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유물을 낳고
유물은 역사를 증언한다.
2023년 초겨울
유홍준
답사 당일 아침 10시까지 신청자들이 개별적으로 정림사지 주차장에 집결하면 나의 인솔과 해설을 받으며 부여의 유적지들을 두루 답사한 뒤 오후 5시에 다시 정림사지 주차장으로 돌아와 끝나는 당일 답사다. 초창기엔 버스 2대80명이었으나, 요즘은 인솔하기 버거워서 버스 1대 40명으로 인원을 제한하고 있다.
답사 코스는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국립부여박물관만이 기본이고 매번 다르다. 서쪽으로는 만수산 무량사, 반교마을 돌담길, 홍산 관아, 남쪽으로는 임천의 대조사와 장하리 석탑, 동쪽으로는 송국리 청동기시대 유적지와 능산리 백제왕릉 등이 주요 답사처다. 때로는 부여군을 벗어나 보령의 성주사지, 논산의 관촉사,
공주의 무령왕릉과 공산성, 서천 비인의 오층석탑, 익산 나바위성당까지 다녀오기도 한다.- P13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언제 어느 때 보아도 우아한 자태로 우리를 맞이한다. 책에서 사진으로 볼 때는 왜소한 인상을 주지만실물은 키가 훤칠하고 5층의 체감율이 단아한 비례감을 자아내어 백제 미술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백제의 마지막 왕도 사비성의 존재를 증언해주는 가장 확실한 유물이자 백제의 아름다움을 실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다시 말해서 정림사지 오층석탑이있기에 부여가 고도로서 존재감을 갖고 백제의 미학이 살아나는 것이다.- P16
이 향로의 발견으로 우리는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顧 華而不侈)‘의 미학을 지녔다는 백제 아름다움의 진수를 만날 수 있다. 실로 위대한 발견이었다.
이 향로는 높이 61.8센티미터, 무게는 11.85킬로그램이나 되는대작으로 다른 향로들과 비교할 때 부피가 2배 가까이 된다. 향로의 구조는 받침, 몸체, 뚜껑 3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뚜껑이 닫힌 상태에서 보면 용의 입에서 탐스러운 꽃봉오리를 분출하는 듯한데, 맨 위에 봉황이 올라앉아 있는 3단 구조다. 이 향로는 기본적으로 한나라 때부터 유행한 박산향로(博山香爐)의 형식을 따른 것이다. 중국의 박산향로는 대개 바다를 상징하는 승반(承盤) 위에 박산을 상징하는 중첩된 산봉우리가 얹혀 있는 모습이다. 박산은 중국의 동쪽바다 한가운데 불로장생의 신선이 살았다는 이상향으로 봉래산, 영주산, 방장산 등 삼신산을 말한다.- P46
백제금동대향로는 이런 도교적인 상징성을 갖는 박산향로에불교적 이미지인 연꽃을 결합시키면서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형식을 구현한 것이다. 받침대의 용은 힘껏 용틀임하면서 치솟아오르는 강한 동세를 보여주며, 뚜껑 꼭지의 봉황은 부리와 목사이에 구슬을 끼고 있는 상태에서 날갯짓을 하기 위해 꼬리를 한껏 치켜 올린 모습이다.
이에 반해 몸체와 뚜껑으로 이루어진 꽃봉오리는 풍만하면서도 팽팽한 입체감이 넘친다. 이처럼 받침대와 몸체는 동(動)과정(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데, 뚜껑에는 신선의 세계를 나타내- P46
는 무수한 그림이 새겨져 있다. 여기에 나오는 도상은 백제인의관념 속에 있는 신선 세계를 형상화한 것으로, 영원불멸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담겨 있는 것이다.
‘명작은 디테일이 아름답다‘라는 명제를 이 백제금동대향로만큼 잘 보여주는 것이 없다. 나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추사(秋史)김정희는 명작 감상을 할 때는 ‘금강역사의 부릅뜬 눈으로, 혹독한 세리(稅吏)의 손끝처럼 치밀하게‘ 보아야 그 진수를 알아차릴 수 있다고 했다고, 홈런 타자가 공을 끝까지 보듯이 작품의 구석구석을 끝까지 보라고 하면서, 내가 말하는 대로 백제금동대향로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살펴보라고 했다. 보면 다 보일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조용히 낱낱 도상을 읽으며 답사객들의 눈을 이끌었다.- P48
위덕왕 재위기는 진실로 백제문화의 전성기였다. 지금 나성에서 떠올리는 유적과 유물 외에 ‘백제의 미소‘로 칭송받는 ‘서산마애삼존불‘, ‘미스 백제‘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규암 출토 금동보살입상‘, 비록 국적과 시대가 명확지 않지만 저 유명한 ‘금동미륵반가사유상‘ 등이 6세기 후반 백제 미술로 추정되고 있으니 이 모두가 위덕왕 때 유물이다.
그럼에도 백제의 이미지를 말할 때면 멸망할 때의 의자왕을- P58
먼저 기억하고 위덕왕 시대의 백제문화 전성기에 대해서는 말이없다. 이는 그동안 우리가 역사를 연대기로 나열하면서 전란과정변을 중심으로 한 정치·전쟁사, 비유컨대 ‘사건 및 사고의 역사‘에만 치중하고 문화사로 익히지 않았던 병폐라고 생각한다.
내가 부여로 내려가 지금까지 50회에 걸쳐 봄가을로 백제문화답사를 이끌어온 것은 백제문화의 꽃과 영광을 온 국민에게 전도하고자 함이었다. 실로 이런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남겨준 위덕왕치세의 백제인들에게 보내는 감사와 존경의 마음이 그지없다.
나의 느린 걸음을 앞질러 나성을 내려간 답사객들은 김인권국장의 인솔 아래 능사 터 옆으로 길게 난 긴 도랑의 다리 옆에모여 나의 다음 설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는 그 옛날 나무다리가 있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유구와 목재가 발견되었다. 이를 토대로 이 도랑과 다리를 복원한 것이다. 평범해 보이지만 이것이 있음으로써 능사 터는 더욱 진정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항시 시간을 체크하며 늦을까봐 마음 졸이는 이미영 팀장이12시가 다 되어간다고 했다. 우리는 서둘러 부여 왕릉원 주차장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점심식사를 위하여 관북리 유적지와 부소산이 훤히 바라다보이는 향우정 식당을 향해 떠났다.- P59
명작은 명작을 낳는다고 백제금동대향로를 주제로 무수한 사진 작품과 도록이 발간되었고, 이를 소재로 한 단독 저서(서정록『백제금동대향로』, 학고재 2001)도 나왔으며, 방송국의 역사 프로그램의 단골 주제로 이 향로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중 내게 가장 감동적인 프로그램은 대전방송(TJB)에서 향로의 악사 5명이 들고있는 악기를 재현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국악 연구자들은 봉황의 바로 밑에 위치한 악사부터 짧은 피리는 ‘배소‘, 긴 피리는 ‘종적(縱)‘, 기타비슷한 악기는 ‘완함‘, 그 왼쪽은 북, 다시 그 왼쪽은 거문고로 고증했다. 그리고 이 악기들을 인간문화재가 직접 만들었고,
국립국악원의 연주자가 백제 「산유화가」에 맞추어 연주했다. 지금은 유튜브로 모든 게 다 검색되어 이 글을 쓰기 전에 다시 한번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P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