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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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나는 일 년에 몇 번은 경주에 다녀온다. 대개 강연이 있어 오는데, 묵어갈 때면 즐겨 봉황대를 찾아 가까이 있는 단골집에서 갈치조림찌개로 저녁을 먹고 노동동·노서동에서 산보를 즐기다 숙소로 돌아가곤 한다.
어느 때 간들 마다하냐마는 늦가을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봉분위의 잔디가 누렇게 물들 때면 처연한 분위기가 절로 일어나는데 해질녘이 되어 노을이 짙게 물들 때면 노년의 황혼에 깃드는 스산한 서정의 울림이 있다. 특히나 해가 긴 여름날 경주에 답사 올 때면 시내에서 맛있는 토속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땅거미가질 때부터 어둠이 내릴 때까지 고분과 고분 사이를 거니는 것은 내 답사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추억들이다.- P194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지 않겠는가? 내가 하늘 떠받칠 기둥을 깎아주리.


태종무열왕은 그 뜻을 이해하고 원효를 요석공주와 연결시켜주려고 신하에게 그를 찾아 요석궁으로 데려가라고 했다. 신하는 문천 다리를 지나는 원효를 발견하고서 다리 아래로 밀어 물에 빠뜨리고는 젖은 옷을 말려준다는 구실로 요석궁으로 데려갔다(혹은 원효가 일부러 직접 뛰어내렸다고도 한다).
옷을 말리러 요석궁으로 들어간 원효는 결국 사흘간 머물면서 요석공주와 열렬한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그때 원효는 나이 마흔 전후이고 요석공주는 20대의 청상과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들이 설총(薛聰)이고 그렇게 파계한 원효는 더욱 낮은 곳으로 내려가 민중 속에서 불교를 설파하며 무애(無碍)의 경지로 나아갔다.- P255
가야는 1세기 전후부터 6세기 중엽까지 우리나라 고대국가형성기에 낙동강 유역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갖고 있던 미완의왕국이다. 가야는 문헌에 따라 가야(加耶, 伽耶, 伽倻), 가라(加羅), 가락(駕洛), 임나(任那) 등 여러 명칭으로 나오는데 변한의 12개소국 중 김해의 가락국(駕洛國)이 맹주로 등장하면서 느슨한 연맹체제로 개편되기 시작하여 300년 무렵에는 김해 금관(金官)가야, 함안 아라(阿羅)가야, 고령 대(大)가야, 고성 소(小)가야, 상주 고령(古寧)가야, 성주 성산(星山)가야 등 6가야로 퍼져 있었다. 우리가 삼국시대라고 부르는 시기는 사실상 삼국에 가야까지 더한 사국시대였다.- P261
우리는 비화가야의 옛 터를 찾아 창녕을 답사하지만 창녕의 명소는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최대의 자연 습지인 우포늪(천연기념물 제524호)이다. 우포늪은 둘레 7.5킬로미터, 전체 면적은 340만 제곱미터로 3개 면에 걸쳐 있다. 이곳에 습지가 처음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약 1억 4,000만 년 전 공룡이 살았던 중생대 백악기다. 당시에 해수면이 급격히 상승하면서 낙동강 유역의 지반이 내려앉아 낙동강으로 흘러들던 물이 고이게 되면서 곳곳에 습지와 자연 호수가 생겨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우포늪에는 공룡 발자국화석도 남아 있다.
우포늪은 장마철에는 수심이 5미터에 이르기도 하지만 평소에는 1~2미터를 유지한다. 늪의 바닥이 두꺼워서 ‘생태계의 고문서‘라 불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습지로, 2008년에는 환경 올- P266
림픽 격인 람사르 총회가 여기서 열렸고 2018년에 처음으로 람사르 습지도시를 선정할 때 습지도시로 인정받았다.
현재 우포늪 일대에는 800여 종의 식물이 분포하며, 건강한수생 생태계를 갖추고 있어 어류는 붕어, 잉어,가물치, 피라미 등28종이 서식하고 있고, 조류는 논병아리 등 텃새와 천연기념물인 노랑부리저어새, 큰고니를 비롯하여 청둥오리, 쇠오리, 기러기등 약 200종이 있다. 1970년대 이후 국내에서 멸종된 따오기를 중국에서 4마리 데려와 복원사업을 진행하여 현재 359마리를자연 복귀 시키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우포늪은 실로 ‘살아 있는 자연사박물관‘ 이라고 할 만하다.- P267
창녕의 가야시대 이전 선사시대 유적지로는 비봉리 패총이 유명하다. 이 패총은 2003년 태풍 매미로 붕괴된 배수시설을 복구하는 과정에 발견된 신석기시대 유적이다. 여기에서는 패총과 함께 빗살무늬토기, 무문토기 등 각종 토기가 출토되었고, 저장공에서 도토리, 가래, 솔방울 등 식물과 잉어, 멧돼지 등 동물 뼈가 나와 2007년 국가사적 제486호로 지정되었다.
비봉리 패총은 무엇보다도 내륙에 남아 있는 유일한 조개더미일 뿐 아니라, 신석기시대 모든 기간의 유물이 층위별로 나타나각 층에서 출토된 토기를 중심으로 유적의 연대를 설정하기 좋은귀중한 신석기시대 유적이다.
특히 여기서는 소나무를 유(U)자형으로 파내어 만든 통배(丸木舟)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한반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배다. 이것과 함께 출토된 망태기는 두 가닥의 날줄로 씨줄을 꼬는 ‘꼬아뜨기 기법‘으로 만들어져 있어 신석기시대의 편물(物)기술을 알려준다. 여기서 출토된 도토리, 목재, 조개껍데기 등에서 채취한 시료를 가속질량분석기(AMS)로 측정한 결과 시기가 7,700년 전부터 3,500년 전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P268
성을 쌓은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전설로는 비화가야 시절로 올라가고 기록으로는 조선 태종 10년(1410) 경상도.
전라도에 중요한 산성을 수축했다는 실록의 기록에 화왕산성이나온다. 그리고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아주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화왕산 석성은 둘레가 1,217보()이고 그 안에 샘이 아홉, 못이 셋 있으며 또 군창(軍倉)도 있었다.
전란에 대비해 쌓은 산성은 50년, 100년이 가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서는 "화왕산 고성은 석축 산성으로 둘레가 5,983척(尺)이나지금은 폐성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강화 교섭이 한창 진행되는 동안 전쟁은 소강상태였고, 일본군이 동래·울산·거제 등 해안에 장기 주둔하다가 교섭이 결렬되자 1597년 다시 쳐들어온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당시 경상좌도방어사로 있던 홍의장군 곽재우(郭再)는 밀양·영산·창녕 현풍 네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화왕산성을 수축하고 왜군을 기다렸다가 대파했다.
그 뒤로 화왕산성은 다시 산성으로 사용된 일이 없고, 지금은9개의 샘도 사라지고 무너진 석성의 잔편만 남았지만 역사의 유적이 되어 답사객과 등산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P293
지난번 창녕 답사 때 나는 이도 저도 아니고 장마면의 유리 고인돌로 향했다. 유리 고인돌은 내 경험상 우리나라 남방식 고인돌 중에서 가장 믿음직하게 생겼다. 여기에는 본래 7기가 있었다지만 다 없어지고 오직 한 기만 언덕바지에 빈 하늘을 배경으로버티듯 서 있어 좀 외로워 보이긴 해도 오히려 홀로 우뚝한 데서장중한 기품이 느껴진다.
높이는 사람 키보다 훨씬 큰 2.5미터고 폭이 5미터가 넘으니수치만으로도 장대함을 알 수 있을 것인데 생김새가 꼭 메줏덩이 같아서 아주 듬직하고 순박한 인상을 준다. 그냥 자연석을 올려놓은 것이 아니라 바둑판 발처럼 낮은 받침을 고였다. 그 받침돌로 인하여 설치 조형물로서 고인돌의 의미가 진하게 다가온다.
그것이 바로 예술이다.- P311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자 유족과 장의위원회에서 내게 고인의 비석과 안장 시설을 맡아달라고 의뢰해왔을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이 유리 고인돌이었다. 저 메줏덩이 같은 고인돌 하나 얹어놓고 ‘대통령 노무현‘ 6자만 새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생긴 자연석을 구하기 쉽지 않아 설계를 맡은 건축가 승효상은 메줏덩이처럼 생긴 고인돌 대신 둥글넓적 맷방석만 한 너럭바위로 대신했다.
그런데 다시 보아도 유리 고인돌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이미- P311
지와 잘 맞는다. 메줏덩이 같던 순박한 심성과 언덕바지에 외로이 우뚝 선 그 당당한 모습이 절로 고인의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그분이 아니라 해도 저 유리 고인돌 같은 인생을 산 사람이라면 뭇 사람의 사랑을 받는 훌륭한 분임에 틀림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는 유리 고인돌에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P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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