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혜JUHEA KIM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이자 친환경 생활과 생태문학을 다루는 온라인 잡지 <피스 덤플링>의 편집장.
1987년 인천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로 이주했다.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미술사학을 공부했다.
2016년 영국 문학잡지 (그린)에 단편소설 「보디랭귀지Body Langer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인디펜던트>를 비롯한 여러 제에 소설과 수필, 비평 등을 기고했다. 그중 미래 한국을 배경으로 한 단편소설 「바이오돔은TV 시리즈로 제작될 예정이다. 어린 나이에 한국을 떠났지만 모국어에 자부심을 가지고 가정에서 늘 한국어를 사용해 온 이중언어 사용자로서 고 최인호 소설가의 단편소설「이 지상에서 가장 큰 집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한국이라는 작은 땅의 역사를 장대한 스케일로 펼쳐낸 장편소설 데뷔작 작은 땅의 야수들은 6년에 걸쳐 집필한 대작이다. 독립운동을 도왔던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어릴 적부터 어머니에게 듣고 자라면서 한국의 역사를 우리 삶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인식했고 이러한 가족 내력을 간직한 채 한국의 역사를 전 세계 독자에게 알리는 동시에 자연 파괴, 전쟁, 기아를 맞이
한 지금 우리가 어떻게 의미 있게 살아야 하는지 제시하는 소설을 썼다. 2021년 마침내 ‘작은 땅의 야수들은 "톨스토이 스타일의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출간 즉시 아마존 ‘이달의 책‘에 올랐고, <하퍼스 바자> <리얼 심플> <미스 매거진》 《포틀랜드 먼슬리>에서 ‘2021년최고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더 타임스》 《뉴욕타임스》 등 영미 40여 개 매체에서 추천 도서로 소개되었다.
소설에 대한 관심은 전 세계적으로 퍼져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등 14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었고, 2022년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문학 작품에 수여하는 ‘데이턴문학평화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그리고 2024년 러시아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톨스토이문학상(야스나야 폴랴나상)‘ 해외문학상을 수상했다.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 『City of Night Birds』는2024년 12월 영미권에서 출간을 앞두고 있고 한국에서는 2025년 출간 예정이다. 한편 작가는 현재 비영리단체인 한국범보전기금 홍보대사로 활동하며 한반도야생의 호랑이와 표범을 복원하는 일을 지원하고 있다.
juheakim.com
동트기 전 어둠의 산책처럼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는
책이 되길...
김주혜
하늘은 하얗고 땅은 검었다. 처음으로 해가 떠오르기 전 태초의 시간 같았다. 구름은 그들이 속해 있던 영역을 떠나 나지막이 내려와,
마치 땅에 맞닿은 듯 보였다. 거대한 소나무들이 창공을 둘러싸고어렴풋한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런 흔들림도 소리도 없었다.
이 아득한 세계에서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모습으로, 눈길에 난 작은 얼룩처럼 사람 하나가 홀로 걷고 있었다. 사냥꾼이다. 아직 부드러움과 온기가 남아 있는 짐승의 발자국 위로 몸을 구부린 채, 남자는 자신이 노리는 사냥감이 있는 방향으로 코를 킁킁거렸다. 눈의날카로운 냄새가 폐를 가득 채웠고, 그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곧 약간의 눈이 내려 쌓이면 그 짐승을 더욱 쉽게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발자국 크기로 미루어 몸집이 제법 큰 표범 같았다.- P17
남자는 나무들 사이의 그림자처럼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동물들은 여기 그들의 영토에서 소리 없이 움직였지만, 산은 그의 것이기도 했다. 혹은 바꾸어 말해서,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산에 속해 있었다. 험준하게 펼쳐진 산들이 특별히 관대하다거나 위안을 주어서가 아니라, 이 깊은 숲의 어느 곳이든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똑같이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산을 타고 있을 때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았다. 어떻게 숨을 쉬고, 걷고, 생각하고, 죽여야 하는지. 마치 표범이 표범으로 사는 법을 알고 있는 것처럼.- P18
그 삶에서, 남자는 대한제국군에 복무하던 병사였다. 활 쏘는 기술로는 나라에서 제일이라는 명사수들만 특별히 차출하여 만든 부대였다. 화승총이나 활로는 누구도 남자를 능가할 수 없었다. 각 지역의 특성을 빗댄 옛말을 따라, 사람들은 남자를 ‘평안도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물론 그 사나운 야수들은 평안도뿐 아니라 이 작은 땅의 모든 산과 숲마다 넘쳐났기에 고대 중국은 이곳을 ‘호랑이의 나라‘라 부르기도 했을 정도였지만, 확실히 그 별명은 남쪽에서 왔다는 농부들보다 그 남자에게 훨씬 잘 어울렸다. 험준하고 경작하기 힘든 땅을 개척해 낸 북부인들은 사냥꾼의 피를 타고난 자들이었다.- P20
사냥꾼의 오래된 기억은 지금 주위에 폭신하게 쌓여가는 눈처럼 그의 머릿속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남자는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채, 절벽 끝 선반처럼 튀어나온 바위를 응시했다. 차디찬 눈보라가 그의두 눈과 콧속으로 거칠게 파고들고 맨손을 장갑처럼 하얗게 둘러싸사지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켰다. 남자의 예상보다 더 짙은 눈발이었다. 그리고 동쪽에서 밀려오는 눈구름까지 확연히 보이는 이 정도높이에서는, 한동안 눈이 그치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첫 눈송이의 냄새를 맡았던 순간 곧바로 산에서 내려갔어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흙 위에 촉촉하게 찍힌 그 짐승의 발자국을 발견했던 바로 그때 말이다.
남자는 재잘거릴 기력도 없는 아이들이 누추한 오두막에서 고요한 침묵 속에 굶주리고 있는 꼴을 보는 게 싫었다. 머지않아 먹을 것을 가져오겠다고 그들에게 약속하고 길을 나섰다. 사슴이나 토끼라- P23
도 잡았다면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 그 작고 행복한 얼굴들이 불을 켠 등처럼 환해지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가 발견한 건 표범의 발자국뿐이었고, 어쩌면 한 해 수확량의 반절이 넘는 값어치를 하는 그 짐승의 가죽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홀려버렸다.
오늘이 내가 죽는 날이려나? 그는 생각했다. 갑자기 남자는 극심하게 피로해졌고, 지금껏 그를 떠받쳐 온 모든 긴장감이 서서히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다 그는 쌓인 눈의 모습이 마치 갓 지어 뜨거운 김이 솔솔 피어오르는 흰 쌀밥 한 그릇 같다고 상상했다. 그렇게 뜨끈한 쌀밥을 먹어본 건 평생을 살면서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남자는 분노하는 대신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여윈 몸을 무심하게 관통하며 불어가는 바람 같은 웃음이었다. 죽기 전에 그는먹고 싶었던 음식 몇 가지를 더 떠올려 보고 싶었다. 간장과 파를 끼없어 푹 고아낸 갈비찜이나, 걸쭉하게 녹은 골수가 입천장에 쩍쩍들러붙을 정도로 진한 꼬리곰탕 같은 것들. 딱 한 번, 어느 명절 잔치에서 먹어본 음식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환상도 지금 그를 향해 다시금 떠밀려 오는 또 다른 기억보다는 강렬하거나 유혹적이지는 못했다.- P24
표범이 절벽 끝에 튀어나온 바위로 훌쩍 올라왔다. 짙은 안개 속에서 윤곽으로만 어른거리는 그 짐승의 존재를 그는 눈으로 보기보다 온몸의 감각으로 느꼈다. 마침내 짐승이 몇 자도 되지 않는 거리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남자는 숨이 턱 막혀 활을 아래로 내렸다.
그것은 표범이 아니라, 아직 다 자라지 않은 호랑이였다.
콧등에서 꼬리 끝까지, 남자가 양팔을 한껏 펼친 길이만 했다. 다자란 표범 정도의 크기. 새끼 호랑이라기엔 너무 크지만, 아직은 어려서 혼자서 사냥하지는 못하는 놈이다. 하얀 털로 폭신하게 뒤덮인둥근 귀를 움찔거리며, 어린 호랑이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사냥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차분한 노란색 홍채는 겁을 먹지도 화가나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사람이라는 존재를 본적이 없는 게 분명했고, 그래서 이 이상한 형상의 등장에 약간 어리둥절해하는 것 같았다. 사냥꾼은 활을 더 단단히 움켜쥐었다. 사정거리 안에 있는 호랑이와 마주친 건 지금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P27
잿빛 어스름이 폭설에 몸을 떠는 나무들 위로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남자는 산신령을 향해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당신의 영물을 놓아주었으니 저도 무사히 내려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눈보라는 저물녘에나 겨우 잦아들었다.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 남자의 다리가 꺾였다. 그는 한 마리 짐승처럼 네발로 선 채 잠시 버텼지만, 곧 팔꿈치마저 힘이 완전히 빠져버리자 달빛 아래 하얗게 빛나는 고운 눈가루 속으로 파묻히듯 쓰러졌다. 그는 생각했다. 이왕죽을 거라면 하늘을 바라보며 죽어야지. 남자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등을 대고 누웠다. 달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 자연 속에서 가장 자비에 가까운 무언가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P29
가옥의 무수한 미닫이문 중 하나가 열리고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이쪽으로 돌아서기도 전에, 이미 그 단아한 등의 모양과 뒤쪽 목덜미에서 어깨까지 길고 우아하게 떨어지는 선만으로도, 옥희는 그 여자가 대단히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음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가 얼굴을 돌리고 그들을 향해 짐짓 엷은 미소를 지어보이는 순간, 옥희는 알 수 없는 설렘과 갈망이 가슴을 죄어오는 것을 느꼈다. 여자들 사이에서 곧잘 질투의 원인이 되곤 하는 흔한 외적 매력 대신에, 이 낯선 사람의 아름다움은 훨씬 드물고 희귀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뭔가 희망의 분위기를 머금고 있었고, 그러한 기분을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전염시키는 듯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온화한 표정 속에, 절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위엄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상대의 희망을 한껏 부풀려 띄워놓았다가도 곧 내동댕이쳐 그들이 겁을 먹고 움츠리는 것을 바라보며 마음을 여유롭게 쥐락펴락할 수 있는 사람 같아 보였다.- P53
그러나 삶은 균형을 유지해야 했다. 은실은 실제로 안타까운 희생처럼 느껴지는 무언가를 해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놓을 것이었다. 장군과 월향, 그리고 연화. 만일 그 세 사람이 불타는 집에 갇혀 있다면, 그는 즉시찬물 한 동이를 뒤집어쓰곤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그들 모두를 꺼내올 것이었다. 자신에게는 그게 바로 사랑의 의미라고 은실은 머릿속으로 선언했다. 그러나 그의 쓸쓸한 손은, 다음 날 아침 성문을 통과한 천 씨가 사냥꾼의 집에 은반지를 전달하는 순간까지도 줄곧 텅빈 애석함을 느끼고 있었다.- P77
가장 놀라운 사건들은 아무도 눈치챌 수 없이 작은 바늘 하나가 툭떨어지듯 시작하여 꼬리를 물고 연쇄한다. 길 잃은 개 한 마리의 출현만큼이나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저 세월 속에 묻혀 흘러가는 여느일탈로 말이다. 어느 아침, 옥희는 잠에서 깨어나 그날 예정되어 있던 모든 수업이 취소되었음을 알았다. 바깥세상의 온기를 느끼고 이제 막 고치에서 빠져나온 어린 꿀벌처럼 그는 밖으로 뛰어나가 숨을한껏 들이쉬었다. 이른 6월의 생동감으로 가득한 날이었다. 나무들은 각자의 녹색 음향을 노래했으니, 그 신선함이 눈으로도 들을 수있는 음악처럼 펼쳐졌다. 여자아이들은 고삐 풀린 송아지 떼처럼 정원에서 신나게 뛰어놀았다. 책벌레인 옥희마저도 이날만큼은 잠시 글에서 눈을 떼고 휴식을 만끽하는 것이 전혀 안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P78
가장 소중한 친구가 자신에게 없는 특별한 재능을 가졌다고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옥희 자신이 외모도 더 예쁘장하고 문학을 이해하는 능력까지 겸비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위축된 패배감을 맛보는 대신, 옥희는 그들이 서로 딱 맞는 완벽한 한 쌍이라는 사실을 확인받았다는 사실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자신은 관찰력이 뛰어나고, 총명하고, 지적이고, 성실하다. 연화는 활달하고, 기백이 있고,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열고, 자신감이 넘친다. 그들은 서로 성격이 비슷한 두 친구가 종종 그러하듯이 한 사람의마음을 두고 동시에 경쟁하거나 같은 종류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이결코 없을 것이었다. 옥희는 그들이 각자 반쪽의 인생, 하나씩의 날개를 가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들은 서로 나란히 서 있을 때 진정으로 완전해질 수 있다고.- P99
"500년도 더 전에 도읍 성벽과 함께 세워졌지. 내가 경성에 처음 왔을 땐 그 성벽도 아직 남아 있었어. 그때만 해도 웅장한 모습이 참 근사했는데, 오래전에 일본인들이 성벽을 허물어버렸지. 저 꼴 보기 싫은 전봇대들도 그때는 없었는데."
인력거꾼이 달리기 시작하자, 역전의 혼란스러운 소음도 점차 줄어들었다.
"우리, 저 대문을 지나가는 거예요?" 옥희가 물었다. 집을 떠난 이래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었다.
"그럼, 당연하지." 단이가 말했다. "주변에 벽이 없다고 해서 대문이 제 역할을 못 하는 건 아니란다. 저게 없으면 다들 경성에 도착했다는 걸 어떻게 알겠니? 게다가,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 나오는 것보다 신나는 것도 없거든, 슬플 땐 그걸 기억하렴." 단이가 쾌활하게 말했다. 묘하게 사람의 기운을 북돋아 주는 무언가를 찾아내는 능력또한 그의 특별한 재능 중 하나였다. "이제 들어간다. 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너희들도 알게 될 거야!"
인력거가 아치 밑으로 들어갔다가 다른 쪽으로 빠져나오는 순간, 옥희는 형언할 수 없는 눈부신 고양감에 온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P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