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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어항속 물을

물로 씻어내듯이

슬픔을 슬픔으로

문질러 닦는다

슬픔은 생활의 아버지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고개 조아려

지혜를 경청한다
내 일상의 종교


나이가 들면서 무서운 적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핸드폰에 기록된 여자들
전화번호를 지워버린 일이다
술이 과하면 전화하는 못된 버릇 때문에 얼마나 나는 나를
함부로 드러냈던가 하루에 두 시간 한강변 걷는 것을 생활의 지표로
삼은 것도 건강 때문만은 아니다 한 시대 내 인생의 나침반이었던
위대한 스승께서 사소하고 하찮은 외로움 때문에
자신이 아프게 걸어온 생을 스스로 부정한 것을 목도한이후
나는 걷는 일에 더욱 열중하였다 외로움은 만인의 병 한가로우면
타락을 꿈꾸는 정신 발광하는 짐승을 몸 안에 가둬
순치시키기 위해 나는 오늘도 한강에 나가 걷는 일에 몰두한다
내 일상의 종교는 걷는 일이다
돌멩이와 구두


석 달 전 길을 걷다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거슬려 귀기울여보니 영락없이 구두 밑창에서 나는 소리라 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보았다 언제 뚫렸는지 엄지손톱만 한 구멍이보이고 그 속에 작은 돌멩이가 들어앉아 있는 게 아닌가 어디서 굴러든 것일까 나는 돌멩이를 꺼내 길에 놓아주었다그 후로도 여럿 돌멩이들은 예의 구멍에 들어와 달그락거리는 소리로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다가 이내 꺼내지고는 하였다 과연 이들의 동숙은 서로가 서로를 원해 이루어진 것일까 하나의 간절한 염원이 이룬 것일까 아무려나 내 알 바 아니지만 우리네 설운 삶을 다녀가는 무수한 인연들이 혹여 저 돌멩이들과 구두가 맺은 지극히 사소한 우연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먼지처럼 피어올랐다 오늘도 내 생은 하루만큼 저물어간다
혁명


무릇 혁명을 꿈꾸는 자

꽃나무를 닮아야겠다

가지가 꺾이고 줄기가 베여도

뿌리 남아 있는 한 악착같이 잎 틔우고

꽃 피워 마침내 열매 맺어야겠다

저마다의 외로움을 나이테로 새기면서

지평을 푸르게 물들이다가

꽃들을 다 내려놓고 쓰러져야겠다

이웃한 나무들의 거름으로,
봄의 직공들


파업 끝낸 나무와 풀들
녹색 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줄기와 가지 속 발동기 돌려 수액 퍼 올리랴
잎 틔우랴 초록 지피랴 꽃불 피우랴
여념이 없는 그들의 노동으로 푸르게 살찌는 산야
이상하게도 그들은 일할수록
얼굴빛 환해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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