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두 종류로 나뉘며, 대다수는 그중 첫 번째 범주에 속한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자신이 현재의 상태에서 성공을 향해 더 나아갈 수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불가능하리라는 것을깨닫는 사람들. 그러고 나면 자신의 삶에 주어진 운명을 합리화하고그 자리에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는 시점은 놀랍도록 일러서, 대체로 스무 살이 되기 전에도달한다. 교육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 또한 서른에서 마흔 살 사이에는 같은 결론에 이른다. 일부 사람들은 출생 환경이나 그 자신의야망, 그리고 재능에 힘입어 대략 쉰 전후에 비슷한 깨달음을 얻는데, 그 정도 나이에 이르면 이러한 소강도 그렇게 끔찍해 보이지 않는 법이다.- P387
두 번째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인생을 마감할 때까지 자아의 상승과 확장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말이다. 김성수는 이미 태어난 순간부터 도내 네 개 군에 걸쳐 있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비옥한 논밭을 상속받을 부잣집 장손 신분을 타고났을 뿐 아니라, 어느 장관의 외동딸을 아내로 맞으면서 바로 이 범주에 속한 남자가 되었다. 아들이 없었던 성수의 장인은 당시 관례대로 남자 친척을 양자로 삼는 대신 자신의 딸에게 모든 재산을 다물려주었다. 게다가 바로 그 이듬해, 역시 외아들이었던 성수의 사촌 형제가 예쁘고 젊은 정부와 관계를 갖던 중 의문의 복상사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삼촌이 아직 살아 있긴 했지만 성수는 그의 재산까지 물려받을 후계자가 되었고, 이렇게 한 가족 안에서 두 갈래로뻗어나갔던 부는 성수에게로 우아하게 다시 돌아와 결합하였다.- P388
성수는 자신의 비범한 행운을 인지하지 못할 만큼 천박하거나 무지하지 않았다. 가끔 그는 인생이 불공평할 정도로 자신에게 관대하다고 느끼곤 했다. 쉰한 살, 중년의 활력이 정점에 이른 그는 여전히사무실에 출입하며 정기적으로 책을 출간했다. 많은 또래 동료들처럼 방황하거나 게으르게 시간을 보내지도 않았다. 경기가 침체하고가산이 줄어들면서 성수의 지인 중 상당수는 적절한 직업을 찾지 못한 채 소속도 목적도 없이 떠돌아다녔고, 일부는 삶의 의지조차 잃은 채였다. 그의 친구였던 극작가가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한것도 벌써 3년 전이었다. 성수는 잠시 슬픔에 잠기긴 했지만, 사실나이가 들면서 점점 그 누구에게도 진심으로 연민을 느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불행은, 결국 그 모든 것을 용케 피한- P388
자신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라는 성수의 믿음을 더욱 단단히 만들 뿐이었다. 경성 시내의 모든 이가 성수를 알아보고 그를 존경했다. 지하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자들만큼은 예외였지만, 어차피 그들은곧 정부의 단속에 무릎을 꿇을 처지였다.
오직 한 가지 일이 성수의 마음을 불안케 했다. 천문학적으로 보이는 그의 재산이 꽤 빠른 속도로 고갈되어 가는 듯 보인다는 점이었다. 성수 자신도 늘 돈 쓰는 재미를 알았고, 고급 식당이나 옷, 여자에 들이는 비용을 줄일 계획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외동아들이자신을 본받아 가산을 탕진하는 데 얼마나 많은 돈을 쓰게 될지는 도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아들놈은 성수가 했던 그 모든 방탕한 짓거리를 훨씬 더 큰 규모로 벌였을 뿐 아니라, 도박과 아편이라는 새로운 폐해까지 더했다. 성수는 이미 부유한 마을 두어 곳과 그에 딸린 농지 가격에 맞먹을 만큼 막대한 아들의 빚을 갚아준 터였다. 이제 그의 인내심은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P389
군중이 일순간에 조용해졌고 모든 시선은 갑자기 주변보다 더 밝아진 성당 중앙의 입구로 향했다. 면사포로 얼굴을 가린 상태였음에도 신부의 모습은 너무나 사랑스러워, 촛불만 켜진 어두운 신도석사이를 걸어가는 동안에도 그 자신이 지닌 빛을 환하게 내쏘는 듯했다. 모든 하객이 일순 가슴을 아리게 하는 아픔을 느꼈고, 몇몇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기도 했다. 한 여자의 아름다움이 그처럼 마음을 순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것을 그 누가 알았을까.
"환하게 뜬 달을 보는 것 같아…... 월향 언니 이름처럼 말이야."
옥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그 순간 신부를 바라보지 않는 이는 딱 한 사람, 오직 정호뿐이었다. 그는 자신과 바싹 붙어 앉은 옥희의 이마가 그리는 곡선을 그리고 그의 검은 눈, 슬픔과 기쁨이 똑같은 깊이로 차올라 반짝이는 저두 개의 우물을 자신의 영원한 기억에 새겨 넣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는 옥희의 스웨터에 감싸인 채 나란히 솟은 한 쌍의 가느다란 어깨뼈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보니 저 옷 안에 감춰진 맨살까지 그려지는 듯했다. 만일 장의자 등받이를 따라 팔을 뻗어 옥희의 아름다운 등을 감싸 안는다면, 그의 심장은 이 자리에서 바로 멈추고 말리라.- P407
모두가 꿈을 꾸지만, 그중 몽상가는 일부에 불과하다. 몽상가가 아넌 다수의 사람들은 그냥 보이는 대로 세상을 본다. 소수의 몽상가들은 그들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달, 강, 기차역, 빗소리, 따스한죽 한 그릇처럼 평범하고 소박한 것들도, 몽상가들은 여러 겹의의미를 지닌 신비로운 무엇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세상은 사진이라기보단 유화여서,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가장 바깥쪽에 있는 색깔만을 바라볼 때 이들은 영원히 그 아래 감춰진 색깔을 바라본다.
몽상가가 아닌 사람이 유리를 통해 보는 풍경을, 몽상가들은 프리즘을 통해 바라보는 셈이다.
이는 결코 지능이나 열정의 차이로 결정되는 자질이 아니다. 이두 가지는 몽상가의 타고난 자질과 가장 자주 혼동되는 것들이다.- P415
옥희가 아는 가장 지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인 단이의 경우, 그의 시야는 그의 태도와 원칙만큼이나 또렷하고 날카로웠다. 이는 가능한 한 최대한의 우아함과 침착성을 발휘하여 세상의 불순을 바로잡는 것에만 집중할 뿐, 그 아래 묻혀 있을지도 모를 차마 형언할 수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것들에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반면옥희는 달랐다. 무용과 연기를 그만두자마자 자신의 삶에서 모든 색채가 빠져나간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이제 몽상가가 아닌 사람들의 세상에 있었고, 그곳은 낯설고 매 순간 숨이 막히는 장소였다. 인생에서 이처럼 외로워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단이는 옥희가 어서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면 그만이라고 믿는 듯했다.
"불경기 때문이야." 어느 날 아침 단이가 돋보기안경을 끼고 신문을 훑어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영화관에 다니면서 쓸만한 돈이 없는 거지. 요즘 폐업하는 식당들도 많다면서. 네 탓으로 돌릴 것 없어."- P416
체포라는 충격적인 경험과 실연의 상처에도불구하고, 단이는 패배라는 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그에게 실패란 마치 올이 나간 스타킹과 같았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일이지만, 그걸 남들에게 눈치채이는 건 당사자의 잘못이라는 식이었다. 실패를 감추고 처음부터 없었던 일인 양 폐기하려는 노력은 단이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원칙인 동시에 예의의 문제였다. 이는 일종의 멋지고 귀족적인 감성이었으나, 단이의 역할을 다정하고친밀한 친구보다는 존경하고 본받아야 할 대상으로 한정 짓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껏 옥희는 자신의 제작사가 이미 파산했다는이야기도, 또 정확히 서른 살이 된 지금 자신의 저축액이 점점 축나고 있다는 이야기도 차마 그에게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었다. 서른 살. 그가 지닌 여성으로서의 가치가 논리적으로 소멸되기 시작하는 기준점이자, 따라서 계산대로라면 그동안 저금해 온 돈과 착실한 후원자를 통해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며 경제적으로 자립해 있어야할 나이였다.- P417
다음이 없다는 걸 알면서 듣는 "다음에 또 봐요"라는 그 말이 얼마나 더 애틋한가? 종말에 가까워질수록 얼마나 더 자비와 용서의 마음으로 사람들의 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는가? 경성에 있을 때,
그의 분노는 천천히 타오르기 시작해 좀처럼 꺼질 줄 모르는 잉걸불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제 그 불씨는 모두 물에 씻겨 내려간 듯 깨끗이 사라져 버렸고, 남아 있는 것은 자유로움뿐이었다.
정호는 부두 옆에 늘어선 자동차들을 지나쳐 선창을 따라 걸으며 숙련된 하늘의 선원처럼 날갯짓하며 떠다니는 갈매기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매일 이곳을 찾아와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하늘의 빛깔, 새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태평양의 파도 위에 부서지는 태양도, 하루하루 조금씩 달랐다. 세상이 매일 새롭게 태어난다는 사실은 뼈저리는 아름다움을 그에게 안겨주었고, 다만 그는 그것을 조금만 더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거라 생각하며 아쉬워했다.- P485
"아무도 믿지 말고, 불필요하게 고통받지도 마. 사람들이 하는 말뒤에 숨겨진 진실을 깨닫고, 언제나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 그게 널 위한 내 조언이야."
"왜 내가 살아남아야 하지?" 옥희가 물었다. "그래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같은데, 세상은 무너져 내리면서 매일같이 더 사악하고 어두운 곳이 되어가고, 나한테는 아무도 없는데 말이야." 옥희는가로등도, 음악도, 달빛도 없는 창밖의 후텁지근한 풍경을 눈짓으로 가리켜 보였다. 땅에 떨어져 말라 죽은 잎들이 바스락대는 소리만이따금씩 들려올 뿐 거리는 온통 무거운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넌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는군." 이토가 대답했다. 그들은 잠시 말이 없었다. 서로가 완전히 다르다는 걸 알기에 아무런 설득도, 아니 설득의 가망성조차도 없었기 때문이다.- P512
옥희는그가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창살 안에 갇힌 호랑이를 독살하는 걸 즐기지 않듯이. 이는 원칙이라기보다 취향의 문제였다. 옥희는 당황해서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차에서 내렸다.
다음 날 옥희는 이토의 운전기사가 전해준 소포 꾸러미를 하나받았다. 상자 안의 흰 봉투 속에는 빳빳하고 깨끗한 새 지폐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천 원이라는 거액이었다. 그 옆에는 옥희의 손너비보다 살짝 클까 싶은 자그마한 청자 화병도 하나 있었다. 하늘을 가득 메운 채 춤추는 백학들이 섬세하게 상감된 그 화병의 바탕을 이루는 빛깔은 더없이 아름다운 옥색이었다.- P515
8월 6일, 인간의 힘으로 지구 표면에도 태양의 불을 붙일 수 있다는 발전을 통해 전 세계는 중대한 변화를 겪을 것이었다. 하지만 7월의 야마다겐조는 아직 이 사실을 몰랐다. 그는 피할 수 없는 최후의 상황과 마주하기 위해 만주로 돌아와 있었다. 부대의 병사들은 역대 가장 열악한 환경에 처해, 군복이며 군화며 모두 형편없는 수준이었고 매 끼니를 때울 만한 식량도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배급받은 무기라곤 딱 하루의 교전이 가능한 정도의 탄약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여름날의 잔디밭에 잠시 머물러 있을 때면 병사들은 여전히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담배로 물물교환을 하고, 옷을 벗어 세탁하고, 차가운 호수에 뛰어들어 아이들처럼 첨벙대며 웃고 떠들었다. 적어도 이 평화로운 북방 숲속의 군인들은, 야마다가- P516
과거 숱한 기동작전을 지휘하며 목격한 바 있는 그런 종류의 타락으로 이끌리지 않는 듯했다. 이 병사들이 딱히 다른 부대에 비해 선천적으로 순수한 성품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또 야마다가 과거에 이끌었던 병사들 역시 그런 광포한 야수성을 타고났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 병사들도 만약 이곳에 있었더라면 지금 이 숲의 나무둥치 위에 각자 사랑하는 애인의 이름을 새겼을 것이며, 현재 이 천진난만한 병사들도 과거와 같은 상황 속에 있었더라면 자신에게 강간당하고 있는 여자의 목을 베는 끔찍한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 난징에서야마디는 중위 하나가 바로 그런 짓을 하고, 그 뒤에도 여전히 체온이 남아 있는 시체를 계속해서 강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일을 끝내자 그는 돌아서서 약간 쑥스러운 어조로 야마다에게 이렇게말했다. "그냥 하는 것보다 더 좋거든요." 야마다는 중위를 그 자리에서 죽여버릴까 고려했으나, 그것은 반역죄가 되는 행위였다. 제국의 적들을 강간하고 살해하는 일은 전쟁의 자연스러운 일부였다. 명랑하고 쾌활한 지금의 부대원들을 둘러보며, 야마다는 이 전쟁의 끝이 임박했다는 걸 과연 그들이 모르고 있는 건지, 혹은 알아도 별로개의치 않는 건지 궁금해했다.- P517
그 태연자약한 풍경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은 것은 엄청난 사건, 그러니까 단 하나의 폭탄으로 한 도시 전체가 순식간에 죽은 일이었다. 오후가 되어서야 히로시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무전으로 메시지를 받았으나, 야마다는 여전히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이 연보랏빛 꽃들, 호수에서 나른하게 헤엄치는 거북이들, 상쾌한 이 여름 사이에최대한 많이 자라기 위해 힘을 쏟아 가지를 뻗는 나무들이 있는 세상에서 동시에 눈을 멀게 하는 무시무시한 백색광선, 검게 그을려 녹아내리는 살, 얼굴 전체가 날아간 사람들이 남은 잿더미 도시가 있을 수 있는가? 이들이 어떻게 양립할 수 있단 말인가? 세상은이제 완전히 무의미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고, 마치 그게 말이 되는 것처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가장 큰 중죄였다. 그런데도 사령관 회의에서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는듯 임박한 소련의 공격에 계속 대비하고 있으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P518
아주 오래전, 여기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어느 산속에서 바로 이렇게 눈 위에 누워 있는 남자를 발견하지 않았던가. 시체나 다름없이 보이던 그 남자. 낡고 해져 너덜너덜한 옷을 걸치고 있던, 믿을 수 없이 수척하고 앙상한 몰골의 그 사람. 당시의 야마다는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이 바뀌리라는 걸짐작조차 못했지만, 그 이후 일어났던 모든 일을 조화롭게 맞물리게 하는 어떤 절대적인 필연성이 수정처럼 또렷한 의식의 물결 속에서 그를 압도했다. 논리적으로든 비논리적으로든 발생했던 불가역적인 사건들, 그 모든 일이 그를 정확한 최종 목적지인 이곳에 안착시켜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가장 어려웠던 ‘왜‘라는 물음조차, 이제 새하얀 저 하늘에서 깨끗하게 녹아 사라지는 듯했다.
"이제 알겠군." 그는 중얼거렸다. 아니, 어쩌면 속으로 생각하기만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의 언어가 목구멍을 떠나 음성이 되었는지, 혹은 그의 머릿속을 떠다니는 의식의 단편으로만 남았는지도 더는분명하지 않았다. 그가 실제로 소리를 냈다 한들, 그걸 들어줄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야마다는 마침내 평온을 찾았다.- P527
열여섯 살쯤 되었을 때였던가, 책 한 권에 푹 빠져 읽느라 지새우던 밤, 바로 이 시간에 자신이 한낮의 정오보다 더 생생하게 깨어 있으며 살아 있음을 실감했던 것이 기억났다. 어린 명보는 자신의 앞에 인생 전체가 펼쳐져 있음을 확신했고, 새벽 4시의 신선하면서도 그을린 듯한 냄새는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으로 그를 가득 채웠다. 이제 그는 백발이 성성하고 불편한 다리를 절뚝이며 걷는 노인이 되어 있었다. 그 모든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노년이란, 인생의 모든 행복이 앞으로 다가올 날들이 아닌 이미 지나간 날들에서만 발견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는 어쨌든 자신의 역할을 다했으며, 자신보다 더 위대한 무언가를 위해 살았다.
명보가 3층 감방에 갇힐 즈음 새로운 공화국의 태양이 떠올랐다. 창문이 그리 높지 않았기에 그는 귤색 빛을 받아 반짝이는 기와지붕들과 헐벗은 가지의 나무들을 볼 수 있었다. 하늘을 활공하며 지저귀는 새들의 모습도 보였다. 아침의 영원한 이 고요가 그에게 참을수 없는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시간의 흔적이 깊게 쓸고간 명보의 두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삶을 위해 지불하기에 죽음은 아주 작은 대가였다.- P552
은은하고 희미하게 빛나는 완벽한 구체. 내 손바닥 위에 놓인 그것은, 새벽달처럼 옅은 분홍색과 회색으로빛나는 진주 한 알이었다.
한참이나 그걸 바라보던 나는, 정호가 아직도 나를 돌봐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저세상에 가서도 말이다. 그리고 나도 똑같은 방식으로 있을 거라는 것도 삶을 계속 놓아주고 또 붙잡고 버티면서, 오직 바다에서 온 나의 일부만이 남을 때까지.
삶은 견딜 만한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해주기 때문에 그래도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기때문에.
나는 진주를 옷 가방에 넣고 물가로 걸어 나왔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원한 청색 파도 사이를 둥실둥실 부유했다. 살아가면서 처음으로, 그 어떤 것에 대한 소망도 동경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마침내 바다와 하나였다.- P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