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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정해진 날 전까지 한 주 내내 날씨가 흐리고 이슬비가 내려 옥회는 걱정으로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그날이 되자 구름 한 점 없는하늘에 태양이 쨍하게 솟았다. 두 아이는 옷을 입기 전에 정원에서 단이가 코스모스 꺾는 것을 도왔고, 해순의 손길도 빌렸다. 옥희의정수리 위로 화려하게 수놓은 족두리를 씌우기 전에, 해순은 긴댕기를 꼬아 올려 낮게 쪽을 진 뒤 옥희의 머리에 처음으로 은비녀를꽂았다. 새신부의 상징이었다. 올림머리는, 옥희가 신체적으로는 동정을 간직하고 있을지언정 겉으로 드러나는 신분상 더는 혼인 이전의 상태가 아님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는 일반적인 기혼 여성들과도달랐다. 오른쪽으로 열리게끔 감아 입은 치마가 그의 직업을 나타내는 표식이었다. 단장의 마지막 순서인 화장까지 마쳤을 때, 옥희는거울 속에 비친 아름답고도 낯선 이를 보았다. 하얀 분가루를 칠한 피부 위에 붉게 도드라진 입술을 한 그 자신의 모습이 단이와 매우비슷하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 P138
"그러니까, 약한 국가와 민족이 더 강한 국가와 민족에 흡수되고통합된다는 건 불가피할 뿐 아니라 바람직한 일이라는 거야." 이토가 깔끔하게 다듬은 콧수염을 한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일본이 없다면 조선이 어떻게 현대화됐겠어? 철도, 도로, 전력과 발전을 가져다준 쪽이 누구냐고. 이렇게 제멋대로인 나라를 정리해 주는동안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관대한 호의를 베푸는 거야. 그런데도 이 개 같은 새끼들은 자기들한테 이로운 게 뭔지도 모른다니까."
"우리가 이곳에 발전을 가져온 건 틀림없지. 그리고 이 경우 국가사이에도 약육강식의 논리가 적용된다는 자네 말도 옳아. 하지만 쌀 문제에 관해서는 좀 의문이 들어." 야마다가 대꾸했다. "왜 굳이 피를 볼 때까지 그들을 다그치는 거지? 그들을 더 적대적이고 통제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드는 꼴이잖아.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P147
삶이 꾸준한 전진의 과정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태도는 젊음 특유의 요건이다. 옥희 역시 인생의 한 단계를 지나고 나면 바로 그다음 단계가 오리라는 걸 당연하게 여겼고, 가두 행렬에서 자신이 성년으로 한 발짝 들어서는 확실한 순간을 경험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날이후 일상에 아무런 변화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놀라움과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는 여전히 그들이 사는 곳에서 어느 방향으로든 최대 다섯 집 이상의 거리를 넘어가지 않도록 엄격히 금지했다. 옥희도 언제나처럼 그 명령을 순순히 따르긴 했지만, 단이의 집에 점차 익숙해지면서 처음 그곳에 도착하여 벅차게 느끼던 찬탄과 애착에 서서히 먼지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 P153
그로서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정호에게 이 모든 것을 세세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젊은이가 나름대로 영민한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했다. 한 무리의 늑대처럼,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부하들을 이끌고 상상할 수도 없는 험난한 일들을 겪으며 거리에서 살아남지 않았는가. 명보는 늘 첫인상이 그 사람의 본질을 보여준다고 믿었고, 이렇다 할 특징 없이 평범한 정호의 얼굴에서 매우 희귀한 것을 보았다고 느꼈다. 이는 그가 모든 사람에게서 가장간절히 찾고자 하는 자질, 다름 아닌 정직함이었다.- P288
거의 예외 없이, 다들 너무 당연하다는 듯 제 스스로를 정직한 인물로 여긴다는 점은 오랫동안 명보를 놀라게 했다. 사람들은 자신의행동을 합리화할 필요가 있을 때면 깜짝 놀랄 만큼 영리하고 교활해졌으며, 너무도 약삭빠르게 머리를 굴리느라 심지어 자기 자신을속이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정호는 뭔가 달랐다.
이 야수 같은 젊은이가 숨 한번 돌릴 필요도 없이 다른 사람을 해치는 데 능숙하다는 것은 명백해 보였다. 그의 내면에는 견제와 균형,
이해득실에 따라 작동하는 구조 자체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바로 정호가 이 세상의 나머지 사람들과 달라 보이는 주된 이유였다. 그처럼 단도직입적인 성격에 그가 지닌 거칠고 강렬한 기운이더해져, 많은 부하들로 하여금 그를 따르게 할 뿐 아니라 제 목숨까지도 내놓을 만큼 그를 존경하고 신뢰하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했으리라고 명보는 생각했다.- P289
명보의 마지막 말을 듣는 정호의 눈앞에 다시 옥희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명보가 얘기하는 모든 것들이 어떻게 그처럼 이치에 잘 맞는지 내심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공산주의, 러시아, 일본 혹은 한국, 정호 자신과는 무관한 관념이나 세계지도가 아니라. 진정한 행복을 찾는 방법에 대해 한 이야기 말이다. 그저 사랑하는누군가와 함께 소박한 삶을 나누고 싶다는 바람, 바로 그것이 그가아무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하는 마음속 소망이었다. 자신이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명보라면 이러한 소망을 인정하고, 그에 더해 존중해 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누구에게도 이처럼 이해 받은적이 없었는데, 방금 만난 이 낯선 사람에게서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게 그로서는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명보만큼 진실하고 똑똑하고힘을 가진 사람마저 정호가 자신의 작은 소망을 이룰 수 있게끔 이끌어주지 못한다면, 아마 이 세상 그 누구도 할 수 없을 터였다.
"그래서 이 공산주의자라는 게 되려면, 뭐부터 해야 합니까?" 정호가 물었다.- P291
옥희는 가슴에서 시작되어 몸 전체로 뻗어나가는, 마치 무엇인가에 취한 듯한 신비로운 떨림을 억제하려고 노력했다. 사랑은 한 번에 일어나는 것이지만, 동시에 단계적으로 번져가는 것이기도 하다. 이미 첫눈에 한철을 사랑하게 된 옥희는 한 여자가 자신의 연인이 어떤 영혼을 가졌는지 깨닫는 바로 그 계시적인 순간을 경험하고있었다. 그는 그 남자가 아주 특별하고 부드러운 영혼을 지녔다고느꼈다. 그리고 남들에겐 들키지 않게 잘 감춰진 그 여린 모습을 오직 옥희에게만 드러낼 수 있으며, 옥희 자신이 한철의 내면에서 그걸 끌어낸 장본인이라는 것까지도 말이다. 바삐 인력거를 끌며 달려가는 한철의 넓은 어깨와 길고 마른 골격, 탄탄한 등, 잘록한 허리와엉덩이를 바라보면서, 옥희는 이 젊은 남자의 처지를 애처롭게 여겼다. 잘생기고 똑똑하고 훌륭한 능력을 갖췄음에도, 한철은 자신의 가족과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다. 전날 밤에 대화할 때도 그랬듯이, 옥희는 이 남자가 지고 있는 때 이른 책임감을 조금 덜어줌으로써 그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지고 밝아지는 걸 보고 싶었다. - P331
연화의 이사는 단이의 집에 묘한 우울감을 드리웠다. 그의 부재가가장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건 아침 식사 자리에서였는데, 그때만큼은 언제나 모두 함께 모이곤 했기 때문이었다. 늘 그래왔듯이, 단이는 자신의 감정에 대한 열정적인 도취와 그런 감상에 빠져들기를 자제하려는 의지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전자는 그의 본성이었고 후자는 그의 원칙이었다. 단이는 결코 슬픔과 공허한 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법이 없었으니, 가장 예리한 관찰자만이 그의 확고한 침착성에 미세한 변화가 찾아왔음을 감지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단이의 속내를 속속들이 파악하는 월향은 이모가 떠난 연화를 몹시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월향 자신도 비슷한 상실감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낙심하지는 않았다. 동생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며, 그는 자신의 자매를 진심으로사랑하게 된 터였다. 하지만 그런 심경 변화와 동시에 그들 각자의- P338
자아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형성되었으니, 두 사람은 해가 지날수록서로를 덜 필요로 하게 되었다. 월향은 그저 연화가 저만의 재능을꽃피우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게 되어 기쁠 뿐이었다. 자신을 사랑해 주는 남자와 음악, 동생의 행복에 필요한 건 이 두 가지뿐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이 행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월향은알 수가 없었다. 관심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월향은 그런 문제에 대해 한시도 생각을 멈춰본 적이 없었는데, 그에겐 행복이라는 관념 자체가 뭔가 낯설고 닿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당신은 달에 가서 살고 싶나요?"라는 질문을 받는 것만큼이나 엉뚱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월향에게 가장 행복에 가까운 감정이란, 한밤중에 그의 딸이 자신의 이불속으로 웅크리고 들어오며 팔베개를 해달라고 졸라댈 때 드는 기분이었다. "네 베개는 어쩌고?" 월향이 이렇게 물으며 마른 국화 잎과녹두로 가득 찬 해숙의 부드러운 원통형 비단 베개를 가리키면, 해숙은 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이렇게 대꾸했다. "싫어, 싫어. 엄마 팔베고 잘 거야." 그러곤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과장된 한숨을 푹 쉬어 보이는 월향을 향해 낄낄거리며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 P339
어쩌면 그게 바로 월향의 행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행복이라고 운운, 만끽하는 것은 자신을 이기적이고 자격 없는 사람처럼 느끼게 했다. 그는 특별히 행복해지기를 바라지 않았고, 그저 자신과 딸의 장래를 보장하기에 충분한 돈을 모으기만을 고대할 뿐이었다. 그는 해숙을 평범하고 현대적인 여자아이로 키워내고 싶었다. 그게 바로 월향이 기생 일을 하면서도 어떤 연애사에도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했던 이유였다. 그래야 해숙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바람직한 남자와 결혼할 자유를 누리게 될 테니까. 상류층 가정의 여자아이들은 종종 일본이나 심지어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곤 했으니,
월향은 해숙 또한 돈으로 가능한 한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게끔 할 작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연회에 참석하거나 광고 모델을 하며 벌어들인 돈을 거의 다 저축했다. 물론 옥희나 연화가 받는 것보다는 적었지만, 그래도 제법 상당한 액수였다. 월향이 그 돈을 모두 해숙에게 투자했기 때문에, 해숙은 명문 학교에 다니고 예쁜 옷가지들로 치장하며 남부럽지 않게 자라났다. 해숙이 대부분의 과목에서 좋은 점수를 받고 선생님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모범생이라는 사실은 월향의 자랑이자 유일한 낙이었다.- P340
"그분은 ‘기생‘이라고 알려진 사람이에요. 내가 듣기론 아주 성공한 경우라더군요. 그분의 딸은 아버지 없이 태어난 아이죠." 교장은
또박또박 설명한 뒤, 더는 이 이야기를 입에 올리고 싶지 않다는 듯 깍지 낀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커티스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문득 그 남자의 마음속에, 만일 그 낯선 사람이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것을일종의 계시로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엇의 계시란 말인가? 그것까지는 아직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가벼운 바람이 엷은 먼지구름을 훅 일으켜 푸른 하늘로 날려 보냈다. 창밖을 너무 오래 쳐다보고 있는 건 아닌지, 혹시라도 자신의 부주의한 태도에 교장의 기분이 상하는 건 아닌지 슬슬 걱정이 들 즈음, 연보랏빛치마를 입은 여자가 창틀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리저리 날리는 분홍빛 모래 속에서, 그는 마치 어느 사막을 건너는 고독한 여행자같아 보였다.- P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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