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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엄재국嚴在國

경북 문경에서 태어났으며
200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하였다.
□ 시인의 말


서른을 지나 마흔을 넘어
묘지의 숨을 쉬는

몸 속엔 아직 드러나지 않은 뼈가 있어

나는 지금 바람의 봉분 속에 누워
몇 삽 말의 흙으로 뼈들을 숨길 뿐.


-이천육년 정월
엄재국의 시는 깊고 어두운 저탄층의 언어이다. 시인은 일상의 동력을 얻기 위하여 ‘괴탄의 불꽃‘ 같은 시를 찾아 그것의 심층을 캐들어간다. 시 「교대 근무에서 처럼, 시인은 친구의 하관식이 단순한 죽음의 제의가 아닌 삶과 죽음이 순환하는 근무 교대임을 보여주기 위해, 꽃을 공중에 매장하여 다음 생의 불꽃을 저장하는 ‘분홍빛 석탄‘의 결정(結晶)을 얻어낸다. 이런 식물과 광물의 이미지가 혼용된 절묘한 시구야말로 시인이 현실의 막장에서 건져올린 치열한 긴장의 산물이다. 시인이 나서 자라고 지금도 살고 있는 그의 고향땅 문경, 한때 석탄으로 홍성하다 일시에 불어닥친 폐광의 바람으로 상처받고 떠난 사람들처럼, 시간의 폭력 앞에서 망가지고 부서지는 주변 풍경과 사물에 대한 연민으로 앞으로도 그는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시인에겐 꽃과 가시로 서로를 절반쯤 죽여주며 절정으로 치닫는 삶의 기쁨이 있으니, 해와 달이 어울리듯시인이 하고 싶은 말들이 저렇게 둥근 체위로, 이글이글!
송찬호(시인)
망각


바싹 마른풀밭이 비를 받아내고 있다

파랗게 질린 뽕잎이 누에를 받아내고 있다.

벼 베고 남은 그루터기가 잘려진 발목만으로 농부를 받아들이고 있다

오늘은 忌日, 10주년
어머니가 내 절을 받아들이고 있다.- P11
교대근무


진달래 지천으로 피는 북향의 산비탈
꽃잎이 공중에 매장되고 있다.

지하의 한 칸 계단을 내려서고 있는, 친구의 하관식

병반의 광부가 막장의 임무를 교대하고 있다

퇴적된 목숨들이 겹겹이 일어서는, 캄캄한 공중의 광맥들
우수수 쏟아지는 분홍빛 석탄들

누군가,
공중에 꽃을 매장하고 있다- P19
용접


깊은 밤 상가집 부엌마루 처마끝
백열등을 스치는 빗방울이 번쩍인다
용접봉의 불똥같다.

누가 저 지붕 위에서 용접을 하는가
구름과 구름과 어둠과 밝음과 하늘 자락과 처마끝 둥근선과,
침묵한 그의 말과
소주를 털어넣는 내 입술 사이로 불빛이 떨어진다

저 낙수의 불꽃 속에 내가 친구를 조문온 게 아니라
나를 다니러 온 친구를 내가 배웅하는 게 아닐까
그를 돌려보낸 내가 술을 마시는지
나를 보내고 그가 잔을 비우는지

절을 하고 나오는 처마는 여전히 불빛의 불똥이 떨어져,- P32
지붕위 하늘 자락에서 그가
단단하게 분리된 삶과 죽음을 붙이고 있다- P33
꽃들은 밤길 걸어


감꽃 지는 소리에 마당에 나섰더니
꽃진 자리처럼 떠오른 달이
산과 강과 들의 문을 열어
마당으로 한 발 스윽 들이미네

저 달은,
세상 길들을 실처럼 꿰고 있네
달이 나를 한 땀씩 떠 가네
달이 깁는 성긴 밤

꽃들은 밤길 걸어 어디로 가나

손에 손에 등불 켜고 아침 맞으러 가는
세상 꽃들이 다 옳다고 말한 건 참 잘한 일이네- P65
파블로 네루다가 그러하고, 미당 서정주가 그러하듯이 엄재국 시인은 시대를 뛰어넘어 땅 ㅡ자연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것을 또렷하게 언어로 새겨놓는다. 그들은 한결같이 "나무 한 그루가 상처를 입으면 자기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고 고통을 같이 하는 감수성‘(김종철)을 갖고 있고, 땅 ㅡ자연으로 나아가는 땅ㅡ자연의 아들이다. 땅ㅡ자연에 대한 새로운 통찰과 새로운 ‘지각의 지평선‘ 이 깃들어 있지 못하는 시를쓰는 시인은 위대한 시인이 될 수 없다. 위대한 시인이란땅 자연을 갱신하는 상상력과 사유 속에서 그것을 새롭게발견하고, 그 발견의 경이를 인류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소명을 실천하는 이를 가리킨다.-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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