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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류이치 사카모토 
57년의 반생과 그를 둘러싼 음악의 세계,
모든 것을 이야기한 최초의 자서전


서구권에서 먼저 명성을 얻으며 우리에게도 이름이 익숙한 세계적인 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 그는 전자음악의 개척자이자 작곡가, 영화음악가, 영화배우, 모델, 사회운동가 등 수많은 수식어로 설명된다. 이 책에서는 2007년부터 2009년까지 2년간 잡지「엔진ENGINE」에서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하여 류이치 사카모토의 반생을 돌아본다. 그 안에서 유치원 시절 숙제로 「토끼의 노래를 작곡했던 어린아이는 세계적인 밴드 YMO의 멤버이자 솔로 음악가, 아카데미 음악상과 골든글로브상, 그래미어워드를 수상한 영화음악가로 성장하고, 같은 학교 학생들을 동원해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10대 소년은 반전과 환경 문제에 목소리를 높이는 사회운동가로 탈바꿈한다. 독자들은 본인이 직접 이야기한 그의 반생을 통해 수십 년 후에도 결코 퇴색되지 않을 그의 음악과 철학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내 인생을 돌이켜보게 되었다. 속내를 밝히자면 그리 내키지는 않았다. 기억의 단편을 정리해 하나의 스토리로 만들어낸다는 건 사실 내 성격에 맞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현재의 사카모토 류이치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적잖이 흥미를 가지고 있다. 어쨌든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나 자신의 일이니까. 어떻게 이런 인생을 보내게 되었는지 나로서도 무척 궁금하다.
나는 음악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알지 못한다. 음악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던 적도 없고, 어릴 때부터 꼭 어떤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는 사람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P7
음악이란 "시간 예술"이라고 한다. 직선적인 시간 속에서 어떤 변화를 일으켜나가는 창작 활동이라는 말인 모양이다. 그런의미에서 애초부터 음악을 지어내는 재주는 내게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건 공부하면 배울 수 있다.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것은 룰을 배우기만 하면 가능하다.
룰을 외우고 그 룰대로 뭔가를 축적해나간다. 일반적으로 성장이란 그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그런 생각과 어딘가 항상 어긋난 듯한 느낌이 있었다. 공부를 하면 뭔가를 잘할 수는 있겠지만, 왠지 생리적으로 그런 과정이 내게 맞지 않는 듯했다.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래서 과거에서 현재까지 나 자신을 정리해 이야기한다는 데에 사실은 적잖이 위화감이 든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부러 해보기로 했다. 지금까지의 시간을 부감해보고 과거에서 현재까지의 기억과 사건을 순서대로 펼쳐놓고그것을 연결해본다. 그렇게 했을 때 비로소 현재의 나에 대해 뭔가 보일 것이고, 그런 표현 방식을 통해서 비로소 다른 사람들과 뭔가를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P10
이를테면 현재 레바논에서처럼 전쟁이 벌어져서, 이 전쟁으로 혈육을 잃는 슬픔을 겪었다고 하자. 어느 레바논 청년이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사랑하는 누이를 잃었다. 그리고 그 청년은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그건 음악으로 만들어지는 시점부터 음악 세계의 소유가 되어버려서 아무래도누이의 죽음 자체로부터는 멀어진다.
분명 글을 쓰는 일도 그럴 것이다. 어떤 일을 글로 써내려가는 시점부터 이미 좋은 문장인가, 아름다운 문장인가. 힘이 있는 문장인가 하는 언어의 세계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음악도 마찬가지이다. 누이의 죽음에 진심으로 비통한 심정을 품었다고 해도, 음악을 만드는 한 음악 세계의 문제로 진입하고 만다. 그것은 실제로 겪은 누이의 죽음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어서 두 가지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가 생겨난다.
한편으로, 누이의 죽음은 그 청년의 기억이 사라지면 역사의- P20
어둠 속에 묻혀 소멸되겠지만 노래가 되는 일을 통해 민족이나세대의 공유물로서 오래도록 남을 가능성이 있다. 개인적인 체험과의 박리를 통해서 음악이라는 세계의 실존을 얻는 것으로써, 시간이나 장소의 제약을 뛰어넘어 모두와 공유할 수 있게되는 것이다. 음악은 그런 힘을 가졌다.
표현이란 결국 타자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 타자와 공유할수 있는 형태가 아니고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추상화라고 할까, 공동화라고 할까, 그런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면 개인적인 체험이나 아픔, 기쁨은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절대적인 한계가 있고,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결손감이 있다. 하지만 그런 한계와 맞바꾸어 전혀 다른 나라,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함께 공동으로 이해할 수 있는 모종의 통로가 생긴다. 언어도 음악도 문화도 그런 것이 아닐까.- P21
선생님이 가르쳐주시는 대로 주의 깊게 듣다 보면 여러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이를테면 바흐의 곡은 "여기에 조금 전의 멜로디가 나오는구나"라든가 "이번에는 반복해서 나왔어"라든가
"이번에는 두 배로 늘여서 나오는데?"라든가, 그저 멍하니 들었을 때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것들을 점점 깨달을 수 있어서 정말즐거웠다. 와아, 음악이란 재미있는 것이구나, 하고 실감했다. 음악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그 기초는 모두 도쿠야마 선생님에게서 배운 셈이다.

도쿠야마 선생님에게서 레슨을 받는 동안 나는 바흐를 무척 좋아하게 되었다. 보통 피아노곡은 오른손이 멜로디, 왼손이 반주인 경우가 많은데 나는 그게 몹시 싫었다. 내가 왼손잡이였기 때- P31
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흐의 곡은 오른손으로 나왔던 멜로디가 왼손으로 바뀌거나 나중에 형태를 바꿔 다시 오른손으로 나오기도 한다. 오른손과 왼손이 매번 역할을 바꿔가며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진행되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건 결정적인 만남이었다. 팝이나 가요곡도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통해서 자주 귀에 들어왔지만,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음악은 바흐였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피아노 연습을 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나는 정말 연습이 싫다. 실은 집에서 연습이라는 걸 해본 적이 거의 없다. 한번 스윽 보고 연주하지 못하는 음악은 아무리 시간이흘러도 결국 치지 못했다. 연습을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라디오에서 들리는 미국 팝송 같은 걸 쳐보기도 했지만, 결국은「대탈주」 드라마를 흉내 내며 놀기에도 바빠서 피아노는 거의 치지 못했다.- P33
비틀스를 만난 시기는 마쓰모토 선생님 댁에 드나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작곡을 시작한 것, 비틀스를 만난 것, 두 가지 모두 내게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다.
처음에 머릿속을 지이잉 울린 것은 사실 비틀스의 음악이 아니라 사진이었다. 잡지 표지에 실렸던 사진. 처음 본 순간 ‘와아,
대단하다!‘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부쩍 관심이 가면서 어떤 음악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도쿠야마 선생님에게서 레슨을 받는 중고등학생 누나들이그 잡지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표지를 보고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비틀스라는 그룹"이라고 알려주었다. 정말 폼 난다고 생각했다. 그게 비틀스와의 충격적인 만남이었다. 그 잡지가 뮤직라이프였던 것 같은데, 분명하지는 않다.- P41
롤링스톤스도 큰 충격이었다. 연주가 너무 서툴러서 깜짝 놀랐다. 그런데도 멋있다, 너무 서툴러서 멋있다, 라고 생각했다. 펑크한 감각이다. 아직 어린 나름으로도 ‘이건 음악이 약간 틀리는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틀려도 괜찮은 거야?‘라고. 그런 점에서 비틀스는 상당히 세련된 느낌이었다.
비틀스에게서 받은 영향도 물론 지대했지만, 롤링스톤스 쪽도 이후 내가 해온 음악 작업으로 이어졌다. 내 안에 롤링스톤스적인 것의 계보라고 할까, 그런 것이 있었고 그건 특히 아방가르드한 쪽으로 연결되었다.
고등학생 때쯤에는 존 케이지와 백남준 같은 사람들, 그리고 플럭서스와 네오다다이즘 같은 운동에 빠졌다. 그후에는 프리재즈를 하기도 했다. 그런 이단이랄까 전위적인 것을 좋아하는- P42
경향은 지금 생각해보면 바로 롤링스톤스에서 시작되었다. 비틀스의 음악에서 보이는 세련미도 좋았고, 롤링스톤스적인 거친 맛도 좋았다. 어느 쪽도 버리기가 어려웠다.
비틀스는 우선 하모니가 굉장히 아름다웠다. 편곡도 아주 멋졌다. 그때까지의 아메리칸 팝의 심플한 3코드 음악이 아니라매우 복잡한 하모니를 사용했다. 이 울림은 뭘까, 하고 궁금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건 조지 마틴이라는 프로듀서가 상당히 공을 들인 결과였다.- P43
내가 얼마 전에 만나서 정신없이 몰두하게 된, 드뷔시가 좋아하던 바로 그 음이었다. 이 화음에 정말 엄청나게 가슴이 뛰었다. 오르가슴 같은 쾌감을 느꼈다. 너무 흥분해서 평소변변히 대화도 나누지 않던 아버지를 스테레오 앞으로 끌고 와서 비틀스의 레코드를 들려주기까지 했다.
드뷔시를 만난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처음 들은 곡은 다른 외삼촌의 레코드 컬렉션에 있던 현악 사중주곡이었다. 여기에도 엄청난 충격을 받아서 금세 빠져들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나자신을 드뷔시의 환생이라고 거의 진심으로 믿었다.- P44
결국 도쿠야마 선생님과 마쓰모토 선생님을 찾아가 이번에는 나 스스로 다시 음악을 하게 해달라고 머리 숙여 부탁했다. 그때 처음으로 내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음악을 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내가 음악을 꽤 좋아하는구나, 라고 실감했다. 그만둬보고서야 깨달았다. 한 번 헤어진 뒤에 다시 만나 결혼하는 연인 비슷한 심정인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정말 뭔가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내 인생에서 그때가 처음이었다.
당연히 농구부는 탈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농구부 주장에게 찾아가 머뭇머뭇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복도 뒤 으슥한 곳으로 끌려가서 퍽퍽 두들겨 맞고 길게 기른 머리칼을 뽑히기도 했다. 그런 시끄러운 의식을 거친 끝에 다행히농구부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음악에 빠져들었다.- P48
잠깐 멀리했던 반작용인지 나는 본격적으로 작곡 공부에 몰두했다. 이전까지 1주일에 한 번씩 산수 문제를 풀듯이 밤새 작곡숙제를 해서 선생님께 가져갔다면, 그즈음에는 좋아하는 곡의악보를 일부러 직접 구입해 숙제도 아닌데 열심히 연구했다. 이번에는 이 곡을 정복하자고 정해놓고, 어떻게 이런 소리가 나는지 콩나물 같은 음표에서부터 분석해보거나 그것과 비슷한 곡을 만들어보는 등의 연습을 자발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철저히 열중해서 해독해본 곡은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제3번이었다. 지금 들어보면 그야말로 베토벤다운,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곡이지만 그때는 왠지 그 곡이 마음에 들어 반년 동안 반복해서 레코드를 듣고 악보를 들여다보았다. 중학교1학년 후반 때쯤의 일이다.- P50
그 곡은 내가 알고 있던 어떤 음악과도 달랐다. 그토록 좋아하던 바흐나 베토벤과는 완전히 달랐다. 비틀스는 물론이고.
곡을 듣자마자 이건 또 뭔가 하고 흥분해서 완전히 드뷔시에게 사로잡혔다. 지나치게 공감하는 바람에 거기에 내 자아가 녹아들었다고 할까. 벌써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드뷔시가 바로 나 자신인 양 느꼈다. 드뷔시가 다시 태어나서 내가 되었다는 생각까지 했다. 나는 왜 이런 엉뚱한 곳에서 살게 되었는가, 왜 일본말을 하고 있는가, 라고 한탄했을 정도였다. 드뷔시의 필적을 흉내 내서 수없이 사인 연습을 하기도 했다. "Claude Debussy"라고.
그러나 내 주위에는 그렇게 정신없이 빠져든 음악 이야기를 공유할 만한 친구가 없었다. 학교에도 없고 집으로 돌아와도 없었다. 악보를 들여다보며 나 혼자 슬슬 피아노를 치면서, 아아, 어떻게 이런 소리가 날까, 하고 고민했다. 혼자서 음악과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느낌이었다.- P51
데모에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나갔다. 재즈카페에 들락거리던 무렵에 스나가와의 투쟁에서 부상을 입고 머리에 붕대를 둘둘 감고 돌아온 선배가 있어서 스티브 매퀸처럼 멋있다고 부러워하던 끝에 나도 참여하기로 했다. 우선 샤켄에 들락거렸다. 그곳에 가면 어쩐지 눈매가 험악한 선배들이 잔뜩 모여서 몹시 난해해 보이는 책들을 읽고 있었다. 나도 따라서 읽었다. 맨처음 읽은 책이 경제학 철학 초고』였던가. 레닌의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단계』도 읽었다. 솔직히 뭐가 뭔지 전혀 알지못했다. 물론 빠뜨리지 않고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쓴 『공산당선언』도 읽었다.- P76
3학년 가을, 신주쿠 고등학교에서도 수업 거부 활동이 펼쳐졌다. 1969년 가을이었으니까 당시로서는 다른 학교에 비해 늦은편이었다. 안보조약이니 베트남 전쟁 같은 일반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야말로 국지적인, 학교의 개별 과제에 관한 비판운동이었다. 구체적인 요구 사항을 아마 7개 항목 정도로 정리해서 학교측에 요구했던 것 같다. 교복과 교모의 폐지, 모든 시험의 폐지, 생활 통지표 폐지 등등이었다.
"인간이 인간을 평가할 수는 없다. 더구나 인간을 수치로 평가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라는 내용이 핵심 요구 사항이었다. 그건 시험을 통해서 학생의 순위를 매겨 대학에 보내는 교육 구조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었다. 학교 제도의 해체를 주장한 셈이었으니,- P78
당연히 선생님들로서는 난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평가를 하지 않으면 학생을 대학에 진학시킬 수없을 테니까. 하지만 시험을 강행하려는 선생님이 있으면 우리는 교실을 돌며 답안지를 찢어버렸다.
수업은 학생들끼리 진행했다. 바로 지금 일어나는 사건이 세계 역사라면서 베트남과 파리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토론하고, 에드문트 후설의 책을 함께 읽으며 그의 현상학적 환원을 적용해보기도 했다. 정말이지 놀라운 추진력과 용기였다. 돌이켜보면.
3학년 때는 절친한 친구 시오자키, 바바도 같은 반이어서 결속력이 더욱 강해졌다. 수업 거부가 4주일 동안이나 이어졌는데, 우리 반은 모두 마지막까지 지도부의 뜻을 따랐다. 결국 수업거부는 학생과 교사가 대화하기로 하면서 막을 내렸고, 선생님들이 그야말로 진지하게 토론에 응해준 끝에 교복도 교모도 시험도 정말로 없어졌다.
바리케이드로 봉쇄한 학교 안에서 사카모토 류이치가 헬멧을 쓴 채 드뷔시를 연주했다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정작 나는 잘기억이 나지 않는다. 혹시 그런 짓을 했다면 분명 인기 좀 끌어보려고 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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