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길 위에서

들어가는 길


잊혀진 우물에 두레박을 내리는 숭고한 영혼들의
용감한 몰락을
흉내 낼 수 있다면
시와 삶에 빚지는 일, 더 뻔뻔해져도 될까.- P9
최선(最善)


아침 영롱한 거미줄, 창틀과 깨진 화분을 잇고 있다

무한 서사를 퉁기는 외줄 우주, 명랑하다

내가 만든 커다란 먼지들이 거미줄 타고 논다 나를 본다

풀렁플렁 구르는 투명한 몽당발들

한순간, 문득, 툭,

끊어질 평생을 알아 최선으로 빛난다 칡덩굴이 아니라

절대 찰나에 끊길, 끊어져야 하는 영원을 보았기에

최선으로 빛나는, 빛나야 하는, 미치는, 미쳐야 하는

최후, 찬란한 지도 한 장- P13
굴절의 전통


입석으로 타서 간이의자를 하나 잡았다 다행이다

매화가 번진다 그리운 이가 먼데 있다고 한다 다행이다

지난 겨울 철탑으로 올라간 사람들은 어찌 되었을까

다행과 다행 사이 다행스럽지 못한 것들이 꽃대처럼 칼금처럼 불면처럼 직립한다

밥그릇 안에서 굴절되는 영혼처럼 눈물은 봄비로 굴절되었다

성냥갑 만한 메아리도 없이 봄비는 다시 철탑으로 굴절된다

내가 가려는 바다는 통로 천정에서 거물거물 떨고 있다- P14
팬티까지 벗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다가 양말 벗을 때의 수치를 정직이라 부르는

네 칼날도 꽃으로 굴절될 것인가 분노란 그따위 궁리이다

오늘도 손해를 본 토마토 수레는 굴절되지 않는다 다행이다 아니다

젖을 빨던 질문들은 철탑으로 굴절되었다 다행이다 아니다

햇빛을 탕진하는 흐린 동백, 아슬아슬하다

신호등 앞에 늙은 외투처럼 서 있는 하늘, 뒤뚱거린다

간이의자를 접는다- P15
빗방울경전


비가 온다 잘 지냈나 익숙한 주문(呪文)처럼 내리는 비, 나도 그들을 잘 안다

과일장수 아버지는 비가 오면 다섯 살 딸을 사과박스에 뉘고 비닐을 덮어 짐자전거에 실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던 시절부터 빗방울을 사랑했다 홀로 걷는 법 함께 내려앉는 법 정직한 슬픔을 토닥토닥 배웠다

한때 빛을 키우던 지느러미들, 한때 날개를 고르던 새들

비가 오면 포장마차에 앉는다 빗방울 당도하는 소리 속에서 천천히 빗방울이 된다 단추도 되고 단춧구멍도 되던 빗방울 유리창도 되고 바다도 되던 빗방울들 남비에서 끓는다 홀로 푸는 법 함께 풀리는 법 정직한 슬픔이 보글보글 떠오른다

저주를 푼다는 것, 그것은 서로를 알아보는 일이다- P16
오래, 아무리 모질게 잊혀져 있더라도 금세 알아본다

막다른 골목 유행가도 삐걱대는 관절도 천박한 자유도 불완전한 마술도 새우깡 흘린 노숙의 자리도 싸구려 강박증도 빗방울이 된다 자박자박 낮은 발길이 된다

어떤 저주든 아름답게 풀어낼 수밖에 없는
몇 생애 내 어머니이기도 했던
홀로 걸어와 함께 내리는, 저, 이방인들
슬쩍 지나도 그림자조차 없어도 그들을 잘 안다 냄새와 그 유영이 익숙하다

사랑했기 때문이다- P17
몰락을 읽다


구름이던 큰 나무에 구름이던 작은 새들이 앉아 있다

이 책 저 책을 뒤적인다 아무 할 일이 없다 씹었다가 밸고 뱉었다 씹는 하느님

담벼락에 걸터앉은 젊은 햇빛이 말을 건다
난 여섯 살 소꿉동무였어 얼굴 잊은, 탱자 울타리에서 불러대던 옥희라는 이름이 간질간질 돋아난다

나무는 무수한 몰락으로 자란다 고대 신화가 몰락의 힘으로 살아가듯

풀꽃과 어깨동무하고 한참 절룩이는데 뒤통수 닮은 진실들이 옆에서 걷고 있다

뚜벅뚜벅 걸어온 나무그늘이 어깨를 걷는다어깨에 작은 새들이 논다 나도 어깨가
있음을 비로소 안다- P18
몇 번 몰락에 발가벗은 것들은 기원(起源)을 향해 자란다

큰 나무는 자라서 작은 나무가 되고 작은 나무는 자라서 구름이 되고 구름은 자라서 새가 되는 마을

질긴 하느님, 씹었다가 뱉고 뱉었다 씹는 페이지, 유리창이 맑다

한참 가난해지고 나서야, 맑은 옥희 까르륵 웃고 있다- P19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