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영은 1939년 경북 청송에서 출생했고 장터가 있는 진보읍은 그의 문학적 생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대구에서 대구농림고를다니면서 청소년 시절을 보내고, 1959년 농대에 진학하라는 의붓아버지의 분부를 뿌리치고 도망하다시피 상경했다. 고교 시절에 동시를 써서 지방지에 투고를 하여 지면에 실리기도 했으니 은근히 문학에 뜻을두었던 터였다. 서라벌예대의 장학생 모집에 응시하여 입학했으나, 김동리와 박목월로부터 시보다는 산문을 써보는 게 어떠냐는 ‘삼엄한 권유‘를 받았고, 그 충격으로 군에 입대했다. 1962년 군에서 제대하고 서라벌예대를 졸업한 뒤 안동의 엽연초생산조합에 취직했다. 김주영은이십대부터 삼십대에 이르기까지 십육 년간을 엽연초조합의 주사 경리직으로 근무한다.- P284
키 크다고 난쟁이 흠한 적없고, 대하소설 썼다고 잡문장이를 손가락질해본 적도 없으니, 있어도없는 것 같고 없어도 있는 것 같던 그 무던한 처신은, 이것이 곧 비록 복은 더디 와도 재앙이 저절로 물러갈사람이 된 그의 근본이다"라고 기록한 문장이 족집게가 되었다. 그렇기는 하여도 그가 예전 소설가 이병주의 충고를 회상하기를 "절대 도덕적인 것에 얽매여선안돼. 생활도 그래야 돼"라고 했다는 말에는 나도 적극 지지 찬성이다. 예술가가 도덕에 얽매여서는 안 되겠지만 ‘무던한 처신‘은 어쩐지 아쉬운 면이 있다. 사람마다 다르기야 하겠지만 예술가의 삶이란 부딪치고넘어지고 깨져서 상처가 아물 날이 없거나, 억제된 가운데서도 참을 수없이 터져나오는 애증의 미친 구석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P289
이 작품은 시종 거침없는 욕설과 음담으로 이어지는데도 등장인물모두가 어쩐지 ‘순둥이‘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그것은 작가가 하층민의 악착같은 밑바닥 고생에는 어딘가 벗어난 것 같은 순진함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작의 둑방동네에 대한 실감이나, 조세희의 추상화되었지만 빈민의 도시생활을 꿰뚫는 난장이 연작에서 우리가 느꼈던 강렬한현실은 김주영의 고물수집소에 이르면 어딘가 시골 장터의 아직 순박하고 어수룩한 ‘것‘들을 데려다놓은 듯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이들이 사용하는 은어도 다르고 도회지에서의 먹이사슬의 관계도 내가 알고 있는 현장의 그것과는 달리 어색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읽히면서 재미있다. 그것은 작가의 입심과 천부적인 낙관적 태도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무난함‘이 그로 하여금 오랫동안 글을 쓰게 해주었던 미덕이 아니었을지.- P290
당시에는 과작이라고 했어도 작가가 일생을 바친 어느 즈음에는 저절로 쌓여서 적지 않은 책들이 남게 된다는 것을 새삼 발견했다. 서영은은 십여 권의 산문집을 제쳐놓고라도 중단편전집 다섯 권에 장편소설 여덟 권을 써놓았다. 나는 어쩐지 서영은의 글도 그렇고 그의 삶도수도자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정돈되고 성실하고 반듯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실수에 대해서는 아량이 넓은 사람이었다고 기억한다. 그가원로 작가 김동리와 결혼을 했을 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길이 될지 우리 몇몇은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그의 연보에 짤막하게 한 줄도못 되게 나와 있는 결혼, 병구완, 사망, 이사 등등의 단어 밑에는 그야말로 드러내놓고 표현 못할 인고의 시간이 감추어져 있다. 칠십이 다되어 한반도를 걸어서 종주한 것과 같은 사십여 일의 ‘스페인 산티아고길 위에서 그녀는 신과 더불어 자신의 지난 시간들을 새로이 갈무리했을 것이다.- P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