파도 위에서 당신을 바라보고 있고

당신과 마주 앉은 이 긴 테이블
이처럼 큼직하고 깊고 출렁이는 바다의 내부, 바다의 만리

우리는 서로를 건너편 끝에 앉혀놓고 테이블 위에 많은것을 올려놓지
주름 잡힌 푸른 치마와 흰 셔츠, 지구본, 항로와 갈매기, 물보라, 차가운 걱정과 부풀려진 돛, 외로운 저녁별을- P18
봄산


쩔렁쩔렁하는 요령을 달고 밭일 나온 암소 같은 앞산 봄산에는
진달래꽃과새알과 푸른 그네와 산울림이 들어와 사네

밭에서 돌아와 벗어놓은 머릿수건 같은 앞산 봄산에는
쓰러진 비탈과 골짜기와 거무죽죽한 칡넝쿨과 무덤이 다시, 다시 살아나네

봄산은 못 견뎌라
봄산은 못 견뎌라-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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