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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은 부여 정림사 오층석탑을 가장 충실히 계승한 백제탑이다. 높이 8.5m의 제법 큰 규모로 육중한 볼륨감이 있는데 얇은 지붕돌의 경쾌한 느낌은 백제탑만의 멋이다. 다만 정림사탑에 비하여 약간 둔중해 보인다. 이때문에 이 탑의 제작 시기를 놓고 미술사가들은 제각기 7세기 백제설, 8세기 통일신라설, 10세기 고려설을 제기하고 있다.
이 탑의 연대 추정을 어렵게 만든 것은 여기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의 내용이복잡하기 때문이다. 1965년 탑을 해체 수리할 때 사리장치가 두 군데서 발견되었다. 하나는 원래 목탑의 사리공에서 신라 9세기 이후에 제작된 금동불상과 청동방울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고려 초에 지역적 특성을 반영하여 세운 탑이라는 견해가 나온 것이다. 또 하나는 1층 지붕돌의 사리공에서 아주 아름다운 사리장치가 나왔다. 순금으로 만든 연꽃무늬 사리함과 파란 유리 사리병은 지금도 우리나라 금속공예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당시 학자들은 이 사리함을 통일신라 유물로보고 탑도 통일신라대로 추정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왕흥사터와 미륵사 서탑에서 백제의 정교한 사리함들이 속속 발견되면서 이제는 백제의 유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해져 통일신라설은 힘을 잃었다.- P156
이런 사실들을 모두 감안해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왕궁리 절터는 본래백제 무왕이 미륵사를 지으면서 금마로 천도할 계획을 갖고 있을 때 지은 별궁이있던 자리다. 그러나 천도 계획이 무산되면서 별궁은 폐궁이 되었고 그 자리에는절이 지어졌다. 주변에서 나온 ‘상부대관관서명과 ‘궁사‘라는절 이름이 새겨진 기와편은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이 절을 처음 지을 때는 목탑이었는데 무슨 사정에서인지 나중에 오층석탑으로 바뀌었고 이때 이 아름다운 사리함을 장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나말여초를 거치면서 한 차례 수리할 때 이 불상이 봉안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실루엣이 환상적인 왕궁리 오층석탑이 백제품의 우아한 탑이라는 사실에는 아무 이론이 없다.- P156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의 아름다움은 
석가탑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비례 감각을 보여주는 데 있다. 돌의 두께가 둔중하지도 가볍지도 않게 알맞으면서 늘씬하고, 단정한 화사석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지붕돌 역시 부드러운 곡선으로 나타냈을 뿐인데 그 흔연한 어울림이란 마치 귀공녀를 보는 듯한 기품이 있다. 연꽃새김을 자세히 보면 겉꽃 속에서 새 꽃잎이 머리를 살짝 드러내고 있다. 화사석에는 창문틀이 가볍게 새겨졌다. 감정의 절제미가 들어 있다고나 할까. 그리고 석등 앞에는 넓적한 배례석이 있어 석등의 존재와 의미를 높여주는데 옆면 모서리를 마치 상다리처럼 조각하여 안상眼象을 명확히 했다.
석등은 절 마당이 아무리 넓어도 하나만 세우는 것이 오랜 전통이다. 이는<현우경(經)의 빈녀난타품에서 부자의 화려한 등불보다 가난하나 진실된 자의 등불 하나가 더 부처의 마음에 다가간다고 한 데서 유래한다. 그런데 요즘 절에서는 화려한 석등을 쌍으로 설치하는 것이 유행하고 있다. 경전에 맞지 않는 이런 현대식 쌍등을 볼 때면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이 조형적으로, 종교적으로얼마나 뛰어난 명작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P158
우리나라 석조문화재 중 조각이 가장 화려하고 정교한 것을 꼽자면 단연코화순 쌍봉사의 철감선사탑(국보 제57호)과 탑비(보물 제170호)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철감선사 도윤道允(798~868)은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쌍봉사에서 선종을 크게 전파하여 제자인 징효가 영월에 법흥사 사자산문을 열어 구산선문의 하나가 되었으니 하대신라에서 그의 위상을 능히 알만하다.
철감선사탑은 우리나라 승탑의 백미로 기단에서 지붕돌까지 단단한 화강석을 마치 밀가루 반죽을 다루어 만든 것처럼 뛰어난 조각 솜씨를 보여준다. 아래기단엔 뭉게구름 위에 여덟 마리 사자가 웅크리고 앉아 이 탑을 수호하고, 겹꽃연꽃받침에 상다리 모양의 손잡이가 돌려진 위 기단에는 춤추고 악기를 연주하며탑을 찬양하는 극락조들이 새겨졌다.- P166
팔각당 몸돌 앞뒤로는 자물쇠가 잠긴 문짝과 사천왕 네 분 그리고 비천 한쌍이 조각되어 여기에 사리를 모셨고 이를 엄히 지키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는데이 모든 조각들이 아주 높은 돋을새김이어서 마치 돌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사실성을 보여준다. 거기에 암수 골기와지붕의 겹처마 서까래와 연꽃무늬 수막새들 진짜 기와지붕처럼 정교하게 조각해 올려놓았다. 그 엄청난 세공이 놀랍기만하여 우리나라에도 이런 정교한 작품이 있었던가 하는 감탄이 절로 일어난다.
곁에 있는 탑비는 비록 비석 자체는 잃었지만 돌거북받침과 용머리지붕돌 또한 당대의 명작이다. 여의주를 입에 물고 있는 돌거북의 네발을 보면 발톱으로 대지를 굳게 디디고 있는 모습인데 그중 오른쪽 앞발은 발바닥을 살짝 들어 올려 생동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런 훌륭한 조각은 석공 한 사람의 솜씨가 뛰어나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9세기 후반 50년간엔 쌍봉사 이외에도 보림사 · 연곡사·태안사·실상사·고달사·선림원 봉암사 등에서 팔각당 사리탑의 명작들이 누가누가 잘하나 경쟁하듯 세워졌다. 하대신라 선종의 활기와 이를 지원한 지방 호족의 문화 능력이 강했기에 이아름다운 승탑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P166
본래 승탑은 스님의 이름과 함께 고유명사가 된다. 연곡사 북부도는 ‘현각선사탑‘이고 연곡사 서부도는 ‘소요대사탑‘이라고 해야 맞다. 탑과 탑비에도 명백히 그렇게 적혀 있다. 다만 연곡사 동부도는 어느 스님인지 알 수 없으니 그냥 ‘연곡사 승탑‘이라고 하면 된다.
연곡사 승탑은 하대신라의 전형적인 팔각당 사리탑으로 형태미가 아주 날렵하다. 몸체의 위쪽이 약간 좁아져 경쾌한 상승감이 일어나고 살짝 들린 지붕돌 처마선의 맵시는 교태스러울 정도다. 혹자는 여기서 미니스커트를 입은 젊은 미인을연상케 하기도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조각장식은 더없이 다양하고도 정교하다.
받침대에는 사자 여덟 마리, 몸체에는 사천왕 넷, 문짝 둘, 사리함 둘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졌고 몸체의 굄돌에는 신비로운 극락조가 날고 있다. 승탑 바로 곁에 있는 비석받침돌의 돌거북과 용머리지붕돌의 조각 솜씨 또한 생동감으로 넘친다.
그러나 비석이 사라져 어느 스님의 사리탑인지 모른다는 것은 한국 미술사와불교사의 큰 아쉬움이다. 곡성 태안사의 혜철스님 사리탑과 비슷한 면이 있어 그의 제자로 풍수에 밝았다는 도선국사의 사리탑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하지만 도선은 광양 옥룡사에서 입적하였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이 주장을 내세우고 있지는못하고 있다. 누구일까? 이 아름다운 사리탑의 주인공은.- P168
명작의 조건 중 하나는 몇 번을 보아도 볼 때마다 깊은 감동이 있고, 일부러라도 그것을 찾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런 명작 중 하나가 강릉 굴산사堀山寺터 당간지주이다. 드넓은 논 한가운데 버티듯 서 있는 5.4m의 육중한 돌기둥한 쌍이 그렇게 감동적일 수 없다. 이런 것이야말로 설치미술이다. 당간지주란 절집에서 당幢(깃발)을 걸기 위한 간竿(장대)을 지탱해주는 지주대로 쉽게 말하면 절기게양대 같은 것이다. 마주 보는 두 당간 허리에 구멍이 뚫려 있고 윗부분이 파인 것은 당을 고정시키기 위해 가로지르는 봉을 끼우기 위한 것이다.
통일신라의 당간지주들은 대부분 돌기둥을 곱게 다듬고 윤곽선을 단정하게새긴 것이지만 굴산사터 당간지주만은 우람한 자연석에 최소한의 인공을 가하면서정으로 쏜 자국을 그대로 남겨두어 자연스러운 형태미와 돌의 질감이 살아 있다. 현대조각에서나 볼 수 있는 텍스추어와 마티에르의 조형감각이 하대신라인 9세기에 구현되었다는 것이 놀랍다.- P170
당간 자체는 사라졌지만 당간지주 높이가 5.4m라면 당간은 20m 이상 올려야 비례가 맞다. 계룡산 갑사 당간의 예에 비추어보면 아마도 지름 50cm, 높이Im 정도의 철통을 20여 개 이어 붙여 세웠을 것 같다. 꼭대기 깃발을 올리는 도르래 장치는 연꽃봉오리 또는 용머리 조각을 장식했을 것이다. 이 거대한 당간에아름다운 깃발이 휘날리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굴산사의 위용을 가히 짐작할 수있다.
굴산사는 하대신라 구산선문 중 하나로 범일(810~889) 국사가 851년에개창한 절이다. 범일국사는 태어날 때부터 행적이 기이하고 도력이 높아 많은 전설을 낳았는데 세상을 떠난 뒤에는 대관령 서낭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된 강릉단오제는 대관령의 범일 국사 사당에 제사를지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당간지주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넓은 논 한가운데 있었다. 그때는 폐사지의 정취와 함께 역사적 상상력이 물씬일어났다. 그런데 요즘 길도 넓게 내고, 주변을 정비하고 나서는 오히려 그런 맛을잃었다. 유적지 보존에 환경적 고려가 절실히 요청되는 대목이다.- P170
첨성대의 형태는 신라 도기에서 기대라고 불리는 받침대 모습으로 하늘을 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구조의 상징성을 보면 아래는 네모지고 위가 둥근 것은천원지방地方을 뜻하며 첨성대를 이루는 돌을 어디까지 세느냐에 다르지만총 360개에서 362개가 되니 이는 1년을 상징한다. 돌을 쌓은 27단과 기단부를합하면 28단으로 별자리의 28수와 통하고, 거기에 2단으로 된 정자석까지 합하면 30단이 되어 한 달 길이에 해당한다. 가운데 난 창문을 기준으로 아래위가각기 12단으로 나누어지니 이는 1년 12달과 24절기를 의미한다.
얼마나 절묘한 구조인가. 형태는 얼마나 아담하고 곡선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첨성대는 맨 위 정자석의 길이가 기단부의 꼭 절반일 정도로 치밀히 설계된 것이다. 이런 상징성을 염두에 두고 첨성대를 바라보면 신라인의 과학과 수학과 예술에 절로 존경심이 일어난다.- P172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않으면 폐하게 됨은 필연의 이치입니다." 이렇게 서두를 꺼낸 정도전은 이어 <서경>의 말을 이끌어 부지런함의 미덕을 강조하고 그 역사적 사례들을 제시하였다. 그러고 나서 뼈 있는충언을 덧붙였다. "그러나 임금으로서 오직 부지런해야 하는 것만 알고 무엇에 부지런해야 하는지를 모르면 부지런하다는 것이 오히려 번거롭고 까다로움에 흘러보잘것없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정도전은 옛 현인의 자세를 이끌어 이렇게 충고했다. "아침엔 정무를 보고, 낮에는 사람을 만나보고, 저녁에는 지시할 사항을 다듬고, 밤에는 몸을 편안히 하여야 하나니, 이것이 임금의 부지런함입니다." 쉴 땐 쉬는 것이 부지런함의 하나라는 것이다. 얼마나 멋진 충고인가. 그리고도 무엇인가 못 미더웠던지 정도전은 한마디를 더했다. 부디 어진 이를 찾는 데 부지런하시고, 어진 이를 쓰는 데는 빨리 하십시오" 근정전에는 그런 깊은 뜻이 서려 있다.- P174
사실 그동안 봉정사 대웅전은 바로 곁에 있는 국보 제15호 극락전 건물이 워낙에 명품이어서 상대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봉정사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으로 추정될 뿐만 아니라 주심포 맞배지붕집의진수인 단아한 절제미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국보와 보물의 차이 때문에 더 그렇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봉정사 대웅전에서는 다포계 팔작지붕집의 웅장한 힘과 멋이 넘쳐난다. 전각내부도 화려한 가운데 경건하다. 불상 머리 위를 화려하게 치장한 보개와 그주위에 설치된 용과 봉황의 조각도 일품이다. 한마디로 봉정사 극락전과 대웅전은 추구하는 미학 자체가 다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유산을 보는 우리의 눈은 지정 등급으로부터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봉정사 요사채 뒤편에 있는 영산암은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까닭은)을 찍은 곳으로 전통건축에서 마당이 지닌 미학을 환상적으로 구현한 곳이지만 겨우(?) 경상북도 민속자료(제126호)에 불과하다. 그러나 현대 건축가들은 봉정사 답사의 하이라이트를 국보, 보물보다도 오히려 지방문화재인 영산암으로 삼곤 한다.- P200
서양의 동양 미술사 전공자들이 한국 미술을 보는 시각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중국과 일본에 비해 떨어지는 마이너리그라고 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중국과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또 다른 미학을 갖고 있다는 견해다.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에서 동양미술부 수석큐레이터로 30여 년간 근무했던 마이클 커닝햄은 한국 미술의 절대적 지지자 중 한 분이다. 그는 대학에서 동양미술사를 전공하고 박물관에 들어온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미술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고 한다. 책이나 도록도 적었고 미국 박물관에 유물이 많은 것도 아니어서 별로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한국 미술에 눈을 뜨게 된 것은 1979년부터 3년간 미국 주요 미술관을 순회 전시한 ‘한국 미술 5천년전‘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동양 미술 세계의 새로운 발견 같은충격이었다고 했다.- P250
20년 전 클리블랜드미술관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유물창고에서 <버드나무와 제비>라는 무낙관 그림을 꺼내와 보여주었는데 아주 멋있는 그림이었다. 종이와 먹을 보면 17세기로 판명되는데 국적은 알아보기 힘들었다. 일본 그림은 분명 아니었다. 버드나무의 스스럼없는 필치는 조선식이고 떼 지어 나는 제비들에는 중국 냄새가 있었다. 한국 회화사가 전공인 나는 명나라 그림 같다고 했는데 동양미술사가 전공인 그는 조선 그림으로 보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이렇게 설명했다. 늙은 버드나무는 자기 머리 위에 돌출된 바위가 있는 줄 모르고 위로 자라다가 절벽에 받혀 다치기를 수없이 반복한 다음 결국 옆으로 방향을 바꾸어 이처럼 상처 입은 고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새봄이 되자 싱싱한 가지를 맘껏 뻗으면서 흐드러진 아름다움을 자랑하는데 수십 마리의 제비가 나무의 생장과 봄을 축하하는 화려한 비행 축제를 벌이고 있는 그림이라면서 이런 여유로운 내용과 유머를 그는 중국 그림에선 본적이 없다면서 그 은근한 멋을 고려하면 조선 그림일 수밖에 없다고 단정 지었다.
나는 그에게 ‘졌다You win‘고 하고 내 주장을 거두어들였다.-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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