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에도 순서가 있듯, 삶도 그럴 것이다. 완벽한 메이크업을 마치고 난 얼굴, 그것을 진짜 내 얼굴이라고 할 수 있을까. 화장으로 한 겹 가리고 나면 내 얼굴에 대하여 스스로 고개 돌리지 않을 수 있을까. 인생이 점점 무서운 속도로 달려드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 내모습을 멀뚱멀뚱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나는 손바닥으로 황망히 얼굴을 가렸다.
성장은, 긍정적 의미로 충만한 단어다. 고통을 통해 정신의 키가 한 뼘 자랐으며 보다 성숙한 인간에의 길에 한발 다가섰다고 믿고싶은 심정은 십분 이해한다. 그렇게라도 자신을 합리화시키면 마음이 좀 편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P42
후회하지는 않으련다. 혼자 금 밖에 남겨진 자의 절박함과 외로움으로 잠깐 이성을 잃었었다는 핑계는 대지 않겠다. 저지르는 일마다하나하나 의미를 붙이고 자책감에 부르르 몸을 떨고, 실수였다며깊이 반성하고, 자기발전의 주춧돌로 삼고, 그런 것들이 성숙한 인간의 태도라면, 미안하지만, 어른 따위는 영원히 되고 싶지 않다. 성년의 날을 통과했다고 해서 꼭 어른으로 살아야 하는 법은 없을것이다. 나는 차라리 미성년으로 남고 싶다. 책임과 의무, 그런 둔중한 무게의 단어들로부터 슬쩍 비껴나 있는 커다란 아이, 자발적 미성년.
깊은 바다를 유영하는 한 마리 물고기처럼 살면 안 되는 걸까. 이- P43
단단한 제도의 틈과 틈 사이를 자유롭게 흘러 다니면서? 그러다 다른 물고기나 산호초와 문득 눈이 마주치면, 생긋 한번 웃어주고는이내 제 길을 가는 거다.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고, 어디에도 미련두지 않고! 물론 그런 삶이 행복할지는 미지수다. 타인의 온기를 그리워하고 소통을 원하고 누군가와 안정적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내안의 질긴 열망은 또 어쩌고? 까딱 잘못했다간 이렇게도 저렇게도할 수 없는 모순과 자가당착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될지도 모른다.
아아, 하지만 예단은 금물!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자. 지금은 그냥 이대로 한번 가보는 거다. 미리 준비하고 예측한다고해서 삶이 어디 호락호락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굴러가주던가. 그리고 내가 원했던 방향이 어딘지도 모르는 채로, 나는 지금 여기 도착해 있지 않은가. 나는 단호하게 와인 색 립스틱을 집어 들어, 입술에 발랐다. 안 어울리면 어떠랴. 내일은 베이지핑크를, 모레는 단풍잎 같은 빨강을 바르면 된다. 아니면 까짓것. 깨끗이 지워버리면된다.- P44
어느 쪽의 내가 이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선택을 하건 기나긴 어제가 드디어끝났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아침 여덟 시. 출근 준비를 모두 마쳤다. 또다시 새날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별 다를 바 없는 하루. 그러나 어제와 다른 하루.
현관 앞에 서서 잠시 주저하다가 굽 없는 갈색 스웨이드 단화에 발을 꿰었다. 이 구두는 오늘 나를 어떤 곳으로 데려다줄까? 그 미지의 시간을 향하여 나는 용감한 척, 걸음을 내디뎠다.- P45
사무용 의자에도 계급이 있다. 그 자명한 진리를 미처 모르던 순진무구의 시절이 가끔은 사무치게 그립다.
우리 회사의 의자는 모두 네 개의 등급으로 나뉜다. 사장실 의자, 이사실 의자, 부장들의 의자, 그리고 과장급 이하 평사원들의 의자. 목 받침이 없으며 우레탄 재질의 팔걸이를 가진 중국산 사무용의자에 앉아 나는 종일을 보낸다. 가끔 외근이 있긴 하지만, 한 달에 사나흘 정도는 마감이라는 명목 아래, 아침 아홉 시부터 자정이 넘을 때까지 엉덩이를 뭉개고 있어야 한다. 전체적으로 따지면 대한민국 사무직 노동자의 평균 노동 시간에 비해 결코 적은 양은 아닐것이다.- P54
-은수야..... 실은 나 오늘 회사 관뒀어.
-헉. 왜?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유희는 누구나 이름을 대면 알만한 중견기업 전산실의 과장이었다. 인간과 동물을 포함한 지구상의 어떤 생물체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한다고 공언하고 다니는 만큼 그녀는 우리 셋 중에 모아놓은 돈도 제일 많고 승진도 제일 빠르며 연봉도 제일 높았다. 그 번듯한 회사를 그만두다니. 어디 더더욱 번듯한 데로 스카우트라도 된 게지.
-나, 뮤지컬배우가 될 거야.
-....................................
저 끝없는 말줄임표야말로 이 순간의 솔직한 심정이다. 뮤지컬 배우라. 멋지다. 멋져. 그렇지만 31세 미혼 여성의 장래희망으로는 좀 너무하지 않은가? 차라리 주부 가요 열창이나 알뜰 주부 선발 대회에서 우승하겠다는 꿈이 현실적일 것 같다. 물론 인정한다. 내 친구 남유희, 노래 잘한다. 댄스도 수준급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노래방이나 나이트클럽에서의 일이었다. ‘가무‘가 특기는 될망정 어떻게 직업이 되겠는가. 십 년 전이면 모를까, 두 달 뒤면 우리는 서른두살이었다.- P72
그녀는 벌써 뮤지컬배우 지망생을 위한 아카데미에 등록했으며 곧 재즈댄스와 연기 레슨도 받을 거라고 했다. 나이는 좀 많은 편이지만 타고난 감각이 있고 상대적으로 풍부한 인생 경험도 있으니 이만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지 않겠느냐며 벅찬 희망을 늘어놓았다. 모니터 가득 펼쳐지는 유희의 옹골찬 계획을 나는 멍한 눈길로 좇았다. 재인의 결혼 발표를 들었을 때와는 또 다른, 둔하고 벙벙한 충격이 숨골을 내리눌렀다. 재인과 유희는 미친 게 아니다. 재인은 재인대로, 유희는 유희대로 자기만의 길을 쉼 없이 찾아가고 있는 거다. 오직 나만 조그만 웅덩이의 썩은 물처럼 이 자리에 멈춰 있다는 자괴감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태오에게 ‘좋아요‘라는 답장을 보낸 건,
유희가 ‘인생에 대한 용기!!‘를 전염시켜주어서일까?- P73
쇼핑과 연애는 경이로울 만큼 흡사하다.
한 개인의 파워를 입증하는 장(場)일뿐더러, 그 안에서 자신과 비슷한 취향을 가진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정서적 안도감을 느낀다.
여유로운 시간과 젊음이 있을 때는 경제력이 받쳐주지 않고, 경제력이 생겼을 때는 여유로운 시간과 젊음을 돌이킬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재화의 양이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쇼핑도 연애도 인간을 고뇌하게 한다. 인간 오은수도 지금, 깊은 번뇌에 빠져 있다. 인터넷 즐겨찾기의 맨 위에 등록해놓고 자주 들어가보는 곳은, 자동차 미니쿠퍼의 웹 사이트다. 미니의 앙증맞은 자태를 담은 사진이 모니터 가득 일렁인다. 온몸의 신경세포가 팽팽히 조여든다. 차 옆에는, 열 가지 색깔별로 칸칸이 나누어진 다트판이 놓여 있다. 그중 검정색 칸에 마우스를 올리면, 마술처럼, 자동차가 블랙으로 변한다. 마우스를 조작할 때마다 빨강, 파랑, 노랑. 하양 자동차가 한 대씩 차례로 나타났다 사라진다. 누구도 두대를 동시에 가질 수는 없다. 참으로 잔인한 아이디어다.- P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