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면 인생이란 참 오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없을 것 같은 순간이 닥쳐와도 돌아가거나 피해 가는 길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었다. 마지막까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이성을 발휘한다면, 어쩌면 숲속에 숨겨진 지름길을 발견하게 될지도몰랐다. 고진감래(苦盡甘來)! 참고 기다리며 지키면, 결국은 달콤한 열매를 얻게 된다. 나는 어둠침침한 계단을 한발 한발 걸어 올라갔다.- P17
혜미의 아버지는 서울 시내 요지에 다섯 채쯤의 빌딩과열 채쯤의 다세대 주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혜미가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나는 다른 약속이 있다고 둘러댈까 하다가 그냥 옆자리에 올라탔다. 어차피 출발선이 다른 게임이었다.
내가 조그만 무역회사의 여사무원이 되어 나이 들어가거나, 물간 생선회와 식은 LA갈비찜이 포함된 싸구려 뷔페를 피로연으로 결혼식을 올릴 때, 혜미는 전혀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밀라노에서 패션 공부를 할 수도 있고,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오십평짜리 빌라트에 신혼 살림을 차릴 수도 있었다. 나는, 나는 다르다. 나는 혼자 힘으로 이 척박한 세상과 맞서야 했다. 진정으로 강한 여성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P25
공업용 비닐로 덮인 실내에서는차가운 금속과 덜 마른 페인트의 냄새가 났다. 조심스레 시동을 걸어보았다. 엔진 소리는 놀랄 만큼 부드러웠다. 대한민국에서 배기량 2,000cc급 자동차의 오너가 되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2002년형 진주색 EF 소나타 골드. 그녀는 자신의 새 차가 마음에 들었다.- P42
차장님, 이거 비밀인데요. 권이사랑 선미. 글쎄 그 둘 사이가 심상치 않았대요. 나 참, 회사 땡땡이치고 지금도 같이 있는 거 아닌지 몰라. 그녀는 흥미롭게 눈망울을 반짝였으나 시간 관계상 더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브랜든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부터 그녀와 브랜든은 본사의 수석 부사장을 공항으로 영접 나가야 했다. 매끈한 서류가방을 들고 사무실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은 우아하고 완벽했다.
은색 렉서스의 옆자리에 올라타면서 그녀는 저 멀리 세워진 자신의 자동차에 홀낏 시선을 주었다. 차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였다. 2002년형 EF 소나타, 사 년 연속 부동의 베스트셀러1위, 대한민국 도로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모델이었다.
이제 겨우 천 킬로미터를 주행했을 뿐이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그녀는 자신의 새 차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P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