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잘 모르겠는데, 주드." 해럴드가 걱정스럽게 말한다.
"그냥 가요, 해럴드." 그가 말한다. "첫 번째 벤치까지만요"
맬컴은 집 뒤까지 숲을 터서 낸 길을 따라 벤치 세 개를 설치했다. 첫 번째는 호수를 끼고 도는 길 3분의 1지점에 있고, 두 번째는 딱 중간에, 세 번째는 3분의 2 지점에 있다. "천천히 가요.
지팡이도 가지고 가고요." 지팡이를 쓸 필요가 없어진 지는 수년이 흘렀지만 ㅡ10대 시절 이후로는 안 썼다 ㅡ이제는 50미터만 넘어도 지팡이가 필요하다. 결국 해럴드도 그러자고 하고, 그는 해럴드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스카프와 코트를 쥔다.
바깥에 나가자, 행복감이 더 고취된다. 그는 이 집이 좋다. 집의 모양이, 고요함이, 무엇보다 자기와 윌럼의 집이라는 게 좋다.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로 리스페너드 스트리트에서 멀어졌지만, 그 집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의 집, 함께 만들었고 함께 사는 집이다. 두 번째 다른 숲을 바라보고 있는 그 집은 일련의 유- P248
리 큐브로 이루어져 있고, 그 앞에는 숲을 통과해 지그재그로 들어오는 긴 진입로가 있어서 어떤 각도에서는 일부밖에 보이지 않고 다른 각도에서는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밤에 불을 켜면 온 집이 랜턴처럼 빛나서, 맬컴은 논문에서 이 집을 ‘랜턴 하우스‘라고 명명했다. 집 뒤쪽은 넓은 잔디밭을 내려다보고 있고, 그 너머에는 호수가 있다. 잔디밭 끝에는 슬레이트 판을 붙인수영장이 있어 무덥기 짝이 없는 날에도 물이 늘 시원하고 맑았고, 헛간에는 실내수영장과 거실이 있다. 헛간 벽은 다 들어 올려 치울 수 있게 되어 있어서 실내 전체가 야외로, 봄이면 주위에 온통 피어나는 모란과 라일락 덤불을 향해, 초여름에는 지붕에서 늘어지는 등나무 원추꽃차례를 향해 하나로 연결된다. 집오른편에는 7월이면 양귀비로 온통 빨갛게 물드는 들판이 있고, 왼편에는 윌럼과 함께 코스모스와 데이지, 디기탈리스, 야생당근 등 야생화 씨를 수천 개 뿌려놓은 들판이 있다. - P249
이사 온직후 어느 주말, 그들은 집 앞과 뒤의 숲을 돌아다니며 참나무와 느릅나무 주위 이끼 낀 둔덕 근처에는 은방울꽃을 심고, 사방에 박하 씨를 뿌렸다. 맬컴은 이런 식의 조경이 감상적이고진부하다고 찬성하지 않았고, 맬컴이 아마 옳을지도 모른다는걸 알았지만,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공기가 향기로운 봄과 여름이면, 그들은 호전적으로 추한 리스페너드 스트리트를 이런곳을 그려볼 시각적 상상력조차 없었던 자신들을 생각한다. 이곳에서 아름다움은 너무 단순하고 너무 명백해서 때로는 환영같았다.
그는 해럴드와 숲을 향해 출발한다. 숲의 험한 산책로는 공사가 시작됐을 때보다 훨씬 더 다니기 편해졌다. 그래도 그는 집중해야 한다. - P249
뒤이은 침묵 속에서 그는 자기가 해야 하는 말을, 늘 생각했지만 한 번도 하지 못했던 말을 생각하고 있다. "말도 안 되게들리리라는 거 아는데, "그가 입을 열자, 윌럼이 그를 쳐다본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난 여전히 내가불구라는 생각이 안 들어. 그러니까 내 말은, 불구인 건 알아. 그렇다는 건 안다고. 불구가 아니었던 시간보다 불구로 산 게 두 배는 더 되니까. 그게 네가 알아온 내 모습이지. 도움이 필요한 그런 사람으로. 하지만 내 기억 속엔 뛸 수 있었던 사람, 원할 때마다 걸을 수 있었던 사람이었던 내가 있어.
불구가 된 사람들은 다들 뭘 빼앗긴 것같이 생각할 거야. 하지만 난 늘 그랬어. 불구인 걸 인정해버리면, 트레일러 박사에게 패배를 인정하면, 그가 내 삶의 모습을 규정하게 만들어버릴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그래서 아닌 척하는 거야. 그 사람을 만나기 전의 나인 척하는 거야. 그게 논리적이지도, 실제적이지도않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게 이기적인 생각이라는 것도 알아. 미안해. 내가 아닌 척하고 있는 대가를 네가 치르고 있는 걸 알아. 그래서, 그만두려고." 그는 심호흡을 하고, 눈을 감았다 뜬다. "난 불구야." 그는 말한다. "난 장애인이야." 정말 바보 같지만, 울음이 터질 것 같다. 그는 결국 마흔일곱이고, 이걸 스스로 인정하는 데 32년이 걸렸다.- P253
그날 밤 야스민이 떠난 후, 그는 정말 오랜만에 팔을 긋는다. 그리고 피가 대리석을 따라 흘러 배수구로 들어가는 걸 지켜본다. 수도 없는 문제를 일으킨 이 다리를, 수많은 시간, 수많은돈, 수많은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이 다리를 그대로 가지고 가려는 게 얼마나 비합리적인 바람인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그건 그의 다리다. 그 자신이다. 어떻게 자신의 일부를 기꺼이 잘라낼 수 있겠는가? 수년에 걸쳐 이미 수많은 부분을 잘라왔다. 살, 피부, 흉터들을. 하지만 이건 왠지 다르다. 다리를희생하면 트레일러 박사가 이겼다는 걸 인정하는 게 될 것이다. 그에게, 그날 밤 그 들판, 그 차에 굴복하는 게 될 것이다.
이건 다르다. 일단 다리를 잃고 나면 더 이상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다시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언젠가는 더 나아질 거라고 기만할 수 없다. 불구가 아닌 척할 수 없다. 그의 기형쇼 점수는 또 한 번 올라갈 것이다. 언제나, 그 무엇보다도,- P258
자신이 잃은 것으로 정의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친다. 걷는 법을 또 배워야 하고 싶지 않다. 어차피 빠질 체중을 늘리려고 애쓰고 싶지 않다. 첫 번째 골수염때 빠진 몸무게도 힘들여 되돌려놨더니 두 번째 발병으로 다시다 잃었었다. 병원에 입원하고 싶지 않다. 혼란스럽고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깨어나고 싶지 않다. 한밤중에 공포에 시달리고 싶지 않다. 동료들에게 또 아프다고 설명하고 싶지 않다. 몇 달 동안이나 기운 없이, 평정을 회복하려 애쓰며 살고 싶지 않다. 다리 없는 모습을 윌럼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 윌럼이 극복해야 할 또 다른 도전을, 또 다른 기괴함을 주고 싶지 않다. 정상이 되고 싶다. 그저 정상이 되고 싶은 것뿐인데, 그는 해가 갈수록 정상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마음과 몸을 별개로, 서로경쟁하는 존재로 생각하는 게 틀렸다는 걸 알지만 어쩔 수가 없다. 몸이 또 한 번 전투에서 승리하는 게, 자기 대신 결정을 내리는 게, 이런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게 싫다. 윌럼에게 의지하고 싶지 않다.- P259
거의 매해 여름마다 그는 생각한다. 올해 여름이 최고라고. 하지만 이번 여름은 정말로 최고다. 여름뿐만이 아니다. 봄도, 겨울도, 가을도 최고다. 나이가 들면서 그는 인생을 점점 더 일련의 회상들로 바라보게 된다. 계절들이 포도주 제조연도인 것처럼 한 계절이 지나갈 때마다 평가하고, 살아온 세월을 역사적시대로 나눈다. 야심찬 시절. 불안한 시절. 영광의 시절. 미혹의시절. 희망찬 시절.
이 이야기를 해주자 주드는 빙긋 웃었다. "지금 우리는 어느 시절을 살고 있는데?" 그가 묻자, 윌럼도 그를 보며 빙긋 웃었다. "모르겠어. 아직 이름을 못 붙였거든."
하지만 적어도 끔찍한 시절을 지나왔다는 데는 둘 다 동의했다. 2년 전 바로 이 주말 노동절 주간에 그는 어퍼이스트사이드 병원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옥색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와 잡역부들이 건물 밖에 모여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바로 그 건물 위에 그의 연인을 포함해 죽어가고 있는 온갖사람들이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먹고 담배 피우고 전화 통화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너무 증오심이 치밀어 올라 속이 뒤집히는것 같았다. 그 순간 주드는 불덩어리 같은 몸을 하고 인위적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고, 마지막으로 눈을 뜬 건 수술실에서 나온다음 날인 나흘 전이었다.- P272
아니었다고 할 수는 없지." 그는 주드를 쳐다봤고, 그 순간 주도와 주드의 지난 인생에 대해 정말로 생각할 때 가끔 느끼곤하는 감정을 느꼈다. 슬픔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동정하는 ㅣ슬픔이 아니었다. 그건 더 큰 슬픔이었다. 고군분투하고 있는가엾은 사람들, 자기도 모르는,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을 다 감싸 안는 것 같은 슬픔이었다. 매일매일이 너무나 힘들 때에도, 상황이 너무나 비참할 때도, 사방에서사람들이 살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생각하면 느끼게 되는 경탄과 경외심이 뒤섞인 그런 슬픔이었다. 인생이란 너무 슬프구나. 그런 순간이면 그는 생각했다. 너무 슬프지만, 그래도 사람은 다 그렇게 사는 거지. 삶에 매달리고, 위안거리를 찾고.
하지만 물론 이런 말을 하진 않았다. 그는 몸을 일으켜 주드의 얼굴을 잡고 키스한 뒤 다시 베개에 기댔다. "넌 어쩌다 그렇게 똑똑해졌어?" 주드에게 묻자, 그는 빙긋 웃기만 했다.- P5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