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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시인의 말

고되고 길었던 여정의 끝이
마침내 저 너머에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안다.
이 여정의 끝에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음을.
아마도 역려에 들어
잠시 몸을 누이겠지만
오래지 않아 주섬주섬
다시 여장을 꾸릴 것임을.
그래왔듯이 그 길에서도 나는
계속해서 묻고 사유하고 걸을 것이다.

2023년 가을 삼성동에서
곽효환
흑백텔레비전 시절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은 프로레슬링이었고 내 유년의 우상이자 첫번째 챔피언은 프로레슬러 김일이었다. 상대적으로 왜소하지만 단단해 보이는 빡빡머리 김일. 그는경기 내내 수세에 몰리다가 막바지에 벼락같은 박치기를 선보였다. 번득이는 박치기 몇 번이면 그보다 머리 하나는 족히 큰 거구들이 사각의 링 위에서 나뒹굴었다. 그리고 끝이었다.
청년 시절 그는 당시 일본 최고의 프로레슬러로 이름을 떨치고 있던 재일동포 역도산은 동경하여 무작정 맨몸으로 일본행밀항선에 올랐다. 우여곡절끝에 역도산을 만났지만 레슬러로서 체구가 작고 특별한 기술도 없었던 그는 새끼줄을 칭칭 동여나무 기둥에 혹은 쇠기둥에 하루에도 수백 번씩 머리를 박고찧는 훈련을 했다. 그럴 때마다 그의 머릿속엔 커다란 종소리윙윙 올렸고 이마는 터지고 찢어지며 쇳덩이처럼 단단하게
단련되었다. 그는 이기기 위해, 아니 링 위에 존재하기 위해 강하게 더 세게 상대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들이받아야 했다. 그럴 때마다 관중들은 환호했지만 그의 머릿속엔 더 큰 종소리가 윙ㅡ윙ㅡ 울려 퍼졌다. 만년에 그는 가장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박치기였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나는 시를 쓴다는 것, 혹은 그것을 계속한다는 것은 김일의 박치기처럼 필살기이지만 가장 하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계속해야만 하는 것이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생명을 조금씩 덜어내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3


우수리강은 지났을까
밤 10시 45분 원동의 항구도시를 떠난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홀로 깨어 칠흑의 밤을 서성인다
해삼위라 불렸던 옛 말갈과 여진과 숙신의 땅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야간열차는
간간이 멈추었다가 밤을 가르고 달린다
우수리스크 하바롭스크 울란우데 이르쿠츠크 크라스노야르스크 노보시비르스크 예카테린부르크 그리고 모스크바까지
일곱 번의 시차를 넘나드는 9,288킬로미터
대륙의 북쪽 가르는 철길을 따라
가없는 시베리아 벌판이 열리고 또 닫힌다
하늘에는 별들 가득하고
내가 기억하는 별자리들을
하나씩 더듬고 짚어나갈 때마다
빽빽이 늘어선 하얀 자작나무숲이 펼쳐지고. 이 막막한 철길에 올랐을 붉은 얼굴들이
캄캄한 차창 밖으로 어른어른 흘러간다- P11
기구한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가족을 위해 더러는
독립과 민족과 자유를 위해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
다시 더 멀고 더 깊은 대륙 저편으로
갔다가 돌아온 혹은 끝내 돌아오지 못한
그을린 붉은 얼굴들
나는 저 너머의 시간을 건너
오늘밤 섬섬히 빛나고 또 스러지는
몇천, 몇만 혹은 몇십만 년 전 떠났을
별들을 헤아린다 그리고
모든 것을 꽁꽁 얼려놓는 혹한과
질척질척한 혹서만이 한 몸처럼 존재하는
이 드넓은 붉은 벌판을
천형처럼 건너갔던 검은 그림자들이
어느 먼 시간을 건너
하나둘 별이 되어 돌아오는 검붉은 파노라마를 본다
차창을 사이에 두고 나도 그들도
하고 싶은 말도 묻고 싶은 말도- P12
먹먹한 슬픔과 울음으로 삼키는 잠들지 못하는 밤
열차는 먼 곳으로 끝없이 흘러가고
광막한 시베리아 벌판에 붉은빛이 든다
긴긴밤을 지나
멀리서부터 아침이 온다- P13
장춘에서 백석을 찾다


회색 땅거미가 더디게 내려앉는
북방 도시의 여름 저녁
가난하지만 외롭고 높고 쓸쓸하고자 했던
사내가 얹혀살았다는
한평 남짓 토굴 같은 집의 흔적을 찾아 서성인다
옛 신경시 동삼마로 시영주택 35번지 
황씨 방,
이제는 동삼마로 33번지부터 42번지를 통합했다는
장춘시 남관구 장통종합대시장 건물 주변은.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의 남루한 삶이 
북적이지만
내가 찾는 이의 자취는 없다

초승달과 바구지꽃과 짝새를 사랑했으나
만주국 측량 보조원으로 혹은 세관원으로 살았던
가슴에 무서운 비애와 적막을 품고 요설 대신 고요히 생각하며 침묵하고자 했으나
동삼마로 토굴집과 러시아인 마을과
다시 동삼마로 작은 의원 건물 2층을 전전했다는
그는 어디에 있을까- P39
만주국 수도에서 오족협화의 그늘 깊은 시대를 살다 간
최남선 염상섭 안수길 박팔양 박영준 그리고 그 사람
서럽고 고단하고 얼룩지고 더러는 굴절된
슬픈 그림자들이
쇠리쇠리한 석양빛 아래 붉게 흐려지더니
이내 뿌옇게 흩어진다

뿌연 먼지 속 한길이 설핏 열렸다 닫힌다
측량도 문서도 제국의 아전 노릇도 그만두고 석 섬지기 밭을 얻은 마을의 눈 녹는 
밭두둑을 걸어
촌부자 노왕과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도랑을 건너고
나귀와 노새를 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잠시나마 홍에 벅차오르던
그 길은 어디에 있을까

뿌옇게 수증기 서린 조당澡塘의 사람들이 아른하다
털 없는 민중민숭한 다리를 한 물통에 담그고. 벌거벗은 몸을 녹이며
나주볕을 한없이 바라보며 생각하던 도연명과- P40
은이며 상이며 월이며 진이며 하는 나라 사람들은
그 자손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재개발 공사가 한창인 흙먼지 날리는 거리에서의
이 낯익은 외로움과 쓸쓸함은
그러나 조금은 우습고 무섭기도 한
이 맑은 슬픔은
이 먹먹한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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