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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사람들이 여행을 좋아할 수 있는 이유는 눈으로 본 것의 기억이 몸으로 느낀 것의 기억보다 훨씬 오래가기 때문인 것 같다.
여행 그 자체는 근사한 것들에 둘러싸인 고생스러움의 연속일뿐이다. 낙원행 기차를 타기 위해 폭염 속에서 질주하기도 하고, 점점 무거워지는 배낭을 메고 알프스의 절경 속을 지나기도하고, 복통에 시달리면서 옛터의 장엄함에 압도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그런 고생스러움이 아니라 눈으로 본 근사한 것들이다. 여자들이 출산의 고통을 기억할 수 있으면 대체 누가 둘째를 낳겠느냐고 엄마는 언젠가 세 번째 자식의 셋째인 나에게 말했다. 내가 태어난 것은 망각 덕분이고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것은 시각적 기억의 우위 덕분이라는 뜻이다. 켄마어에 도착해서 자고 일어나니 무릎 한쪽과 근육 한 곳과 발 두 쪽이 말도 못하게 망가져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얼마나 망가져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걷다가 그 정- P229
도까지 망가져본 적은 처음이었다. 켄마어와 킬라니 사이의 산맥들을 하나하나 넘는, 사흘 전부터 기대했던 멋진 도보여행은결국 버스여행으로 바뀌었다. 거친 바위를 타고 쏟아지는 작은폭포들은 구불구불한 강물이 되어 휙휙 지나갔고, 강가의 오크나무들은 강물처럼 구불구불한 가지를 하늘로 뻗어 올리고 있었고, 진달래가 무더기로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버스는 구불구불하고 오르내림이 많은 복잡한 산길을 달렸고, 시야는 기습적으로 계속 바뀌었다. 아일랜드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했던 길들지 않은 자연의 복잡다단함이 풍경의 윤곽 자체에 깃들어 있었는데, 나에게는 그 복잡다단함을 풀어낼 기회가 없었다.-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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