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이 점을 포착하고 있다. 마리아 공주는 자기 집 앞으로 지나가는 무수한 러시아 순례자들에게 먹을 것을내주면서 모종의 열망을 느낀다. "그녀는 순례자들에게 이야기를 청해들을 때가 많았다. 그들의 소박한 말투, 그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하지만 그녀의 귀에는 깊은 의미로 가득한 것처럼 들리는 그 말투에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동했던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길을 나설 뻔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럴 때 이미 그녀는 누더기를 걸친 차림으로 보따리와 지팡이를 들고 흙먼지 자욱한 길을 걸어가는 자기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단 한 곳의 목적지를 향해 명료하고 검소하고 강렬하게 나아가는 고상한 은둔자의 삶을 상상한다. 순례자의 발걸음은 단순 명료함의 표현이자 목적의식의 표현이다. 낸시 프레이(NancyFrey)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까지의 긴 순례길에 대해 이렇게말한다. "순례자가 걷기 시작하는 순간 세계를 느끼는 방식 몇 가지가 한꺼번에 변하는데, 그 변화는 여정 내내 이어진다. 시간 감각이 바뀌고, 오감이 예민해지고, 자기 몸과 자기 몸을 둘러싼 자연경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긴다. [......] 그것을 한 독일 청년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했다. ‘걷는 경험 속에서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사유가 된다. 자신으로부터 도피하기란 불가능하다.‘
- P91
실비아 플래스(Sylvia Plath)가 그 이유를 일기에 적은 것도 열아홉살 때였다. "여자로 태어났다는 건 내 끔찍한 비극이다. 길에서 일하는사람들, 선원들과 병사들, 술집 단골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풍경의 일부가 되고 싶은데, 익명의 존재가 되고 싶은데, 경청하고 싶은데, 기록하고 싶은데, 다 망했다. 내가 어린 여자라서 수컷으로부터 습격당하거나 구타당할 가능성이 있는 암컷이라서. 남자들이 어떤 존재인지, 남자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한데, 그렇게 궁금해하면 유혹한다고 오해받는다. 모든 사람과 최대한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좋을까. 노천에서 자도 되면 얼마나 좋을까. 서부로 여행을 가도 되면 얼마나 좋을까. 밤에 마음껏 걸어 다녀도 되면 얼마나 좋을까." 플래스가 남자들을 궁금해한 이유는 남자들에 대해 알아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제 막 자기의 인생을 시작한 이 어린 여자는 자기보다 자유로운 남자들의 삶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산책, 즉 집 밖에서 재미 삼아거니는 일에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가 자유 시간, 둘째가 걸을 만한- P374
장소, 셋째가 질병이나 사회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육체다. 자유 시간에는 다양한 변수가 있지만, 대부분의 시간대에 대부분의 공공장소는여자들에게 그렇게 편하고 안전한 장소가 아니었다. 법률, 성별 관행, 추행과 강간의 위험 등은 여자들이 걷고 싶을 때 걷고 싶은 곳을 걷는 일에 제약을 가했다.(여자에게는 옷이 신체적 구속이 될 때가 많다. 굽이 높은 신발, 발을조이는 가냘픈 구두, 너무 넓거나 너무 좁은 스커트, 쉽게 찢어지는 옷감, 시야를 가리는 베일 등은 법이나 두려움 못지않게 여자에게 핸디캡을 안겨주는 사회 관행이다.)
여자들은 공공장소에 있는 동안 사적인 부분(private parts)을 침해당하는 일이 놀라울 정도로 자주 발생한다. 영어에도 여자의 걷기를성별화하는 표현이 많다. 창녀를 뜻하는 표현으로 길거리를 걷는 사람(streetwalker), 거리의 여자(woman of the streets), 도심의 여자(woman on thetown), 공공의 여자(public woman) 등이 있다. 이런 표현에서 여자(woman)를 남자(man)로 바꾸면 공인(public man), 유행에 밝은 사람(man abouttown), 건달 (man of the streets)이 된다. 성에 관한 관습을 깨뜨린 여자를 묘사하는 방황한다
(stroll, roam, wander, stray)는 표현은 여자의 여행에 성적인 면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또는 여자가 여행을 떠날 때 여자의 섹슈얼리티는 관습을 위반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P375
‘일요일의 떠돌이들(Sunday Tramps)‘은 레슬리 스티븐을 비롯한 남자 보도 여행자들의 모임이름인데, 만약 여자들이 자기네 모임을 이런 이름으로 불렀다면 그건일요일에 보도 여행을 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일요일에 뭔가 외설적인일을 한다는 뜻을 품었을 것이다. 실제로 여자의 보행은 많은 경우 이동이 아니라 공연으로 해석된다. 그런 해석대로라면 여자들은 보고 싶은것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보여주기 위해서 걷고, 자기의 경험이아니라 자기를 보는 남자의 경험을 위해서 걷는 셈이다. 곧 여자는 무슨- P375
종류의 관심이 됐든 관심받고 싶어 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예로부터 여자의 걸음걸이에 대한 글을 쓴 사람은 많이 있다. 얼마나 에로틱하게 걷는가라는 평가(예컨대 17세기 아가씨의 "페티코트 밑으로 작은 생쥐들처럼 / 슬쩍슬쩍 들락날락하는 두 발"에 대한 평가, 또는 메릴린 먼로의 씰룩거리는 걸음걸이(wiggle)에 대한 평가)에서부터 무엇이 올바른 걸음걸이인가라는 지침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우리가 어디에서 걷는가에 대한 글을 쓴 사람은 많지않다.
이동을 제약당하는 사람들이 여자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인종, 계급, 종교, 민족, 성적지향으로 인한 제약에는 지역 특수성이 있었던 데 비해, 여자라는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 받는 제약은 세계 전역에서 거의1000년 동안 젠더 정체성의 근본적 조형 요소가 돼왔다. 생물학적, 심리학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가장 적절한 설명은 사회적·정치적 상황이 아닐까 싶다. - P376
혼자 걷는 것에도 막대한 영적, 문화적, 정치적 울림이있다. 지금껏 혼자 걷기는 명상과 기도와 종교적 성찰의 중요한 일부분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소요학파에서 시작해서 뉴욕과 파리를 배회하는 시인들에 이르기까지 혼자 걷기는 사유와 창작의 형식이었다. 또한 작가, 예술가, 정치적 이론가 등에게는 작품을 구상할 공간을 마련하는 방법이자,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을 만남과 경험을 확보하는 방법이었다. 이 뛰어난 남자들이 세상을 마음껏 걸어 다닐 수 없었다면 과연 그 뛰어난 것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을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집 안에만 있어야했다면 어땠을까. 뮤어가 풀스커트를 입어야 했다면 어땠을까. 여자들이 낮의 도시를 걸어 다닐 수 있게 된 뒤에도 밤의 도시,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애상적이고도 시적인 카니발은 ‘창녀(woman of the night)‘가 아닌 여자에게는 출입 금지 구역이나 마찬가지였다. 걷기가 기본적인 문화적 행위이자 인간의 중요한 존재 방식이라면, 발길 닿는 대로 걸어 다닐 가능성을 빼앗겨온 사람들은 단순히 운동이나 여가가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크게 박탈당해온 사람들이다.
제인 오스틴으로부터 실비아 플래스에 이르기까지 여자들은 남자들과 다른 주제, 비교적 협소한 주제를 다뤄왔다. 틀을 깨고 좀 더 넓- P392
은 세계로 나아간 여자들도 없지 않았다. 얼른 떠오르기로는 평화 순례자(중년의 나이로), 조르주 상드(남장 차림으로), 에마 골드먼, 조세핀 버틀러, 그웬 모펏 등등. 그러나 아예 침묵해야 했던 여자들이 훨씬 많았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버지니아 울프의 유명한 에세이 자기만의 방』은 제목 그대로 여자들이 작업 공간을 가져야 한다는 항변으로 기억되지만, 사실이 에세이는 창작하는 사람에게 작업 공간 못지않게 필요한 경제, 교육, 공적 공간에의 진입 가능성을 논의하고 있다.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위해 울프는 셰익스피어에게 똑같이 재주 있는 누이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한다. 주디스 셰익스피어라는 이 여자의 망가진 인생 앞에서 울프는 묻는다. "그녀가 술집에서 정찬을 시켜 먹거나 밤거리를 걸어 다닐수 있었을까요?"- P393
세라 술먼(Sarah Schulman)의 소녀들, 전망들, 온갖 것들(Girls, Visionsand Fonerything)이라는 소설은 울프의 에세이와 마찬가지로 여자들의 자유에 가해지는 제약을 논의하고 있다.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의 한 대목에서 제목을 따왔다. 케루악의 강령이 소설 속의 젊은 레즈비언 작가 라일라 푸투란스키에게 얼마나 유용한지를 검토하겠다는 의미다. 푸투란스키는 생각한다. "문제는 잭 케루악과 나를 동일시하게 된다는 것, 그가 길을 가는 중에 같이 잔 여자들과 나를 동일시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케루악은 오디세우스처럼 한 자리에 머무는 여자들이라는 풍경 속을 여행하는 남자였다. 케루악이 1950년대에 미국의 매력을 탐험했듯, 푸투란스키는 1980년대 중반의 맨해튼 로어이스트사이드의 매력을 탐험한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길거리를 몇 시간씩 정처 없이 걸어 다니다가 어딘가에 가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소설이 진행되면서 그녀의 세계는 더 바깥으로 열리는 대신 더 내밀해진다.- P393
옛날에 말 두 필이 끄는 마차에 올라타는 것은 밖으로 나가되 걷지 않기 위해서였지만, 지금 말 두 필의 힘, 곧 2마력으로 움직이는 기계에 올라서는 것은 걷되 밖으로 나가지 않기 위해서다. 어딘가에서는 지상의 풍경과 생태를 바꿔놓고 있는 발전 설비, 배전 설비 등의 전기 인프라 전체(전선과 계량기와 노동자로 구성되는 네트워크, 발전소를 돌아가게 하는 탄광과 유전의 네트워크, 수력발전 댐의 네트워크)가 눈에 띄지 않게 가정과 연결되어 있고, 어딘가에는 러닝머신을 만드는 공장이 있다. (그리고 오늘날 미국에서 공장노동은 소수집단의 경험이 되었다.) 그러니 러닝머신을 사용한다는 것은 밖에서 걷는 것에 비해 훨씬 많은 경제적·생태적 상호작용을 필요로 하는 일인데, 러닝머신이 만들어내는 경험적 관계는 훨씬 적다. 러닝머신 사용자는 책을 읽는 등의 방법으로 시간을 보낸다. - P424
<프리벤션(Prevention)>이라는 잡지는 러닝머신 사용 시에 텔레비전을 시청할 것을 추천하기도 하고, 봄이 왔을 때 러닝머신의 루틴을 실외 걷기로 대체하는 법을 알려주기도 한다.(밖에서 걸어 다니는 것이 아니라 러닝머신을 이용하는 것을 경험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뉴욕 타임스>는 한창 유행하고 있는 실내자전거 강좌에 이어서 러닝머신 장거리 사용자의 고독을 달래주기 위한 러닝머신 강좌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뉴스를 전한다. 러닝머신의지루함은 공장노동과의 공통점이다. 쳇바퀴가 수감자 교화에 도움이 된다고 본 것도 바로 이 지루한 반복 때문이었다. 프레코사(社)의 광택 나는 상품 안내 책자가 심혈관 러닝머신의 장점을 알려주었다. 이 러닝머신에는 "거리별, 시간별, 경사별로 "다섯 가지 코스가 프로그래밍되어 있고, "그중 ‘인터랙티브 체중 감량 코스‘는 운동량을 조절함으로써 사용•자의 심박수가 최적의 체중 감량 존을 벗어나지 않게 유지"하며, "사용자설정 코스는 사용자가 자기에게 맞는 프로그램을 최대 13킬로미터까지- P424
최소 150미터 간격으로 간단하게 설정, 저장할 수 있다. 나에게는 사용자 설정 코스가 가장 놀랍다. 사용자는 마치 도보 여행길에 오른 듯 다양한 지형의 행로를 설정할 수 있고, 그 다양한 지형을 구현하는 것은 180센티미터 길이의 발판에서 회전하는 고무벨트라는 놀라운 이야기. 일찍이 기차가 공간 경험을 잠식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동 거리의 측정 기준은 공간에서 시간으로 변경되기 시작했다.(요즘 로스앤젤레스 사람은 할리우드에서 베벌리힐스까지 몇 킬로미터 거리라고 하는 대신 20분 거리라고 한다.) 러닝머신은 여행의 의미를 이동 시간, 체력 소모, 기계적 동작으로 측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이 변경의 과정을 완성했다. 분위기로서의공간, 지형으로서의 공간, 볼거리로서의 공간, 경험으로서의 공간은 사라졌다.- P425
언어는 말이든 글이든 시간 속에 펼쳐지기에 한눈에 인지될 수 없다는 점에서 길과 비슷하다. 언어와 길은 이렇듯 시간적 전개라는 점에서 닮은 데가 있는데, 미술과 보행은 전혀 닮은 데가 없다. 그런데 1960년대에 모든 것이 변하면서, 시각예술이라는 넓은 우산 밑에서 불가능한 것이 없어졌다. 일종의 혁명이었다. 모든 혁명에는 부모가 있다. 추상표현주의 화가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이 시각예술 혁명의 대부(代父) 중 하나라는 것이 그의 자식 중 하나인 앨런 캐프로(Allan Kaprow)의 주장이다.- P427
배회와 도박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기대하고 있을 때가 결과가 나왔을 때보다 즐거울 가능성이 높다. 둘 다 소망은 확실하지만 성취는 불확실하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일이나 손에 쥔 카드를 테이블에 펼쳐놓는 일은 둘 다 운을 시험하는 일이다. 그러나 카지노의 입장에서 도박은 꽤 예측 가능한 과학이 되었다. 이제 카지노와 라스베이거스법집행 세력은 스트립을 걸어 내려갈 때 개입하는 운까지 통제하고자 한다. 스트립은 진짜 대로다. 비바람에 노출되어 있고 주위 환경에 개방되어 있는 공공장소이자, 미국 수정헌법 제1조가 보장하는 명예로운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장소다. 그 자유를 빼앗으려는 상당한 노력이 진행 중이다. 이대로 간다면 스트립은 유원지나 쇼핑몰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런 공간에서 우리는 소비자는 될 수 있지만 시민은 될 수 없다. - P452
사람들에게는 장소를 향한 갈증, 도시와 정원과 정글을 향한 갈증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 야외를 배회하면서 건물과 구경거리들과 상품들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고 낯선 사람들과 마주치고 싶은 마음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라스베이거스는 알려준다. 라스베이거스 전체를 놓고 보면 지구상에 이곳만큼 보행자에게 적대적인곳도 없다는 사실은 앞으로 어떤 문제들이 생길지를 시사하지만, 라스베이거스의 명소가 보행자들의 오아시스라는 사실은 보행을 살려낼 수 있는 공간들을 회복할 가능성을 시사해주기도 한다. 공간이 사유화됨으로써 보행과 발언과 시위의 자유가 불법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은 미국이 도시공간을 놓고 통행권 전투(반세기 전 영국 배회자들이 시골길을 놓고벌였던 통행권 전투 못지않게 심각한 전투)를 치러야 하리라는 것을 알려준다. 실제 장소들의 이미테이션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확산돼 있다는 사실도 오싹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이미테이션은 시민적 자유의 온전한 행사를 가로막는 동시에 시인이나 문화비평가나 사회 개혁가나 거리 사진가를 자극할 수 있는 장면들, 만남들, 체험들의 온전한 스펙트럼을 가로막으니 말이다.- P4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