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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붉은 사하라가 ‘몸을 헐어‘ 사막이 된 것이라면, 붉은 사하라 시편들은 ‘마음을 헐어‘ 이룩한 시의 모래소용돌이 속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코끼리 같은 허기‘가 기다리는 사막에서 결혼을 앞둔 딸에게 낙타 젖을 먹이는 어미처럼 대지모신大地母神에 접신된 시인은 ‘이 세상 강물이 달지 않느냐‘고 노래하며 달디단 시의 ‘검은젖‘을 꺼내 목마른 세상에 물리려 한다. 인간의 원형적 세계로 눈길을 돌리면서 이전보다 훨씬 더 확장된 의식을 보여주는 김수우의 시편들은 고독과 적막, 슬픔의 유전인자를 감춘 채 무어인 전사의 ‘붉은 팔뚝‘을 그리워하면서 야성과 신성이 살아 소용돌이치는 시의 진경을 펼쳐 보인다. 그 진경의 내부엔
‘핏빛 산맥‘과 황야를 건너는 발바닥이 있고, 사하라처럼 뜨거운 시의 심장에서 솟구친 ‘장엄한 영혼의 춤‘이 있다. 고진하(시인)
김수우 시인의 행로는 오랫동안 사하라 사막에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그래서그의 시 속에서 붉은 모래가 날리고 입 속에 그 모래들이 서걱서걱 씹힌다.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걷는 시인의 시는 우리들에게 푸른 바다가 변한 ‘붉은 사하라‘를 선물하고, 우리는 그 사막을 베개처럼 베고 누워 다시 숨쉬는 바다를 꿈꾼다. 더 이상 사막으로 가는 길을 묻지 마라. 이미 그곳 ‘서쪽 정거장‘에 우리를 다시 사막으로 데리고 갈낙타가 기다리고 있으니.
정일근(시인)
부항뜬 봄


저고리 속에 얼마나 많은 물고기를 키운 것일까 불빛에드러난 무수한 등비늘, 피멍자국 겹겹 너울진 어머니의 칠순 등짝에 또 부항을 뜬다 그날 이후 양푼마다 빨랫감마다 물고기가 파닥이고 칫솔통에도 동백화분에도 어머니의 비늘이 묻어났다

밀물진 햇살 따라 몰래 솟구치는 중이었을까 아침 대문간에서 물끄러미 하늘 바라던 어머니, 흰 머리칼은 수만갈래 파닥임으로 파도쳤다 그때 실러캔스° 한 마리 반짝, 지느러미를 치며 바람을 타고 오른다 싱싱하게 물오르는아지랑이 나이테

봄, 케토톱을 붙인 바다가 낳은, 일흔 번째
새봄이었다

°실러캔스: 고생대부터 현재까지 생존하는 물고기
저력


태풍이 지나간 숲
풀벌레 울음 가득, 차오른다
숙일대로 숙였던 풀잎들이
낮을대로 낮게 웅크렸던 베짱이며 철써기들이
다시금 나무를, 나무의 어둠을 일으키는 소리.
한번 더 숲을, 숲의 뒷벽을 세우는 소리
고요하다
투명하다
앙금 진한 울음이 별을 띄운다
폭풍에 떠밀린 수천 톤 유조선 위로 별이 맵다
흔들어보아야 알게 되는
낮은,
힘.
꽃이 지네



몰래 스며드는 귀엣말
그래, 그래,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깜박인다, 쌀푸대에, 눈빛을 쓸어담는다, 나사를 푼다, 살아간다, 알전구 하나, 켠다, 하늘과 지붕의 경계境界를, 빗질한다. 목구멍으로, 죽음이 침넘어간다, 열리는 무덤, 경계經界를 지운다, 푸대를 푼다, 물소리 걸어간다, 무늬도마뱀 태어난다, 맨손이다,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있을 수 있는 일이 된다, 단추를 푼다, 반점이 많은 시간의 살결, 알전구 흔들린다, 또 살아간다, 또 나사를 푼다, 밥주걱에 붙은 북두칠성, 깜박인다

그림자가 흔들린다
그래, 그래,
바람이 꽃을 지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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