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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섬‘의 동사형


동사 ‘서다‘의 명사형은 ‘섬‘ 이다
그러니까 섬은 서 있는 것이다
큰 나무가 그러하듯이
옳게 서 있는 것의 뿌리,
그 끝 모를 깊이
하물며 해저에 뿌리를 둔 섬이라니
그 아득함이여
그대를 향한 발기도 섰다 이르거늘
곡진하면 그것을 사랑이라 하지
그 깊이가 섬과 같지 않으면
어찌 사랑이라 하겠는가
태풍이 훑고 가도
해일이 넘쳐나도 섬은 꿈쩍도 않으니
섬을 생각하자면
내 모든 꼴림의 뿌리를 가늠해보지 않을 수 없어
그래, 명사 ‘섬‘의 동사형은
‘사랑하다‘가 아니겠는가- P39



파도가 섬의 옆구리를 자꾸 때려친 흔적이
절벽으로 남았는데
그것을 절경이라 말한다
거기에 풍란이 꽃을 피우고
괭이갈매기가 새끼를 기른다
사람마다의 옆구리께엔 절벽이 있다
파도가 할퀴고 간 상처의 흔적이 가파를수록
풍란 매운 향기가 난다
너와 내가 섬이다
아득한 거리에서 상처의 향기로 서로를 부르는,- P52
직립


취기가 덜 풀린 내 출근길
앞차, 트럭에 실려
황소 한 마리
굽이굽이 여원재 넘고 있다

차가 커브를 돌 때마다
아차, 균형을 놓치고 무릎을 꿇는가 싶더니
애써 일어서 버팅긴다
평소 풀밭에서 그러하듯이 차라리
네 무릎 꺾고 앉으면 편할 텐데
한사코 일어서 버팅긴다

때론 긴장을 놓아버리려 술을 마시고
마신 김에 균형마저 놓아버리려
함부로 무릎을 꺾던 내 중년에게
보라는 듯 일어서
살아있음의 위의威義를 묻는다- P56
저승이 가까워오면 사람이 그렇듯이
항문이 열려 된똥 한무더기 쏟고
그 큰 눈망울에 물기 훙그렁한 걸 보니
이 길 끝에 무릎을 놓는 그곳이
저승임을 아는 모양이다

다만 실려가긴 하지만
제한 몸은 제가 끌고 가겠다는 듯
더운 김 푹푹 뿜는 동안은 고깃덩이는 아니지 않느냐고
곧은 뿔 앞세우고
소는 버틴다- P57
명작


지리산 자락에
백로 한 마리 가로질러 날아간다

산이 푸르니
새 더욱 희다*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
저 필생의 한 획

누구의 그림인가, 시인가
내가 그만 낙관을 눌러버리고도 싶었으나

낙관이 없어서, 서명이 없어서
더욱 명작인,-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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