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거나 세계를 향해 문호는 개방되었고, 넓은 공간을 향유할 수 있었음에도 사람의 시각이 좁아져가는 이율배반, 그것은 물질에 치우친 데서 오는 의식의 축소일 것입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공간은 무한대입니다. 확실한것보다 불확실한 것 역시 무한대입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고 확신할 수 없다 하여 그것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보이는 것, 확실한 것에다 말뚝을 박아놓은 물질주의, 과학 만능은 새로운 구속일 수도, 억압일 수도 있습니다. 즉 선택이 한정되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는, 흔히 쓰이는 말인데 오늘날 이 말같이 설득력이 강한 것은 달리 없을 성싶습니다. 막히게 되면 언제나 꺼내는 전가의 보도 같은 것이며 근본적으로 봉쇄해버리는 위협적인 말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오늘의 현실은 어떤 현실일까요. 방향 전환이 불가능하며- P82
방법이 없다는 것인지, 최상의 상태로서 다른 대안이 필요 없다는 것인지. 물론 물질문명이 우리 인류에게 가져다준 것은 막대한 것이었습니다. 격세지감이란 오늘을 두고 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비록 한시적인 것이기는 해도 풍요로움을 우리에게 안겨주었고 다양한 생활방식을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지구가 망가지고 자원이 고갈될 것이라는 전망, 이러한 가시적인 피해에 대해서 일일이 매거할 수는 없고 보이지 않는 부분, 정신 영역에 속하는 부분의 황폐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비생산적이며 별반 가치가 없는 분야, 그러나 명심할 일은 존재의 원리가 균형이라는 점입니다. 육체와 정신은 분리된 것이 아니며 그것은 하나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만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그릇이 있어야 물이 형태를 잡듯, 생명이 지닌 능동적인 것에 의해 피동적인 물질은 변화하는 것입니다. 어찌해서 보이지 않는다 하여 우주의 공간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엄연히 그것이 물질은 아니지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 P83
사는 것 이상의 진실은 이 세상에 없다. 그러면 생명들은 왜 살고 싶은 것일까. 그것은 본능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 본능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 신을 모르듯이, 신을 본 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살고 싶고 살아야겠다는 의지는 자기 자신의 실존을 의식하고 사물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며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능동성이다. 그리고 생명만이 보유한 능력이다. 그것은 고귀하고 값진 것이며, 어떠한 보물로도 대신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물은 생물을 먹지 않고는 생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근원적인 비극이며 갈등이며 원죄적인 것이다. 우리는 자연의 순환으로 자위하기도 하고 체념하기도 하며 풀뿌리 하나, 들꽃 하나, 풀벌레 하나, 그 모두가 생명인 이상 애잔하다. 살기가 힘들고 외로우며 씨앗을 위해 헌신하는, 이 대자대비의 세계, 인간만이 동족을 살육한다는 것은 천지 만물 중에서 억조창생 중에서 가장 저열한 종자가 아닐 수 없다.- P109
멋은 자연스러운 것, 자연스러운 것은 생명 그 자체며 정신이나 행동거지에서도 자연스러울 때 멋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어떤 물체나 조형예술도 자연스러울 때 멋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멋은 균형이며, 균형은 존재하게 하는 것이며, 예술가가 작품 제작에 임해 균형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생명을 추구하는 것이다.- P116
진정 우리는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이러한 세상을 꿈꾸며 출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명은 융성하나 사람들은 야만으로 퇴화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는 패션쇼의 전성기요. 개성의 시대라고도 하고 미스코리아가 관심의 대상이다. 또 멋이라는 말도 그런 것에만 집중적으로 쓰여지고 있다. 사실 그런 부분에 멋이라는 말이 쓰여지는데 이의가 있을 수 없고 그런 부분이 여분으로 있는 것 역시 이상할 것은 없다.- P117
우리 민족의 문화는 멋으로 집약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직선은 생경하다. 그러나 곡선은 유연하다. 그리고 흐름이다. 우리의 산천이 그러하고 우리의 구조물, 의복 할 것 없이 일체의 생활용품에도 곡선을 선호한 흔적이 역력하다.
심지어 버선의 코까지, 외씨 같은 버선발이라는 그야말로 간드러진 표현도 바로 그 곡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명은 율동감이다. 흔들리며 배어 나오는 영혼의 율동이기도 한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은 존중돼야 한다. 살아 있다는것은 추상적인 것이며 결코 물질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P118
그러나 자기집 앞을 청소하듯 그것으로 그쳐서는 안 되고 인간을 위해서는 그까짓 미물쯤이야, 그런 생각에 못지않게, 인간을 위해 그런 미물도 보존해야 한다는 이기적 발상으로서는 환경운동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총체에 대한 인식과 생명의 평등을 인정하지 않는 한 운동은 실패할 것입니다. 자연과 환경은 다 같이 생사유하는 생명체가 삶의 실체를 인식하는 곳입니다. 어떠한 미물, 풀한 포기라도 생명은 능동적인 것이며 삶은 능동적인 것의 표현입니다. 해서 보다 나은 삶을 열망하게 되고 안락과 행복을 희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양분이있는 흙으로 풀뿌리는 뻗어가고 따뜻하고 풍성한 먹이를 찾아 철새는 수만 리 장천을 날아갑니다. 인간만이 잘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새가 노래하고 나비는 꽃과 노닌다고 합니다. 그러나 새는 슬피 울기도 할것이며 나비는 노니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하여 꿀을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 P123
자본주의는 생산하고 소비하고 이윤을 챙기는, 말하자면 생명을 망각한 수치가 있을 뿐입니다. 문화는 창조하고 발견하고 끊임없이 생명을 불어넣으며 존재를 보존하고 삶의 질을 높여나가는 것입니다. 물질이란 쓰면 쓸수록 줄어들게 마련이며 종국에 가서는 없어지게 됩니다. 지금 지구는 바로 줄어드는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질탕하게 소비를 부추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은 기르고 가꾸고 터전을 침해하지 않는 한 결코 줄어들거나 소멸하지 않습니다. 밀 한 알, 풀 한 포기는 생명들의 양식이지만 금괴· 화폐는 결코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양식과 교환한다는 반발이 있을수 있고, 현재 그 교환 수단으로서 세계가 돌아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밀한 알, 풀 한 포기 없는 세상을 생각해보십시오. 화폐로서, 금괴로서 교환해올 양식이 없다면 재화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밀 한 알, 풀한 포기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 P135
문화는 반드시 생명을 위한 것입니다. 생명을 위해 창조하고 발견하고 균형을 잡아나가는 것입니다. 생명은 생명 아닌 것을 먹고 살 수 없습니다. 식물도 퇴비를 먹고 살찌워나가는데 퇴비는 생명이 썩은 것입니다. 플라스틱이나 시멘트를 먹고 사는 생명은 없습니다. 그것이 순환이고 생태계의 질서인 것입니다.
이 순환을 억제하고 방해하는 것이 물질 만능의 자본주의인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먹지 못하고 생존과 관계없는 것, 때로는 생존을 위협하는 것을 축적합니다.
그리하여 무기를 팔아먹기 위한 전쟁이 있게 되고 전쟁은 지구를 초토화해왔습니다. 창조를 위배하고 생존에 역행하는 것이지요.
농부는 생명을 가꾸는 사람입니다. 옛 농부는 내 자식 목에 젖 넘어가는 소리와 내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가 제일 듣기 좋다는 말을 했습니다. 사랑이지요.
상업주의가 만연한 오늘날 농촌에 그와 같은 사랑이 과연 남아 있을까요? 모든생명들은 지금 사랑이 아닌 학대를 받고 있습니다. 자연과 격리되어 닭장에, 우사에, 아파트에 감금되어 살고 있습니다. 인스턴트식품, 화학비료를 먹고 농약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 P137
물론 모든 생물은 선택함으로써 삶을 지속하고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원론적 선택에는 억압이 내포되어 있다. 가시 밖은 무한이며 불확실이 충만해 있는데 그것을 다 생략하는 물질문명의 상자 속에는 자연이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자유 개성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사물은 모순 위에 존재하며 바로 그것이 균형이라는 점이다. 물과 불은 다 같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어느 한편이 성하면동티가 난다. 불이 강하면 초토화될 것이요, 물이 넘치면 땅은 매몰되고 말 것이다.
물질 숭배의 이 시대는 지구가 파괴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당연한 귀결이다. 사방에서 지금 위험신호를 보내오고 있으나 지구는 태풍 전야같이 조용하고 사람들은 일상을 되풀이하고 있다. 왜 그럴까. - P161
욕망에 잠 못 이루는 저 악머구리 떼가 울어대듯 시끄러운 소리는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잊게 한다. 국민을 볼모로 치부와 권력에 환장한 무리, 염치는 떼어다가 어느 나무에 걸어놨는지 지지해달라, 내 말만 믿으라,
나에게 동정을 보내다오, 그 몰골을 차마 바라볼 수가 없다. 옛날이 좋았다는 얘기가 아니며 돌아가자는 것도 물론 아니다. 시간은 돌아오는 것이 아니며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확실하게 돌아오는 것은 결과뿐이다.
사람이 바라볼 수 있는 시야의 넓이는 과연 얼마나 되는 걸까. 사람이 인식하는 확실함은 또 얼마나 될까. 우주 공간에서 본다면 한 알 모래만큼일까. 가시적인 것과 물증으로는 총체적인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가시 밖의 무궁한 공간과불확실한 것에 우리는 둘러싸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만 열린 마음으로 총체적인 것을 느끼지만 그것도 어렴풋하게 파악될 뿐. 그러나 그것은 본질에 접근하려는 열망이며 절묘한 균형의 추구다. 절묘한 균형이야말로 창조하고 우리를 존속하게 하는 힘이며 삶의 비밀 그 자체인 것이다. 오늘과 같이 모든 것을 분업화하고 전문화하여 또 그것으로 발전해온 것도 사실이지만 차츰 총체적인 것을 망각하게 한 발전은 균형의 파괴를 초래했고 해체 현상으로 나타났으며, 생명의- P173
터전인 생태계는 물론 인성도 균형을 잃어버렸다. 욕망만 돌출하여 사회 전반에걸쳐 온갖 해괴한 일이 자행되고 지식은 재탕을 되풀이, 창의성을 죽여버린 미래의 일꾼들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원주의 새벽하늘은 아름답다.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 더러는 샛별이 깜빡거린다. 무진장으로 널려 있는 별들과 모든 생물, 보이지 않는 미물에 이르기까지 그 삶의 운행이 한결같음에 가슴이 떨린다. 소름 끼치게 엄숙한 균형을 우리는 깨면서 스스로 자멸하려 하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인류는 만난을 헤치고 살아남는다는 것을 믿고 싶다. 핵무기, 오존층 파괴, 대기 오염, 물의 고갈, 잘못 잡혀진 방향을 다잡아 궤도 수정할 것을 믿고 싶다. 결자해지라 했던가. 시끄러운 악머구리 떼 울음은 사양의 만가쯤으로 생각하고 보편적 삶을 위한 총체적 인식 아래. 역시 그것은 과학의 몫일 것이다.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 P174
한밤중.
촛불을 켜놓고 장대같이 내리꽂히는 빗소리를 듣는다.
방 안을 훤하게 비춰주는 섬광에 이어 뇌성은 천하를 흔들고 거위가 소리를지르곤 한다.
이 무슨 재앙일까. 두렵기도 하지만 인간이 한낱 미물 같아서 슬프다.
화면에서 본 이재민들의 무표정한 모습은 통곡보다 참혹했다.- P216
여기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것이 인간에게 부여된 능력이다.
필요불가결한 것이 줄어들고 그렇지 못한 것이 늘어난다는 증거로 땅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 지구가 망가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생존의 욕망이 생존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욕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주가 존재하고 지구를 존재하게 하는 창조적 균형을 넘어서는것은 이 세상 아무 곳에도 없다.
우리가 그것을 본으로 하여 새로운 균형, 질서를 찾지 못한다면 황금과 지폐가 난무하는 속에서 서서히 죽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P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