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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나는 인도네시아에서 행해지는 벌목을 공부하면서 처음으로공급사슬을 알게 되었다. 인도네시아는 일본의 공급사슬 모델이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잘 볼 수 있는 장소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친 일본의 건설 호황기 동안 일본인들은 베니어판 시공틀을 만들기 위해 인도네시아산 목재를 수입했다. 그러나 정작 인도네시아의 나무를 벌목하는 일본인은 없었다. 일반적인 일본 무역회사는 일본에서 제시한 구체적인 지침대로 목재를 자르는 타국회사에 대출, 기술 지원, 무역 협약을 제공했다. 이러한 방식은 일본의 무역업자들에게 이로운 점이 많았다.- P212
첫째, 정치적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일본 사업가들은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이 겪는 정치적 어려움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부자일 뿐 아니라 인도네시아정부의 더욱 무자비한 정책에 기꺼이 협조하고자 했기 때문에 국민들의 반감을 사서,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폭동의 목표물이 되었던 것이다. 일본 무역업자들은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에게 선금을주는 방법으로 그러한 난관을 피할 수 있었다. 그들 대신에 중국계 인도네시아인들은 인도네시아 장군들과 흥정하며 위험을 감수했다. 둘째,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은 초국적 이동을 활성화할 수있었다. 일본인 무역업자들은 이미 필리핀과 말레이시아령 보르네오 산림의 상당 부분을 파괴한 후 인도네시아에 도착했다. 그들은새로운 나라에 적응하기보다는 각 지역에서 그들과 일할 의향이있는 대리인들을 그저 데려오는 정도의 역량밖에 없었다. 사실 일본 무역업자들에게서 자금을 조달받는 필리핀과 말레이시아 벌목꾼들은 인도네시아의 나무를 벨 수 있었고, 그럴 준비가 되어 있- P212
었다. 셋째, 공급사슬 배열 장치를 이용하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하면서 일본의 무역 기준을 적용할 수 있었다. 목표물을찾아다니는 환경주의자들은 여러 별 볼 일 없는 회사들만 찾아낼수 있었는데, 그중 다수가 인도네시아 회사였고 일본 회사는 그숲에 없었다. 넷째, 공급사슬 배열 장치들은 불법 벌목을 여러 하청 중 하나로 수용했는데, 이는 환경 규제에 의해 보호되는 나무를 벌목하는 것이었다. 불법 벌목꾼은 목재를 더 큰 계약 회사에팔았고, 그 계약 회사는 다시 일본에 팔았다. 어느 누구도 책임질필요가 없다. 그리고 심지어 인도네시아가 일본의 무역을 모델로한 공급사슬의 위계 구조를 구축해 국내 베니어판 사업을 시작한 후에도 나무는 너무 쌌다! 벌목꾼, 나무, 또는 산림 지역 거주민의 목숨이나 생계를 고려하지 않고도 목재 생산 비용을 산정할수 있었다.- P213
동남아시아에서의 벌목은 일본 무역 회사들 덕택에 가능해졌다. 그들은 다른 상품과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로 바빴다.‘ 어떻게 이러한 제도가 발전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 위의 공급사슬 방식이 등장한 제2차 세계대전 직후로 돌아가보자. 일본에서 출발한 첫 번째 전후 공급사슬의 일부는 일본의 과거 식민지인한국과의 연결을 활용했다. 그 당시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나라였고, 모든 국가가 자국의 제품을 수출하고 싶어 하는 최고의- P213
목적지였다. 그러한 미국은 일본산 수입 상품에 엄격한 할당량 제도를 적용했다. 역사학자 로버트 캐스틀리 Robert Castley는 일본이 미국의 수입 할당량 제한을 피하기 위해 어떻게 한국의 경제 건설을도왔는지 설명한다." 일본의 무역업자들은 경공업을 한국으로 이전함으로써 미국에 좀 더 많은 상품을 자유롭게 수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은 일본의 직접 투자에 반감을 드러냈다. 그래서일본은 캐스틀리가 ‘내놓기 putting-out‘ 방식이라고 부른 것을 도입했다. "그 방식은 상인(또는 기업)이 하청업체가 상품을 생산하거나마무리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대출, 신용, 기계류 또는 장비를 조달하고, 그렇게 생산된 상품을 상인(또는 기업)이 멀리 떨어진 시장에 판매하는 방식을 지칭한다. 캐스틀리는 이 전략에서 무역업자와 은행가가 갖는 권력에 대해 언급한다. "일본인 상인, 기업은해외 공급자와 장기 계약을 체결하고 자원 개발에 자주 자금을대출해주었다." 그는 이러한 확장 방식을 통해 일본은 경제적 안정뿐 아니라 정치적 안정을 추구했다고 주장한다.- P214
내놓기 시스템은 수익성이 더 적은 제조업과 낡은 산업 기술을 한국으로 이전하면서 일본의 비즈니스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나중에 일본인 지지자들에 의해 ‘하늘을 나는 기러기‘의 이미지로 우아하게 포장된 이 모델‘에 따르면, 한국의 비즈니스는 혁신에 관한 한 항상 일본의 한 단계 밑에 위치할 것이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한국인이 자신들의 구식 제조업 분야를 동남아시아의 더 가난한 국가들로 이전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하여 한국이 일본이 이룬 혁신을 두 번째로 상속받을 수 있기 때문에, 두 나라 모두 전진하며 날아갈 것이었다. 한국의 엘리트 계층은 일본 자본(그중 일부는 전후 배상금으로 한국에 전달되었다)의혜택을 받는 것에 기뻐했다. 그 결과로 얻은 사업 네트워크는 일본이 통제하는 아시아개발은행Asian Development Bank, ADB이 담당하는사업을 포함해, 일본에서 자본의 초국적 확장을 위한 모델을 형성했다.- P215
1980년대 ‘주주들의 혁명을 일으킨 사회운동가들은 미국이 유지한 힘이 쇠퇴한 것이라고 자신들이 해석한 것에 반응했다. 그들은 힘을 회복하기 위해 기업을 전문 경영인의 손에 맡기지 않고 기업의 주인인 주주들이 되찾겠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그들은 기업을 사서 자산을 뺀 후 되팔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이르자 그들의 작전은 성공했다. 그리하여 ‘기업 담보 차입 매수의 급진적인 성향이 ‘기업 인수 합병‘의 주요 투자 전략이 되었다. 기업이 가장 이윤이 남는 분야만 제외하고 나머지를 모두 팔아버렸기에 그 기업에 한때 속했던 대부분의 사업은 멀리 떨어진 공급자들과의 계약을 통해 이루어졌다. 공급사슬과 구제 축적의 특정한 형식에 몰두하는 방식이 미국에서 자본주의의 우세한 유형으로서 인기를 얻었다. 이 전략은 투자자에게 매우 유리했기 때문에, 20세기가 끝날 무렵 미국의 비즈니스 리더들은 이 전략으로 전환하게 된 계기가 비즈니스 세계에서 우위를 점유하기 위한 몸부림의 일부였다는 것을 잊어버렸고, 진화 과정을 통해 도달한 첨단기술인 것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그들은 전 세계를 이러한 과정으로 밀어 넣기에 바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미국식 전략을일본에 강요하는 데 진척을 보였다.- P217
1985년이 되자 미국의 비즈니스 리더들은 이 상황으로 인해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은 ‘플라자합의 Plaza Accord‘라는 국제 협약을 고안해냈다. 달러화의 가치는 낮춰졌고 엔화의 가치는 올라갔다. 1988년이 되자 엔화의 가치는 달러화보다 거의 두 배 가깝게 높아졌다. 일본 소비자는 송이버섯을 포함해 거의 모든 외국 제품을 살 수 있었다. 민족적 자부심이 높아졌다. 이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일본 제품의 가격이 너무 높아졌기 때문에 일본 회사가 상품을 수출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일본 회사들은 더 많은 생산 공정을 해외로 옮기면서 그러한상황에 대응했다. 한국, 대만, 동남아시아에 있는 그들의 공급자들또한 통화 가치의 변화에 타격을 받았고 똑같이 반응했다. 공급사슬은 모든 곳을 돌아다녔다. 두 명의 미국인 사회학자는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P219
아시아 사업체들은 입력 계수 factor inputs의 달러 가치가 갑작스럽게 상승한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에, 그리고 생산한 제품의 가격을 낮게 유지해 미국 소매업자와의 계약을 유지하고자 했기에 재중국 본빨리 다각화하기 시작했다. 대만 경공업의 대부분은... 중국 본토로 ... 그리고 동남아시아로 ... 이주했다. 일본의 수출 지향...적인 산업의 대부분이 동남아시아로 이주했다. 게다가 토요타, 혼다, 소니와 같은 기업들은 미국에 사업체를 설립했다. 한국의사업체 또한 노동집약적 공정을 라틴아메리카와 중앙 유럽의 개발도상국뿐 아니라 동남아시아로 옮겼다. 새로운 사업체가 설립된 각 지역에서 낮은 가격의 공급자 네트워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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