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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황동규

193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영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고, 영국 에딘버러 대학 등에서 수학했다. 1958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한 이래 어떤 개인 날』 『풍장』 『외계인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등14권의 시집을 펴냈다.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현재 서울대 영문과 명예교수이다.
낭만적 우울을 주조로 한 초기의 순정 서정시에서 죽음을 통한 삶의 선적 명상을 거쳐 ‘서정시‘를 자임하는 시편에 이르기까지 이 시인은 제자리걸음을 철저하게 외면하면서 의미 있는 변모와 성숙을 동시에 성취하였다. 시종일관 시의 산문화와 무책임한 모호성과 시대의 비속성에 저항하여 거기 오염되기를 거부하면서 참신한 언어의 명징성을 지향했고 그럼으로써 풋풋한 구상성을 획득하였다. 그리하여 시력 반세기에 걸쳐 이룩한 높낮이의 굴곡이 없는 시편들은그의 시에 나오듯 "무서운 복수(復讐"로 우리 시의 하늘을 비상하며 부유하고있다. 물리칠 길 없는 매혹이요 장관이다.
ㅊ유종호(문학평론가)
기도


1

내 잠시 생각하는 동안에 눈이 내려 눈이 내려 생각이 끝났을 땐 눈보라 무겁게 치는 밤이었다. 인적이 드문, 모든 것이서로 소리치는 거리를 지나며 나는 단념한 여인처럼 눈보라처럼 웃고 있었다.
내 당신은 미워한다 하여도 그것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바람 부는 강변을 보여주면 나는 거기에서 얼마든지 쓰러지는 갈대의 자세를 보여주겠습니다.


2

내 꿈결처럼 사랑하던 꽃나무들이 얼어 쓰러졌을 때 나에게- P13
왔던
그 막막함 그 해방감을 나의 것으로 받으소서.
나에게는 지금 엎어진 컵
빈 물주전자
이런 것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는 닫혀진 창
며칠 내 끊임없이 흐린 날씨
이런 것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곤 세 명의 친구가 있어
하나는 엎어진 컵을 들고
하나는 빈 주전자를 들고
또 하나는 흐린 창밖에 서 있습니다.
이들을 만나소서
이들에게서 잠깐잠깐의 내 이야기를 
들으소서.
이들에게서 막막함이 무엇인가는 묻지 
마소서.
그것은 언제나 나에게 맡기소서.- P14
3

한 기억 안의 방황
그 사방이 막힌 죽음
눈에 남는 소금기
어젯밤에는 꿈 많은 잠이 왔었다.
내 결코 숨기지 않으리라
좀더 울울히 못 산 죄 있음을.

깃대에 달린 깃발의 소멸을
그 우울한 바라봄, 한 짧고 어두운 청춘을
언제나 거두소서
당신의 울울한 적막 속에.- P15
시월


1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
석양이 짙어가는 푸른 모래톱
지난날 가졌던 슬픈 여정들을, 아득한 기대를
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

2

지난 이야기를 해서 무엇하리.
두견이 우는 숲 새를 건너서
낮은 돌담에 흐르는 달빛 속에
울리던 목금(木琴) 소리 목금 소리 목금 소리.- P16
3

며칠 내 바람이 싸늘히 불고
오늘은 안개 속에 찬비가 뿌렸다.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 한 탓이리.

4

아늬,
석등(石燈) 곁에
밤 물소리

누이야 무엇 하나
달이 지는데
밀물 지는 고물에서
눈을 감듯이

바람은 사면에서 빈 가지를- P17
하나 남은 사랑처럼 흔들고 있다.

아늬,
석등 곁에
밤 물소리,

5

낡은 단청 밖으론 바람이 이는 가을날, 잔잔히 다가오는 저녁 어스름. 며칠 내 며칠 내 낙엽이 내리고 혹 싸늘히 비가 뿌려와서... 절 뒷울 안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낙엽 지는 느릅나무며 우물이며 초가집이며 그리고 방금 켜지기 시작한 등불들이 어스름 속에서 알 수 없는 어느 하나로 합쳐짐을 나는 본다.

6

창밖에 가득히 낙엽이 내리는 저녁
나는 끊임없이 불빛이 그리웠다.
- P18
바람은 조금도 불지를 않고 등불들은 다만 그 숱한 향수와같은 것에 싸여가고 주위는 자꾸 어두워갔다.
이제 나도 한 잎의 낙엽으로 좀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 P19
쨍한 사랑노래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조용히, 방금 스쳐간 구름보다도 조용히,
마음 비우고가 아니라
그냥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저물녘, 마음속 흐르던 강물들 서로 얽혀
온 길 갈 길 잃고 헤맬 때
어떤 강물은 가슴 답답해 둔치에 
기어올랐다가
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그 흘러내린 자리를
마음 사라진 자리로 삼고 싶다.
내림 줄 쳐진 시간 본 적이 있는가?- P154
삶을 살아낸다는 건


다 왔다.
하늘이 자잔히 잿빛으로 바뀌기 시작한
아파트 동과 동 사이로
마지막 잎들이 지고 있다, 허투루루.
바람이 지나가다 말고 투덜거린다.
엘리베이터 같이 쓰는 이웃이
걸음 멈추고 같이 투덜대다 말고
인사를 한다.
조그만 인사, 서로가 살갑다.

얇은 서리 가운 입던 꽃들 사라지고
땅에 꽂아논 철사 같은 장미 줄기들 사이로
낙엽은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밟히면 먼저 떨어진 것일수록 소리가 엷어진다.- P186
아직 햇빛이 닿아 있는 피라칸사 열매는 더 붉어지고
하나하나 눈인사하듯 똑똑해졌다.
더 똑똑해지면 사라지리라
사라지리라, 사라지리라 이 가을의 모든 것이,
시각을 떠나
청각에서 걸러지며.

두터운 잎을 두르고 있던 나무 몇이
가랑가랑 마른기침 소리로 나타나
속에 감추었던 가지와 둥치들을 내놓는다.
근육을 저리 바싹 말려버린 괜찮은 삶도 있었다니!
무엇에 맞았는지 깊이 파인 가슴도 하나 있다.
다 나았소이다, 그가 속삭인다.
이런! 삶을, 삶을 살아낸다는 건.....
나도 모르게 가슴에 손이 간다.-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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