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보시다시피 나는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 다만 이제 스무 살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떡국 몇 그릇 더 먹었다고 세상이훼까닥 바뀔 리 있겠는가. 열일곱이나 스물이나 어디 가서 여자애‘ 소리 듣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소녀 시절도 살아보면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다. 원하면 돈 벌 껀수도 얼마든지 널렸고 급할 땐 좀 치사하지만 울어버리면 된다. 아저씨 시대보다. 할머니 시대보다 솔직히 짱 멋지지 않은가? 그 이름도 찬란한 소.녀. 시. 대!- P95
그녀의 틈새,
눈을 감으면 그녀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어린 꽃잎에 번성하는 목화진딧물의 냄새, 갓 말린 바다 냄새, 처녀 양의 젖으로 만든 치즈 냄새, 혀끝이 열리고 온몸이 아리아리해지는 냄새,
태초의 냄새. 세상의 모든 냄새.
너의, 너 자신의 냄새.- P123
잘못 눌렀습니다. 비밀번호 네자리를 눌러주세요.
그녀의 생일, 너의 생일, 그녀의 집 전화번호 뒷자리, 너의 집전화번호 뒷자리...... 모두모두 그녀가 지정한 숫자가 아니다.
너는 암호를 풀지 못한 채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컴퓨터를 켜려다 그만둔다. 메일은 삼십 분 전에 확인했다. 그녀가 그사이에메일박스를 확인했을 리는 없어 보인다. 아니다. 삼십 분은 충분히 긴 시간 같기도 하다. 너는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녀의부재는 예고 없이 내린 폭설처럼 네 영혼을 지극한 혼돈으로 덮어버렸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악(惡)의 무수한 가능성들 때문에너는 한없이 불안하고 절박하다.- P131
너의 생리대에는 이제 희미한 연갈색 얼룩도 묻어 나오지 않는다. 한껏 부풀어오른 자궁 점막이 떨어져내리고 그 벗겨진 자리에 보드레한 막이 새로 돋을 채비를 할 동안까지도 너는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일주일 동안 너는 한 장의 일러스트도 그리지 못했다. 영어 교재 삽화의 마감 날짜도 지키지못했다. 출판사는 너와의 계약을 파기할 것이다. 당연하다. 계약이란 그런 것이다.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약속을 어기면 다른한쪽에서 응분의 조치를 취한다. 그녀와 너는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으나, 어떤 계약도 맺지 않았다. 그녀가 어디에 있든 너에게 알릴 의무는 애초부터 없었다.- P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