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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어린아이에게는 모든 감각이 글자 그대로 비할 데 없는 감각, 곧 전에 느껴보지못한 감각이고, 어린아이가 느낀 그 첫 감각들이 마음의 원재료, 곧 마음의 바탕 이미지가 된다. 지구의 풍경이 태고의 화산활동과 판구조 이동을 통해 만들어졌듯 사람의 마음은 태어나서 첫 15년 동안 느낀 감각들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 후의 인생은 이미 만들어진 풍경에서 길을 찾고 지도를 그리고 흔적을 더듬고 묻혀 있는 것을 파내는 여생이 아닐까, 나중에 다시 볼 때는 처음 보았던 때와 비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자주 해보게 된다.- P170
내 유년기의 집이 그렇게 추웠다는 것, 7번가 너머가 내 유년기의 따뜻한 에덴동산이었다는 것은 지금도 내게는 경악과 경이를 불러일으킨다. 대개의 사람들에게 유년기는 그런 경이와 경악의 혼합물이다. 벌거벗은 아이는 유년기라는 주어진 세계를 살아나가는 동시에 그 세계로부터 자기만의 작은 세계를 만들어나간다. 운이 좋은 아이는 좀 더 따뜻한 세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 나는 운이 좋은 아이였다. 외부의 세계는 감각의 범위를 넘을 수 없지만, 내면의 세계는 어마어마하게 넓다. 생각해낸 것들, 기억해낸 것들이 펼쳐져 있는 밝은 곳도 있고, 아직 기억해내지 않은 것들이 감추어져 있는 어두운 곳도 있다. 내가 어릴 때 살았던 7번가, 내가 어릴 때 읽었던 책들은 내가만들어나가는 세계의 첫 재료이자 주어진 세계를 벗어나야 하- P170
는 나의 첫 피난처였다. 7번가는 내가 꿈속에서 자주 찾아가는길이기도 하다. 7번가에 서 있으면 어디로든 떠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느 길에 서 있어도 7번가에 서 있는 것 같다.- P171
7번가 한 구간의 가로수 역할을 하는 키 큰 소나무들도 이 사유지의 일부였던 것 같은데, 그곳 소나무의 낮은 가지들이 나에게는 집의 일부였다. 내가 그곳에서 수풀을 모아서 만든 집은 트리하우스보다는 흙바닥의 새 둥지에 가까웠다. 그때 나는 항상 그곳 언덕에서 작은집을 마련하고 있었던 것 같다. 보물을 숨길 수 있는 속 빈나무둥치를 찾아내기도 하고 낮에 들어가 있을 수 있는 바위틈이나 올라가 있을 수 있는 나무를 찾아내기도 했다. 그때 내가 마련했던 가장 좋은 집은 7번가 포장도로가 끝나는 곳 부근에서발견한 거대한 옛날식 장미나무였다. 수십 년간 버려진 채 마구 자란 덤불은 전체 넓이가 큰 거실만 했다. 덤불 중심의 나무줄기까지 낮은 터널이 있었고, 나무줄기 속은 동굴처럼 텅 비어있었다. - P174
한밤중에 언덕으로 달려가서 가파른 비탈의 아직 식지않은 풀에 드러눕는 날들도 있었다. 바닥에 누워 있는 느낌이라기보다는 무중력 공간에 떠 있는 느낌이었고, 별들을 올려다보고 있는 느낌이라기보다는 깊은 우물 같은 무한한 하늘을 내려다보고 있는 느낌, 당장이라도 그 우물 속에 빠져버릴 것 같은느낌이었다. 무한합이 주는 희열과 공포를 처음 경험한 순간이었다.
유년기가 처음 느껴본 감각들, 처음 당해본 고통들로이루어진 세계라면, 우리에게 유년기는 잃어버린 세계일 수밖에 없다. 유년기가 집이라면, 우리는 집을 잃은 난민일 수밖에없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집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 P174
이기도 하다. 우리 안에 한번 뿌리내린 집은 영원히 우리를 놔주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가 몸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있는 물체라는 식의 생각은 내면이라는 어마어마하게 넓은 집을 은폐하는 픽션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집은 최초의 판단 기준이다. 다른모든 대상의 가치는 집을 기준으로 가늠된다. 우리가 간 곳이더운 곳인가 추운 곳인가, 붐비는 곳인가 조용한 곳인가, 윤택한 곳인가 각박한 곳인가는 우리가 어디서 왔느냐에 좌우된다. 내 마음이 이런 모양으로 만들어지던 때를 돌이켜보면, 나를 나로 만들어준 것, 교외 끝자락의 콩가루 가정보다 더 내 집처럼느껴진 것, 가끔 막연하게 들려오는 가족사와 종족사보다 더나라는 존재의 바탕으로 느껴진 것은 그때 나를 둘러싸고 있던풍경이었던 것 같다. 캘리포니아의 풍경이 나를 만들어주었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도 사실이다. 나는 이곳의 작물을먹었고, 이곳의 물을 마셨다. 캘리포니아 와인을 벌컥벌컥 마신것은 세 살 때부터였다.- P175
내가 엄마에게 물려받은 것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는 언어능력에서부터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에 이르기까지 온갖 차원의 대답이 나올 수 있다.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은 엄마가 아일랜드공화국의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유산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엄마는 현금인출기가 없던 시절에 비상금을 리엄 오플래허티(LiamO‘Flaherty)의 『기근(Famine)』 (오래된 녹색 표지의 소설책이었다.)에보관하는 사람이었고, 막내 자식의 이름을 지을 때 유대인 시부모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의 오빠와 아빠의- P175
이름을 따서 데이비드‘라고 짓는 사람이었다. (열혈 국민주의자였던 엄마의 할아버지가 아일랜드 국민주의자 겸 시인 토머스 데이비스(Thomas Davis)처럼 되라고 지은 이름이었다. 친척들이 전하는 이야기에따르면, 엄마의 할아버지는 지명수배자가 되어 가명으로 아일랜드를 탈출한신(新)페인당원이었다.) 내가 물려받은 것들 중에 찻잔 몇 개, 성파트리치오 축일의 소소한 습관들, 모종의 감상주의는 아일랜드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고, 실수에 대해서, 정의에 대해서, 성교에 대해서, 내 몸에 대한 권리에 대해서 불안해했던 면은 가톨릭의 유산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물려받았다고할 수 없는 다른 많은 것이 있다. 내가 가진 가장 중요한 것들은물려받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라기보다 내가 어떤 비주류 문화를 물려받았는지, 그리고 그 문화가 주류 문화와 어떻게 다른지모르겠다는 뜻이다. - P176
엄마와 외삼촌은 가톨릭 학교를 나오고 세례성사를 받고 교리문답을 통과하고 견진성사를 받은 당당한아일랜드계 미국인이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은 아일랜드라는 나라에 관심과 애정과 요구 사항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 나라를 여러 차례 다녀온 사람들, 각자 그 나라에 가서 먼 친척을수소문하기도 하고 선조의 고향을 둘러보기도 하는 사람들, 하지만 선조의 이름을 우리 자식들에게 알려주지는 않는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에게 아일랜드는 고향이었지만, 우리에게 아일랜드는 그저 다른 나라였다.- P176
기억하고 망각하는 방식도 유행을 탄다. 20세기 들어 한동안은 반짝이는 백색 도시 같은 유토피아적 미래를 앞당기기 위해 과거를 내팽개치는 멜팅포트 방식의 문화 동화주의가 유행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그런 식으로 냅다 밀어붙이는 경향에 반발하면서 뿌리, 핏줄, 종족, 차이, 기억, 땅속처럼 어두운과거 등을 강조하는 방식이 유행하고 있다. 하지만 희망을 강조하는 논의나 역사를 강조하는 논의 둘 다 복잡하게 얽힌 현재를 위한 장소를 고려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아니,
장소 자체를 고려하지 않았던 것 같다. 역사를 강조하면서 종족을 고려하는 논의라고 해도, 새로운 토양에 심어진 하이브리드 또는 돌연변이를 고려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나를 키운것은 나의 실제 부모라기보다 캘리포니아 교외의 새로운 토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담론이었던 생태지역주의(bioregionalism, 현장의 역사, 현장의 자연을 배움으로써 현장의 일- P178
부가 되는 철학)는 유행 담론의 끝없는 부침 속에서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가 새로 유행하면서 어느새 버려진 듯하다. 요컨대 종족과 지형의 화합물로서의 정체성을 제안하는 화학 같은것은 나온 적이 없고, 뿌리와 뿌리 없음 사이의 균형잡기 담론같은 것도 나온 적이 없다. 7번가는 내가 아직 꿈에서 보는 곳,
내가 꿈에 자주 가는 곳들 중에 진짜 존재하는 두어 곳 중 한곳이다. 내가 찾아간 아일랜드는 그 7번가를 닮은 곳이기도 했고 나의 첫 길이었던 그 7번가로부터 이어지는 길이기도 했다.- P179
아직은 아일랜드라는 곳이 있고 페루라는 곳이 있고 캘리포니아라는 곳이 있고 영국이라는 곳이 있지만, 이제는이 네 곳에서 그저 스페인어와 영어라는 두 언어가 통용되고 있다. 감자와 블루스, 그리고 혼혈이 이 네 곳의 내용물을 완전히뒤섞어놓았다. 리듬과 감자의 로큰롤이 온 세상을 하나로 연결하는 이때, 종족을 말하면서 장소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종족과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을 말하고 있다는 뜻, 아니면 자기 집(home)이 어디인지, 자기 땅(native)이 어디까지인지 그렇게 어렵지 않게 말할 수 있었던, 세상이 더 단순 명확했던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뜻이다.- P206
두 발이 길에서 걷고 있다. 나의 두 발이 가파른 길에서 북쪽으로 걷고 있다. 발 위에는 다리가 있겠고 한참 더 위에는 머리가 있겠고 머릿속에는 여러 역사가 있겠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길에서 보이는 풍경은 나머지 풍경을 가리는 덤불과 가파른 경사면뿐이다. 지금 세상에는 나 하나, 그리고 길 하나뿐이다. 돌아야 할 모퉁이와 넘어야 할 언덕이 자꾸 나타나는 좁은길, 멀리까지 내다볼 수 없는 길이 지금은 나의 길이고, 이런 감각들과 이런 생각들의 덩어리가 지금의 나다. 지금 내가 볼 수있는 것은 시야의 가장자리에서 움직이고 있는 손과 발, 그리고눈앞의 길 하나뿐이다. 나머지는 전부 신앙의 영역이다. 나라는한 사람이 이렇게 걷고 있을 뿐이다. 이 사람에게도 이름이 있고 과거가 있고 나름의 생활이 있습니다. 조상들도 있습니다. 그 조상들 중에서 절반은 아일랜드라는 나라에서 왔습니다. 그나라가 지금 이 사람이 걷고 있는 길의 동쪽과 북쪽에 한참 더- P209
펼쳐져 있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신앙고백이다. 믿을 때도 있지만 잊을 때도 있다. 아일랜드라는 이름은 알지만 여기가거기가 맞는지 확실히 알지는 못한다. 나의 것이라고 칭해지는세계가 어딘가 있지만, 그 세계가 없어졌다 한들 여기서 이렇게혼자 걷고 있는 나는 그 세계가 없어진 사실을 알 수 없을 테니,
지금 나의 것이라고 칭해질 수 있는 것들은 지금 내 배낭 속, 아니면 내 호주머니 속에 있는 것들이 전부다. 나는 지금 여행 중이니, 짐은 버릴수록 좋다. 내 나라니 내 세계니 하는 정주와 기억의 말들마저 버린 여행자는 눈앞의 풍경을 그저 좌우로 양분하는 길을 갈 뿐이다. 길은 어떤 장소가 아니라 다른 장소로 떠나는 방법이자 장소와 장소를 이어주는 긴 끈이다.- P210
걸음은 몸 전체를 깨어나게 한다. 쉴 때 깨어 있는 곳은 피부뿐이니, 쉴 때 할 수 있는 일은 감각뿐이다. 몸을 움직일 때 비로소 몸속을 감각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라면 몸속 또한 여행을 통해 탐험할 수 있는 곳들 중 하나다. (보이는 피부 밑에보이지 않는 뼈와 근육과 장기가 있다는 말은 몸이 쉬고 있을 때는 그저신앙고백일 뿐이다.) 하지만 여행은 나라는 존재를 내 피부까지로좁히는 면도 있다. 여행하는 나에게는 내 피부 바깥의 모든 것이 내가 알 수 없는 낯선 대상, 낯선 타인들의 세계로 느껴진다는 뜻이다. 나라는 존재가 나의 세계, 나의 것이라고 칭해질 수있는 세계로 넓어져 있었다는 것을 나는 여러 번의 여행을 통해서 비로소 배울 수 있었다. 나라는 존재는 독립적이고 자족적이고 내면적인 존재라는 논의가 많지만, 나라는 존재가 살아갈- P210
수 있으려면 나의 세계, 나라는 존재를 받아주고 길러주고 거들어주는 세계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여행을 떠나기 전의 나는 나의 세계라는 동심원들 안에 머물러 있었다. 가장 안쪽 원이던 나의 집은 나라는 한 마리 짐승에게 마치 달팽이의 껍질처럼 아늑하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그다음 원이던 나의 친구들은 나의 여러 가능성을 끌어내주었다. 친구들과의 대화 중에 비로소 해보게 된 생각들, 해보게 된 말들이 있었다. 다음 원은 내가 사는 동네였다. 어렸을 때 살았었고 커서도 계속 꿈에 나오는 7번가로부터 불과 50킬로미터 거리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는마치 두 번째 피부인 듯 친숙하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정주의 세계, 전(前) 코페르니쿠스 세계라고 할 수 있는 이런 동심원의 가장 바깥쪽에서는 가계와 종족의 원이 더없이 희미한 파문을 그리고 있었다.- P211
나의 세계, 나의 것이라고 칭해지는 세계는 많은 경우내가 내 손으로 정성들여 세우는 세계이니만큼, 나의 세계가 끊임없이 불러내는 나라는 존재는 내가 하는 말, 내가 하는 일, 내가 보는 풍경, 내가 먹는 음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나의 세계, 그렇게 세워놓았던 세계를 토대만 남기고 없애는 것이 여행이다. 여행 중에는 나의 세계를 세울 필요가 없다. 여행 중에 마주치는 낯선 세계가 나의 낯선 가능성들을 불러내기도 한다. 외부의 세계는 내 피부가 감각하는 범위를 넘을 수 없는 데 비해서 내면의 세계는 내가 기억하고 상상하는 모든 일을 포함하는 넓디넓은 곳이라는 말은 내가 앞부분에서 한 번 했던 말이- P211
다. 하지만 외부의 세계가 감각의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다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나의 몸은 그저 나의 토대일 뿐이니, 나의내면이라는 보이지 않는 가지가 나의 세계로 뻗을 때 나는 나의몸보다 훨씬 큰 존재가 된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그 대상을나의 내면이라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머물게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나라는 존재의 일부가 되게한다는 것이다.
피부가 국경이라면, 피부라는 국경은 열린 국경이다. 밖이 안에 의해 감각되기도 하고 안의 일부가 밖으로 빠져나가기도 하고 밖이 안을 자극하기도 하고 안이 밖의 일부를 흡수하기도 한다. 하지만 피부가 글자 그대로 폐쇄된 국경인 면도 있다. 몸의 3분의 2를 구성하는 물은 몸 밖으로 흘러 나가 존재의 수원에 가닿고자 하니, 피부가 없다면 몸은 별개의 국가로 존재하는 대신 세계 만국의 일부가 되어 사라져버릴 것이다.- P212
혼자 여행할 때 나라는 존재는 몸 하나만 남은 존재, 피부라는 국경안에 갇힌 존재다. 여행의 좋은 점은 휴대할 수 있는 것들, 나의세계를 떠날 때 챙길 수 있는 것들, 낯선 세계에서도 통용되는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데 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수도 있겠구나, 존재가 세계로 뻗는 데 필요한 언어들, 장소들,
관습들, 행보들, 친구들을 새로 사귀면서 새로운 세계를 세울•수도 있겠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여행의 좋은 점이다. 몸 하나로 여행 중이라는 것은 현재와 단절되었다는뜻이고, 현재와 단절되었다는 것은 과거를 마음껏 회상할 수 있- P212
다는 뜻, 실현되지 않은 다른 결말들을 상상할 수 있다는 뜻이다. 현재에 실현되지 못한 시간들은 외부의 세계가 두 번 다시불러내지 않을 수도 있는 내면의 세계로 남는다. 현재의 세계는감옥 같은 세계든 궁전 같은 세계든 내가 벗어날 수 있는 세계일 것이다. 머릿속으로는 벗어날 수 없다 해도 몸으로는 벗어날수 있을 것이다. 이번의 여행은 내가 세운 현재를 벗어나 아직실현되지 못한 다른 시간들을 찾아가는 내 몸의 여행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떠난 여행이었다.-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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