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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그러나 모든 고대 국가는 다 쇠망의 역사를 갖고 있다. 삼천궁녀의 투신이라는 ‘가짜 뉴스‘에 귀를 버리지 말고 부소산 백마강변의 이 평온한 정취를 있는 그대로 보면서 불어오는 강바람에 잠시 번잡한 일상을 흘려 보내고 국토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일이다.- P71
실제로 낙화암 절벽을 끼고 유유히 흘러가는 백마강 물줄기와강 건너 키 큰 미루나무가 줄지어 달리는 규암 들판의 평온한 풍광은 있는 그대로가 완벽한 구도를 보여주는 한 폭의 산수화다. 그래서 청전 이상범, 심산 노수현, 운보 김기창, 남농 허건, 고암이응노, 취봉 이종원, 소송 김정현, 검돌 이호신 등 많은 수묵화의대가들이 그린 이곳의 실경산수화가 거의 똑같은 구도를 취하고있으며, 유화로도 좋은 소재여서 이종구의 「낙화암」 같은 풍경화가 나왔다.
유람선을 타고 지나가다 절벽에 보이는 ‘낙화암(落花巖)‘이라는붉은색 암각 글씨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글씨라고 한다.
부여에는 우암의 커다란 암각 글씨가 또 하나 전하고 있는데 그것은 강 건너 규암면의 대재각에 있다. 대재각은 낙화암에 버금가는 백마강의 명소로, 부여 답사 때 여러 번 낙화암 대신 대재각을 답사 코스로 잡았다.- P72
악수논정(握手論情)이란 손잡고 정을 나누자는 뜻이다. 백제의역사는 그렇게 끝났고 백제의 후손들은 지금도 해마다 유왕산에서 ‘악수논정‘하고 있다.
유왕정에서 바라보는 백마강은 참으로 유장하다. 상류 쪽을 바라보니 들판이 아득하게 펼쳐지고 하구 쪽을 바라보니 강물은 하염없이 흘러간다. 그 물길 따라 끌려간 의자왕과 백성들을 생각하자니 절로 비장감이 감도는데 유왕산을 내려오는 돌계단 양쪽에는 새빨간 무릇꽃이 그리움에 지친 듯 피어 있어 사람의 심사를 애잔한 서정으로 젖어들게 한다.- P105
그렇다고 해서 경주 시내에 신라 고분이 155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봉분이 남아 있는 고분에 붙인 것만 그렇다는 것이고 이 일대에는 무수히 많은 고분들이 더 있었다. 이를테면 미추왕릉지구라 불리던 곳을 오늘날의 대릉원으로 조성하기 위하여 계림로, 월성로 일대를 발굴 정비할 때는 대학박물관 발굴단들을 총동원하여 수백 기의 고분을 발굴했다. 모두 합하면 대략 1천 기에 달했다.
이처럼 경주 시내 신라 고분은 구역이 여럿으로 나뉘어 있지만 문화재청은 2011년, 이를 하나로 통합하여 ‘경주 대릉원 일원‘(사적 제512호)으로 재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P119
"나는 신라 고분 답사라고 해서 옛날에 대릉원에 가서 천마총속을 구경한 것만 생각하고 무엇 때문에 한나절을 여기서 다 보내나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네. 고분이 이렇게 많고이렇게 거대하고 이렇게 시내 깊숙이 있는 줄 처음 알았네. 이게마립간 시기 무덤들이라고? 왜 그런 사실을 이제 알고 무턱대고신라왕릉이라고 기억하고 있었지?
그리고 금관총 전시관에서 적석목곽분을 조성할 때 비계를 쌓은 걸 보면서 저렇게 했기 때문에 1천 5백 년을 버텨온 것이라는감동을 받았네. 자네가 신라 고분 답사는 봉황대로 가서 금관총부터 보아야 한다고 한 이유를 이제 충분히 알았네. 고마우이."

그러나 이는 신라 고분 답사라는 심포니의 제1악장 안단테에 불과하다. 나의 신라 고분 이야기는 제2악장 아다지오(금령총과서봉총), 제3악장 프레스토(천마총과 황남대총), 그리고 제4악장 라르고(계림과 월정교)로 이어질 것이다.- P152
1921년, 금관총에서 금관이 발굴된 것은 ‘황금의 나라, 신라‘로 나아가는 우렁찬 팡파르였다. 1,500년 전 신라에 이런 순금 관(冠)이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고, 1만여점의 유물이 3만 점의 구슬과 함께 쏟아져 나온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첫걸음에 불과했다. 이어 3년 뒤 1924년에 금령총에서 아름다운 금방울과 함께 금관이 발견되었고, 1926년엔 서봉총에서 또 금관이 나왔다. 5년 사이에 신라 금관 셋이 출토된것이었다.
당시는 이 금관들을 의심의 여지없이 신라 왕관으로 생각했다.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일제가 신라 고분에 관심을 갖고 적- P155
극 발굴에 나선 것은 일본이 옛날부터 한반도를 지배해온 역사가있다는 식민사관의 근거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발굴하면 할수록 신라는 일본 역사에서는 볼 수 없는독특한 문화를 갖고 있었고, 그것이 상상 이상으로 찬란하고 위대했음을 이 유물들이 웅변했다. 아무리 역사를 조작해 왜곡하려해도 유물이 말해주는 것을 속일 수 없다. 그들로서는 큰 딜레마가 아닐 수 없었다.
문화재 분야에서 일본 제국주의 식민사관의 맨 앞장에 선사람은 세키노 다다시였다. 그는 평양에서 낙랑 고분 발굴을 주도했- P156
고, 저 방대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전15권의 책임편집자였다. 금관총 발굴 유물도 결국 총독부에서 그를 파견하여 뒷수습시킨 것이었다. 그는 1929년에 조선의 건축과 미술』, 1932년엔 「조선미술사』를 펴낸 학자였다. 이 『조선미술사』는 독일인 신부 안드레아스 에카르트(Andreas Eckardt)가 1929년에 독일어와영어로 동시에 펴낸 『조선미술사』에 이은 두 번째 한국미술사통사다.
우리의 입장과는 관계없이 일본인들에게 세키노 다다시는 이른바 대정(大正, 다이쇼) 연간의 문예부흥기,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뛰어난 학자 중 하나로 꼽힌다. 일본인들은 존경하는분의 이름을 부를 때는 훈독이 아니라 음독하는 문화가 있다. 그래서 당시엔 그를 세키노 ‘다다시‘라고 하지 않고 세키노 ‘데이‘
라고 불렀다(이런 ‘유식자 읽기(有)‘는 잘못된 것이라는 견해도있다).- P157
확실히 세키노 다다시에게는 아름다움의 특질을 바로 잡아낼수 있는 미적 안목이 있었다. 그는 경주의 신라 고분을 조사하러다니던 중 태종무열왕릉의 돌거북이 받침돌과 용머리 지붕돌을 보고는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자신이 중국에서 보아온 것을 포함하여 가장 훌륭한 비석받침 조각이라고도 했다. 그의 정직한 눈으로 보건대 신라문화는 위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일제가 만들어가던 식민사관과 크게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이러한 내적 모순을 해결해야 했다. 그래- P157
서 주장한 것이 대륙(중국)의 영향을 계속 받은 반도적성격론과 조선 역사에서 문화가 점점 쇠퇴해간다는 ‘정체성(停滯性)‘이론이다. 그 요지는 「조선미술사』 총론에 명확히 밝혀져 있다.

통일신라시대는 조선 미술의 융성기다. 고려 시대는 그 전성기라 할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신라 예술의 연장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송나라와 원나라의 영향을 받았다. 신라의 것에 비하면 섬세하고 치밀한 면을 잃어버렸지만 우수한 것을 만들어냈다. 조선 시대는 미술의 쇠퇴기로 고려 시대의 양식을 계승하였으며, 다소 명나라의 영향도 받았다. 초기에는 상당히 볼만한 것이 만들어졌지만,- P158
후기에 들어 국가의 기운이 쇠퇴함에 따라 서서히 쇠락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세키노 다사시는 학자적 소신과 양심으로 조선시대 미술 중에는 ‘고유의 특질을 발휘한 것도 많다‘고 했다. 그러나 식민사관을 앞장서서 전개한 학자들은 조선시대에 들어 한반도 문화가 사대주의에 빠져 독자성을 잃고 당파싸움을 일삼으면서 문화는 피폐해지고 마침내 백성은 도탄에 빠졌는데 ‘다행히도‘ 이제 일본 황국의 도움을 받아 폐습을 청산하고 새로 문명을일으키게 되었다는 논지로 식민 지배를 정당화했다. 이는 당시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문화 행사와 발간물, 이를테면 조선미술전람회, 문화재 도록, 고미술 전시회 등에 등장하는 조선총독, 경무총감, 학무총감 등 고관들의 축사에 녹음기처럼 천편일률적으로 나오는 내용이다. 이런 논리라면 식민사관에 젖어 있다 하더라도 신라 금관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예찬해도 되는 것이었다.-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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