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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




망자가 으레 그러하듯 고인 역시 죽은 사람답게 각별하게 묵직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뻣뻣하게 굳은 팔다리는천에 감긴 채 관속에 푹 잠겨 있었고, 영원히 들지 못할 머리는 베개에 뉘여 있었다. 훤하게 드러난 누런 밀랍빛 이마와 움푹 꺼진 관자놀이, 윗입술을 내리누를 듯이 위로우뚝 솟아오른 코 역시 죽은 사람다웠다. 바싹 야윈 고인의 외관은 뾰뜨르 이바노비치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많이 달라 보였다. 그러나 죽은 사람의 얼굴이 으레 그러하듯 이반 일리치의 얼굴은 살아 있을 때보다 한결 잘생겨보였고 무엇보다도 훨씬 더 의미심장해 보였다. 그의 얼굴은 마치 해야 할 일을 다 했고 또 제대로 했다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표정에는 산자를 향한 모종의 비난과 경고까지 담겨 있었다. 뾰뜨르 이바노비치에게는 그러한 경고가 부적절한 것으로, 적어도 자신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 P13
이반 일리치의 가족은 모두 건강했다. 이따금 이반 일리치가 입에서 이상한 맛이 느껴지고 왼쪽 옆구리가 왠지 좀불편한 것 같다고 말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걸 병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거북한 느낌은 점점 심해졌다. 통증까지는 아니더라도, 옆구리가 묵직해진 느낌이 사라지지 않아 여간불쾌한 게 아니었다. 이반 일리치의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어 골로빈 가족이 즐기던 편안하고 유쾌하며 고상한 삶의 분위기를 망치기 시작했다. 남편과 아내는 더 자주 다투기 시작했고, 곧 이들 가족이 누리던 가벼움과 유쾌함은사라지고 품위만 간신히 유지되었다. 예전 같은 장면들이다시 반복되었다. 남편과 아내가 폭발하지 않고 잠시 쉬어갈수 있는 작은 섬들이 다시 떠오르곤 했지만 그 섬의 수는 아주 적었다.- P51
 맹장이 낫고 있었다. 흡입 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묵직하면서도 쿡쿡 찌르는 듯한 통증, 저 익숙하고 오래되고집요하고 조용하고 지독한 통증이 찾아왔다. 입안에서는예의 그 익숙한 역겨운 맛이 다시 느껴졌다. 심장이 조여들고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오, 맙소사, 하느님, 맙소사!>그는 중얼거렸다. 또, 또 시작이야, 절대로 끝나지 않을 거야. 그러자 갑자기 문제가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맹장? 신장?> 그는 혼잣말을 했다. <이건 맹장문제도 아니고 신장 문제도 아니야. 이건 삶, 그리고...... 죽음의 문제야. 그래, 삶이 바로 여기에 있었는데 자꾸만 도망가고있어. 나는 그걸 붙잡아둘 수가 없어. 그래. 뭣 하러나를 속여? 나만 빼고 모두들 내가 죽어 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남은 시간이 몇 주냐, 며칠이냐, 그것만이 문제야.
어쩌면 지금 당장일 수도 있어. 빛이 있었지만 이제 캄캄- P69
한 어둠뿐이야. 나도 여기 있었지만, 곧 그리로 가겠지! 그런데 그게 어디지?>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고 숨이 멎었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는 소리만 들렸다.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지? 아무것도 없다는 건가? 내가 없어진다면 나는 어디에 있게되는 거지? 정말 죽는 걸까? 안 돼, 싫어.> 그는 벌떡 일어나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여기저기 더듬으며 초를 찾다가 초와 촛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는 다시 베게 위로벌렁 드러누웠다. <불은 켜면 뭐해? 다 마찬가진걸> 두눈을 부릅뜨고 어둠을 응시하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죽음, 그래, 죽음, 저들은 아무도 몰라. 알고 싶어 하지도않아. 날 불쌍하게 여기지도 않아. 그냥 놀 따름이야(깔깔거리는 소리와 음악 소리가 문 너머에서 어렴풋이 들려왔다). 저들도 똑같아, 똑같이 죽게 될 거라고, 멍청이들, 내가 조금 먼저 가고, 저들은 조금 늦게 갈 뿐, 결국엔 다 마찬가지야. 그런데도 저렇게 좋을까, 짐승 같은 것들!> 울화가치밀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참을 수 없이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세상 모든 인간이 이토록 끔찍한 공포를 겪어야하는 운명을 타고났을 턱이 없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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