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절실하게 말한다면 지구와 모든 생명은 공동체이며 같은 운명이다. 살기 위하여 지구를 파괴한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며 죽기 위하여 지구를 파괴한다고 해야만 옳다. 누구나 다 알다시피 죽은 별에는 공기가 없고 물이 없으며 생물도 없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물이, 공기가 생물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고, 억조창생 일체가 그 생존의 조건이 같으며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기능도 같아서 일사불란하게 순환해왔던 것이다. 그랬던 것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본래부터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로 자부해오긴 했지만 여하튼 20세기 초반, 인류는 조물주의 창조 능력과 자연을 통제하는 권한을 물려받기라도 한 것처럼 굴면서 지구의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불행한 일은 아니었다. 불행은 능력을 옳게 쓰지 못하고 권한을 올바르게 행사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P12
천년, 오백 년을 살아온 거목에 대한 신앙은 말할 것도 없이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이며 거목 앞에서 기도하는 것도 생명이 갖는 동질감, 그 존귀함을 믿으며 생명의 일체를 지녔다고 생각하는 영성과의 교신을 간절히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또 생명의 무한유전無限流轉을 믿음으로써 죽은 자들이 있을 다른 공간과의교신을 열망했을 것이며 그것은 알지 못할 미래에 대한 물음, 생명의 슬픔이기도 했을 것이다. 대자대비大慈大悲, 큰 슬픔이 있기에 큰 자애가 필요하고 결핍이 없는 곳에 사랑이 있을 수 없다. 슬픔, 결핍 없는 것은 완성이며 정지된 것이며그것은 또한 삶이 아니며 생명으로 인식할 수도 없다. 생명은 영원한 미완이요,
때문에 사랑의 대상이며 끝없는 연민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같은 우리 민족의 생명에 대한 공경은 그 자체가 세계주의다. 인류뿐만 아니라 모든생명, 살아 있는 일체에 대한 평등, 그와 같은 사상은 우리 민족 문화 전반에 걸쳐 그 흔적이 뚜렷하다.- P14
모순은 균형이며 긴장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데서 가능했으며 존재의 조건인 동시에 연속성과 삶에 대한 인식이기도 하다. 만일 모순이 없어진다면 논리는 완성될 것이며 언어도 피안에 도달하겠고 절대적인 것이 그 모습을드러낼지 모르지만 완성은 끝이며 정지이며 소멸인 것이다.
우리 인간은 오늘까지 인간의 질서를 위해 광분해왔다. 논리도 그것을 위해봉사해왔으며 인간이 만든 연장과도 같은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소중한- P25
능력이다. 그러나 연장이 삶을 위한 도구일 수 있지만 파괴하고 죽음에 이르게하는 것일 수 있고 쾌적한 삶의 지속을 위하여 논리가 만든 틀이 반대로 인간성말살의 폐단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어떠한 사물에도 양면이 있고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하나를 절대시하고 선택의 자유를 말하기도 하지만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벌써 강요의 조짐으로 볼수 있다. 왜냐하면 총체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해야 하기때문이다. 선택의 자유는 서양의 자유 개념으로 적극적이고 전투적이며 모순을용납하지 않는 선명함인데, 그것은 문명의 승리였으나 문화의 패배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동과 서의 구별 없이 이미 보편화한 것이지만 본래 동양에서는 하나라는 확실한 것, 절대적인 것, 선택의 자유라는 인식이 매우 희박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다.- P26
편안한 노년이라는 말에는 나도 무관심할 수는 없다. 나 자신이 노년이기 때문이다. 편안한 노년, 그것도 일부 소수만이 누리는 것이지만, 적당히 운동하고 뭔가 한 가지쯤 취미를 가지며 가끔은 가까운 사람들끼리 외식을 하고 차림새에도 신경을 쓰며 국내 혹은 해외여행도 해보고, 대강 이 정도가 편안한 노년의 모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삶일까. 그럴 수밖에 없는 노약자의 피동적 처지라는 것은 물론 안다. 잉여 시간에서 오는 멀미 같은 것, 중심에서 벗어난 객관적 인생, 시각적인 것만 남겨져 있는 듯. 어쩔 수 없는 비애다. 그러나 한 개인의 삶에는 모델이 없다. 불행이든 행복이든 자기 존재에 대한 깊은 인식이야말로 진정한 삶이 아닐까.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밖으로, 밖으로 나가는 사람도 있겠고 내 경우는 집 안보다 집 밖이 외로웠다. 황량함도 집밖에 있었다. 안과 밖이라는 개념도 실은 명료한 것이 못 되며 편의상의 안팎을- P56
넘어서 각기 자신들의 공간이라 하는 편이 합당할 것 같다. 자기 세계라 해도 무방하고 추상적 공간일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개체의 냉혹함과 치열함을 본다. 타자와의 관계는 그야말로 관계일 뿐 일체가 될 수 없다. 다만 일체라는 것을 관념적으로 시인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러나 문학은 일체가 될 수도 있고 그림자가 될 수도 있다. 삶이 구체적인현실이요. 문학은 추상적 상상일지라도. 언제였던지 영화에서 보았는데 흰빛의짧은 내리닫이를 입은 화가 고흐가 창밖에서 조롱하는 아이들을 향해 팔짝팔짝뛰던 장면은 지금도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그는 명예를 갈망했을까? 돈을 갈망했을까? 생존(자유)을 위해 얼마쯤은 필요했을 것이다. 묘하지만 그런 생각을해본 적이 있다.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다시 떠오르는 것은 그림은 그에게 무엇이었을까 하는 물음이다. 해방과 자유와 생존, 새를 볼 때 특히 그 세가지 말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을 느낀다. 새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에게 다 해당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며 모든 생명들의 원형질로서 예술가는 그것에 대한 그리움을 전제로 하며 본질을 탐구하고 표현하는 사람, 하여 자유에의 갈망은 그리고 싶은 갈망과 같고 존재의 본질에 대한 갈망과도 같은 것이다. 내리닫이의 그- P57
우스꽝스런 모습은 무구한 자의 슬픔이었고 남의 귀를 자를 수 없어 내 귀를잘라버린 순전한 그를 사람들은 광인이라 했다. 자살하기 전까지 그림을 그렸던그는 정말 광인이었을까?
<토지>가 끝났을 때 나는 성취감 같은 것을 느끼지 못했다. 지친 때문이라 생각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이제 토지는 영영 떠나버렸구나, 일종의 상실감이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개나리 울타리에 둘러싸인 곳, 생명의 소리들이 충만해 있고 흙도 숨을 쉬며 억조창생, 생명들이 술렁이던 터전, 농약 없이 가꾼 뜰이며 밭이며, 또 그것들은 나를 먹여 살렸고 서로 참 자알 살았는데 개발 때문에 터전을 잃게 된 것이다. 동시에 나와 일체였던 두 개를 잃고보니 나 자신 공중분해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곳은 15년간 자유를 얻기 위한,
내 심정으로는 격전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불리한 처지에서, 자유는 항상 불리한 처지에 있는 것이지만, 혼자 있는 여자, 그것도 사양길에 들어선 여자, 그것부터가 초라하고 무력한 풍경이다. 특히 이 나라 풍토에서는 그 편견의 골이- P58
너무나 깊어서 간 데 없는 죄인이다. 감시를 당해야 하는 죄인. 사람들은 새로운 도약을 꿈꾸면서도 상식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며 상식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서는 증오심을 갖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대상이 여자일 때는 "여자가 글은 써서 뭘 해." 사회적 인식이 그러했던 시기에 출발했기 때문에 내가 과민했는지. 여하튼 여자가 혼자 산다는 것은 무방비의 성곽이요 심하게는 저주다.
일상의 불이익이나 상처받는 일을 거론하자면 끝이 없고 늘어놓는다면 천박한 신세타령이 될 것인즉 긴말은 않겠으나, 예를 들어서 일꾼에게 일을 시키면 농땡이를 부리고 시설물을 설치할 때, 집수리할 때는 바가지 씌우기 일쑤다. 한번은 장마에 연탄이 무너져서 200여 장이나 깨졌는데 연탄가게 종업원 왈 "어디다 버릴까요." 거저 가져가려고 능청을 부린 것이다. "당신 어느 나라 사람이오. 버리라고 광부들이 연탄 캐내는 거요?" 하고 응수했지만 인간적인 접근보다 세勢로써 좌우되는 현실은 정말 나를 눈물 나게 했다. "자식은 없어요? 왜 혼자 사는 거요." "참 안됐소, 근력은 좋으시우." 야박한 입들은 동정과 우월감과 얕잡아 보는 기색을 별로 감추지도 않았다. 언젠가는 양계장에서 계분을 구입한 적이 있었다. 손가락 몇 개가 잘려나간 음성환자인 중늙은 남자가 트럭에 계분을- P59
싣고 왔는데 이 많은 계분 어디다 쓰느냐. 과수원 하느냐고 물었다. 나무랑 밭에주려구요. 땅이 죽어가는데 유기농업을 해야지요. 하고 말했더니 시골 노친네가 제법 유식하다며 담배를 꼬나무는 것이었다. "예, 풍월은 좀 알지요." 생광스런 남자들, 사위도 있고 손자들도 있고 그들이야 불러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지만 주변에 아는 사람들이 없지도 않아 동원하려면 못 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설사 볼일이 없겠으나 내가 누구인가를 과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겸손하기 위하여, 수양을 쌓기 위하여 국으로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누구이로라 하기에는 쑥스럽고 치욕스러워 못 했지만 물론 생광스런 남성들을 동원하지도 않았다. 세상에 대가 없는 것은 없다. 불이익이나 자존심 상하는 것쯤, 자유를 위해 지불하는 데 값비싼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설물이 고장 나면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고 힘에 겨운 일도 나 자신이 감당하게 되어 농사, 노동에도 이골이 났으며 어김없이 그것에서도 나에게 대가가 돌아왔다. 달마대사 같은 성인은 소림사에서 9년 면벽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하지만 범인은 가만히 있으면 생각이 정지된다. 노동은 심신을 상쾌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끝없는 생각 속으로 나를 끌어들인다. ‘노동‘과 ‘글쓰기‘와 ‘나‘는 삼발이 같은 것이었다. 글을- P60
쓰다 막히면 밖에 나가 풀을 뽑고 그러다 보면 생각이 떠오르고 막혔던 것이 뚫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연의 이치, 사람 살아가는 이치를 조금씩 깨닫게 되었으며 불평등은 인간의 소위 자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 대붕(상상의 새)은 쥐벼룩이 너무 작아서 볼 수 없고 쥐벼룩은 대붕이 너무 커서 볼 수 없지만 삶의 궤적은 한치 오차 없이 동등하다는 것, 자연의 공평함과 오묘함, 실로 돈으로는 환산될 수 없는 내 세계, 나와 더부 살았던 많은 생명들의 세계, 이미 그것은 내 소유에서 떠나버렸다.- P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