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수리나무며, 복가시나무, 가시나무, 쥐똥나무, 황철나무 등 잡목이울창한 까치산 후미진 계곡 속으로 끌려간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아버지의 슬픔과 분노가 범벅된 아버지의 울부짖음만이 산울림처럼 쩌렁쩌렁 울려왔다.
월곡리 사람들은 아무도 아버지의 죽음을 말리지 않았다. 아이들과 노인들까지도 마을 앞 돈들막 위에 모여 서서는 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표정하게, 까치산 계곡에서 울려오는 아버지의 울부짖음을 심장에 송곳질하는 아픔을 참으며 듣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끌고 간 청년들보다도 아버지의 죽음을 말릴 생각은 않고 무표정하게 구경만 하고 있는 이들 마을 사람들이 더 원망스러웠다.
미루나무에 묶인 채 마을 사람들을 향해 온몸의 힘을 쥐어짜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서울에서 돌아온 부면장네 도련님과 아버지가 부면장 집으로 오기 전 오랫동안 머슴을 살았던 대추나무집 최 주사어른과 통샘거리 박생원 어른도 불러보고, 땅뺏기 놀이며 자치기, 발들고 밀어내기 놀이 등에 가끔 나를 끼워주곤 했던 월곡리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며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P231
그러나 내 울부짖음은 까치산 잡목숲 속에서 점점 희미하게 산울림이 되어 들려오는 아버지의 목소리처럼 외로움과 고통을 주었을 뿐이었다.
아버지를 끌고 간 청년들은 얼마 뒤에 찬란한 가을 햇살을 등지고 개선장군처럼 까치산에서 내려왔다.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돈들막으로 가서, 부면장 어른 부자와 이장 어른을 죽인 빨갱이의 앞잡이를 처치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물레방앗간 옆 째보네 주막으로 몰려가 술을 퍼마셨다.
아무도 미루나무에 묶여 있는 나를 끌러주지 않았다.
나는 미루나무에 묶인 채 해가 높이 떠오를수록 연리초꽃처럼 빨강보랏빛으로 변하는 까치산만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어디쯤 죽어 있을까. 먼 시선으로 잡목숲을 헤집고 있는 것이었다.- P252
산골의 짧은 가을 해가 미끄러지듯 할미산 너머로 떨어지고, 월곡리사람들의 마음처럼 음산한 어둠이, 대지에서부터 까치산 목을 조르기라도 하는 듯 꾸역꾸역 디밀고 올라가서야, 남편도 없이 곰배팔이‘ 아들과함께 사는 째보네 주막아줌마가 미루나무에 묶인 나를 풀어주었다.
그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 아버지를 찾으러 까치산에 갈 수가 없었다.
언젠가 꼴을 베러 가서 낫을 부러뜨리고 돌아와 부면장네 할아버지한테, 눈에서 마른 번갯불이 튀도록 호되게 꾸중을 듣고 쫓겨났다가,
날이 어두워서야 어슬렁어슬렁 돌아왔을 때처럼. 나는 온몸의 물기가•좍 빠져 휘주근한 몰골로 아버지도 없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부면장 집에서는 나를 안으로 들여넣어주지 않았다. 은혜를 모르는 개만도•못한 살인자의 아들을 거두기 싫다면서 밖으로 내쫓고 대문을 걸어버렸다.- P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