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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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그들의 새벽


약기운이 차츰 소진해가는 마취 상태에서처럼 몽롱한 의식을후드득 털어내며 그녀는 눈을 떴다.
희고 검은 빛깔의 물고기 형상을 하고 균일한 분포로 판박이된 천장의 사방 연속 무늬가 어슴프레 공중에 걸려 있는 게 맨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현관 바깥에 매달린 외에서 가느다란불빛이 유리창으로 새어들어와 맞은편 벽면으로 날이 잘 다듬어진 비수처럼 음험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녀는 메말라껄끄러운 눈꺼풀을 몇 번인가 깜박거리며 눈의 초점을 맞추려애를 썼다.
뚜걱, 뚜걱, 뚜거덕.
불현듯 온몸의 털구멍이 한꺼번에 바짝 아가리를 닫고 수축되어버리는 듯한 긴장감, 그녀는 전신이 풀먹인 무명베처럼 빳빳하게 굳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발소리는 역시 이층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두 뼘도 채 못 되는 천장의 콘크리트 두께를 뚫고 발소리는 분명히 그녀의 귀에까지 전달되고 있었다.- P62
뚜거덕 뚜걱 뚜거덕.
잠시 멈췄던 발소리는 다시 쇠사슬처럼 연결되기 시작했다. 돌아가신 시부모의 사진이 걸려진 왼쪽 벽에서부터 장롱이 있는윗목으로, 그러다가 다시 아래쪽으로 내려온 발소리는 곁에 누운 다섯 살짜리 아들의 배를 북북 밟으며 건너오더니 이윽고 그녀의 목과 머리를 지나치려다가 문득 정지했다. 지금 강도인지살인범인지 모를 그 발소리의 주인은 그녀의 가슴팍 어느쯤에서두 다리를 벌린 채 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는 참이었다. 그녀는나무토막처럼 빳빳이 굳어 누운 채로 천장에서 울려오는 발소리의 방향을 끈질기게 눈길로 쫓고 있었다.
발소리가 멎은 그 순간 그녀의 모든 세포는 또 한 차례 바짝결빙했다. 까슬한 소름이 꽃가루 번지듯 돋아났다. 전신의 땀구멍마다 털이 부우우 허리를 곧추세워 일어나기 시작하고 그녀의모든 촉각은 소리가 정지한 천장의 한 점에 레이다망처럼 집결하고 있었다.- P63
그것은 물고기 형상을 한 검은 유선형 무늬의 머리 부분이었다. 그녀는 거기에서 가늘고 날카로운 금속성의 선이 불쑥 뛰쳐나오는 듯한 환각을 일으켰다. 바늘같이 예리한 침. 분명히 압정(釘)의 끝이었다. 밑창에 압정이 달린 구두를 신고 다니는 괴한. 그녀는 비명을 지르려 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이내 깊이 잠겨버렸다. 침묵은 차츰 고드름마냥 길어나며 영락없이 그녀의 심장을 겨냥해 내려오고 있다. 둘둘둘둘. 굴착해오는 착암기의 섬뜩한 소음. 퍼뜩 잠자리의 표본이 뇌리에 떠올랐다. 아아, 가슴에 예리한 핀을 찌르고 그녀는 이대로 방바닥에 누운 채로 한 마리 표본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었다. 파르르, 잠자리의 날갯짓처럼 그녀는 진저리를 쳤다.
뚜거덕 뚜걱 뚜걱
다행히 발소리가 다시 움직임을 시작한다. 그녀는 나지막이 푸우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핀은 사라지고 없었다. 등허리로 식은땀이 질펀했다.- P64
아버지의 땅


쫓겨가는 한 마리 딱정벌레처럼 트럭은 저만치 들판 가운데로난 황톳길을 따라 느릿느릿 기어가고 있었다. 고르지 못한 노면에서 바퀴가 튀어오를 때마다 덜컹대는 쇳소리가 들려왔고 꽁무니로 부옇게 마른 먼지가 피어올랐다.
덮개 없는 트럭의 뒤칸에 홀로 쭈그려앉은 채 실려가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유난히도 자그맣게 오므라들어 있어 보였다. 뒤칸에 적재된 알루미늄 식깡들이 이따금 섬뜩하리만큼 차가운 금속성의 광선을 쏘곤 했다. 풀잎들이 저마다 윤기를 잃어가고있는 들녘과 차츰 잿빛으로 퇴색해가기 시작하는 야산의 정지된 풍경 속에서 그것은 안간힘을 쓰며 집요하게 꿈틀거리고 있는단 하나의 운동체였다.- P85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옆구리에선 허리띠에 찬 수통과 부딪치며소총이 달그락 소리를 냈다. 돌아다보니, 까마귀떼가 조금 전에우리가 지나온 밭으로 다시 펄럭펄럭 내려앉고 있는 게 보였다.
놈들은 거기에다 무엇인가 먹을 것을 숨겨두었던 것일까. 텅빈 초겨울의 들녘에서 저희들끼리 몰려다니며 무엇 하나 남아 있을것 같지 않은 메마른 밭고랑 사이를 어슬렁어슬렁 배회하고 있는 그 크고 흉물스런 새떼의 모습이 까닭 없이 마음을 우울하게했다.
-저걸 좀 봐라이. 새들은 사람보담도 몬치 계절을 아는 법이여.
어머니가 말했다. 그녀는 잘게 썬 고구마를 햇볕에 말리기 위해 마당 앞 돌담장 위에 하나씩 널고 있던 참이었다. 토방에 주저앉아 잠자리를 들여다보고 있던 나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담장에 기댄 어머니가 목을 젖힌 채 하늘을 치어다보며 서 있었다. 그녀의 눈길이 가 닿아 있는 쪽 하늘엔 언뜻 작은 점들이 무수하게 흩어져 있는 게 눈에 잡혔다. 새떼였다. 목이 길다란 것이 어쩌면 자연 시간에 배운 청둥오리나 재두루미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새들은 별로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천천히 허공을 비행하고 있었다.- P89
그런 어머니의 변명은 끝끝내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지 못했다. 그 후로 나는 좀처럼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게 되었다. 뜻밖에도 아버지의 죄를 순순히 시인하는 그녀의 한마디가 내게는 그토록 엄청난 충격으로 깊이 남겨졌던 탓이리라. 바로 그 순간부터 나는 아버지의 그 죄라는 것을 내 스스로 함께 나누어 지니고 만 느낌이었고, 그 때문에 나이에 걸맞지 않게 나는 눈빛이 깊고 어두운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아버지의 무서운 환영은 저주처럼 내 곁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언제나 시커먼 어둠 저편에 숨어서 음산하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는 어디에나 숨어 있었다. 내 어릴 때 이따금 고개를 디밀어 들여다보면 마루 밑 저편 깊숙이 도사리고 있던 그 까마득한 어둠 속에서도 그 어둠 속에서 술술 기어나오던 그 눅눅하고 음습한 냄새 속에서도 내가 한 번도얼굴을 본 적이 없는 그 사내는 핏발 선 눈알을 번득이며 나를쏘아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건 어디서 묻었는지도 모르는, 오랜시간이 흐른 뒤에까지 지워지지 않는 핏자국처럼 내게는 저주와 공포의 낙인으로 깊이 박혀져 있었다. 그리고 그 낙인을 가슴에지닌 채, 나는 끝끝내 나를 휘감고 있는 어떤 엄청난 죄악감과 불길한 예감으로부터 영영 벗어날 수가 없었다.- P100
그때였다. 쭈그려앉아서 손을 움직이고 있던 노인이 불쑥 소리치는 것이었다.
"어허. 대관절...... 대관절 그게 어떻다는 얘기요. 죽어서까지원, 아무리 이렇게 죽어 누운 다음에까지 이쪽이니 저쪽이니 하고 그런 걸 굳이 따져서 무얼 하자는 말이오. 죽은 사람이 뭣을알길래... 죄다 부질없는 짓이지. 쯔쯧."
노인의 음성은 낮았지만 강하고 무거웠다. 그러면서도 노인은고개를 숙인 채 뼛조각에 묻은 흙을 정성스레 닦아내고 있었다.
무슨 귀한 물건마냥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신중히 손질하고 있는 노인의 자그마한 체구를 우리는 둘러서서 지켜보았다. 모두들 한동안 입을 다물었고, 나는 흙에 적셔진 노인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P105
"땅속에 누운 사람의 잠을 살아 있는 사람이 깨워서야 되겠소. 또 그럴 수도 없는 법이고. 원통한 넋이니 죽어서라도 편히 눈감도록 해야지, 암. 그것이 산 사람들의 도리요...... 하기는, 이렇게 불편한 꼴로 묶여 있었으니 그 잠인들 오죽했을까만."
노인은 어느 틈에 꾸짖는 듯한 말투로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두개골과 다리뼈를 꼼꼼히 문질러 닦은 뒤, 노인은 몸통 뼈에묶인 줄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완강하게 묶인 매듭은 마침내 노인의 손끝에서 풀리어졌다. 금방이라도 쩔걱걱 쇳소리를 낼듯한 철사줄은 싱싱하게 살아 있었다. 살을 녹이고 뼈까지도 녹슬게 만든 그 오랜 시간과 땅 밑의 어둠을 끝끝내 견뎌내고 그렇듯 시퍼렇게 되살아나오는 그것의 놀라운 끈질김과 냉혹성이 언뜻 소름끼치도록 무서움증을 느끼게 했다.
노인은 손목과 팔에 묶인 결박까지 마저 풀어낸 다음 허리를- P105
펴고 일어서더니 줄묶음을 들고 저만치 걸어나갔다. 그가 허공을 향해 그것을 멀리 내던지는 순간, 나는 까닭 모르게 마당가에서 하늘을 치어다보며 서 있는 어머니의 가녀린 목줄기와 그녀가 아침마다 소반 위에 떠서 올리곤 하던 하얀 물사발이 눈앞에 떠올랐다가 스러져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담배를 피워물었다. 멀리 메마른 초겨울의 야산이 헐벗은 등을 까내놓고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사위는 온통 잿빛의 풍경이었다. 피잉, 현기증이 일었다.- P106
광주리를 머리에 인 어머니가 모래밭을 걸어오고 있었다. 돌돌거리며 흐르는 물소리를 거슬러 강변 모래밭을 어머니가 혼자저만치서 다가오고 있었다. 모래밭은 하얗게 햇살을 되받아 쏘며 은빛으로 반짝였다. 허리띠를 질끈 동인 어머니의 치맛자락이 흐느적이며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햇살에 부신 눈을 가늘게 오므리고 줄곧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꿈속에서처럼 나는 그녀의 뒤를 바짝 따라오고 있는 한 사내의 환영을 보았다. 그건 아버지였다. 언젠가 어머니의 낡은 반닫이 깊숙한 옷가지 밑에 숨겨져 있던 액자 속에서 학생복 차림으로 서있던 그대로 그건 영락없는 그 사내였다. 나를 어머니의 뱃속에남겨놓은 채 어느 바람이 몹시 부는 날 밤, 산길을 타고 지리산인가 어디로 황황히 떠나가버렸다는 사내. 창백해 뵈는 뺨에 마른 몸집의 그 사내가 어머니와 함께 걸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놀란 눈으로 풀밭에 앉아 나는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어머니의 눈썹과 코, 입의 윤곽과 야윈 목줄기까지 뚜렷이 드러날만큼 가까워졌을 때 사내의 환영은 어느 틈에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보았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 P106
술이 가득 차오른 반합 뚜껑을 나는 두 손으로 받쳐들었다. 저것 봐라이. 날짐승도 때가 되면 돌아올 줄 아는 법이다. 어머니가 말했다. 저만치 웬 사내가 서 있었다. 가슴과 팔목에 철사줄을 동여맨 채 사내는 이쪽을 응시하며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퀭하니 열려 있는 그 사내의 눈은 잔뜩 겁에 질려 있는 채로였다.
애앵. 총성이 울렸고 그는 허물어지듯 앞으로 고꾸라지고 있었다. 불현듯 시야가 부옇게 흐려왔다.
아아.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쓰러져 누워 있을 것인가. 해마다 머리맡에 무성한 쑥부쟁이와 엉겅퀴꽃을 지천으로 피워내며 이제 아버지는 어느 버려진 밭고랑, 어느 응달진 산기슭에 무덤도 묘비도 없이 홀로 잠들어 있을 것인가.- P107
아아,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그토록 오랫동안 누군가를 기다려왔었음을. 내 유년 시절의 퇴락한 고가의 마루밑 그 깜깜한 어둠 속에서 음습하고 불길한 냄새와 함께 나를 쏘아보고 있던 한 사내의 눈빛을, 그리고 청년이 된 지금까지도 가슴을 새까맣게 그을려놓으며 깊숙한 상흔으로만 찍혀져 있을뿐인 그 증오스런 사내의 이름을, 어머니는 스물다섯 해가 넘도록 혼자서 몰래 불씨처럼 가슴속에 키워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한테 그 사내는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만 곱고 자상한 눈매로서만, 나직한 음성으로서만 늘 곁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울고 있는 건 그 미련스럽도록 끈질긴 기다림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아니, 사실상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더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녀의 기다림이 얼마나 까마득하게 손이닿지 않는 먼 곳으로 자꾸만 자꾸만 밀려나가고 있는 것인가를 말이다. 스물다섯 해의 세월이 스스로 묶어놓은 그 완고한 기만이 목에 잠기어 흐느낌도 없이 지금 어머니는 울고 있는 것이었다. 밥상을 받아놓은 채 나는 고개를 처박고 앉아 있었다. 눈앞에는 우리 가족의 그 오랜 어둠과 같은 미역가닥이 국그릇 속에서 멀겋게 식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P111
까우욱. 까우욱.
어느 틈에 날아왔는지 길 옆 밭고랑마다 수많은 까마귀들이 구물거리고 있었다. 온 세상 가득히 내려 쌓이는 풍성한 눈발 속에 저희들끼리만 모여서 새까맣게 구물거리며 놈들은 그 음산함과 불길함을 역병처럼 퍼뜨리고 있는 것이었다. 얼핏, 쏟아지는그 눈발 속에서 나는 얼어붙은 땅 밑에 새우등으로 웅크리고 누운 누군가의 몸 뒤척이는 소리를 들었다. 아버지였다. 손발이 묶인 아버지가 이따금 돌아누우며 낮은 신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나는 황량한 들판 가운데에 서서 그 몸집이 크고 불길한 새들의펄렁거리는 날갯짓과 구물거리는 모습을 오래오래 지켜보았다.
머리 위로 눈은 하염없이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함박눈이었다. 굵고 탐스러운 눈송이들은 세상을 가득 채워버리려는 듯이 밭고랑을 지우고, 밭둑을 지우고, 그 위에 선 내 발목을 지우고, 구물거리는 검은 새떼를 지우고, 이윽고는 들판과 또 마주 바라뵈는 거대한 산의 몸뚱이마저도 하얗게 하얗게 지워가고 있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새벽마다 샘물을 길어와 소반 위에 떠서 올려놓곤 하던 바로 그 사기대접의 눈부시도록 하얀 빛깔이었다.- P112
사평역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별로 복잡한 내용이랄 것도 없는 장부를 마저 꼼꼼히 확인해보고 나서야 늙은 역장은 돋보기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놓고 일어선다.
벌써 삼십 분이나 지났군.
출입문 위쪽에 붙은 낡은 벽시계가 여덟시 십오분을 가리키고있다. 하긴 뭐 벌써라는 말을 쓰는 것도 새삼스럽다고 그는 고쳐생각한다. 이렇게 작은 산골 간이역에서 제시간에 정확히 도착하는 완행 열차를 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님을 익히 알고 있는탓이다. 더구나 오늘은 눈까지 내리고 있지 않은가.- P113
역장은 손바닥을 비비며 창가로 다가가더니 유리창 너머로 무심히 시선을 던진다. 건널목 옆 외눈박이 수은등이 껑충하게 서서 홀로 눈을 맞으며 희뿌연 얼굴로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 송이눈이다. 갓난아이의 주먹만한 눈송이들은 어둠 저편에 까맣게 숨어 있다가 느닷없이 수은등의 불빛 속에 뛰어들어오면서 뚱그렇게 놀란 표정을 채 지우지 못한 채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굉장한 눈이다. 바람도 그리 없는데 눈발이 비스듬히 비껴날리고 있다. 늙은 역장은 조금은 근심스런 기색으로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대어본다. 하지만 콧김이 먼저 재빠르게 유리창에 달라붙어 뿌연 물방울을 만들었기 때문에 소매로 훔쳐내야했다. 철길은 아직까지는 이상이 없었다.- P114
사람들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대합실 벽에 붙은 시계가도착 시간을 한 시간 반이나 넘긴 채 꾸준히 재깍거리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다. 창밖엔 싸륵싸륵 송이눈이 쌓여가고 유리창마다 흰보라빛 성에가 톱밥 난로의 불빛을은은하게 되비추어내고 있을 뿐.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말을 잊었다. 어쩌면 그들은 열차를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중년 사내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성냥불을 당기려다 말고 멍하니 난로의 불빛을 들여다보고 있다. 노인을 안고 있는 농부도, 대학생도, 쭈그려 앉은 아낙네들도, 서울 여자도, 머플러를 쓴 춘심이도 저마다 손바닥들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망연한 시선을 난로위에 모은 채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만치 홀로 떨어져 앉아 있는 미친 여자도 지금은 석고상으로 고요히 정지해 있다. 이따금 노인의 기침 소리가 났고, 난로 속에서 톱밥이 톡톡 튀어올랐다.- P144
"흐유. 산다는 게 대체 뭣이간다......"
불현듯 누군가 나직이 내뱉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말꼬리를 붙잡고 저마다 곰곰이 생각해보기 시작한다. 정말이지 산다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중년 사내에겐 산다는 일이 그저 벽돌담 같은 것이라고 여겨진다. 햇볕도 바람도 흘러들지 않는 폐쇄된 공간. 그곳엔 시간마저도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마치 이 작은 산골 간이역을빠른 속도로 무심히 지나쳐가버리는 특급 열차처럼……. 사내는그 열차를 세울 수도 탈 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면- P144
서도 여전히 기다릴 도리밖에 없다는 것, 그것이 바로 앞으로 남겨진 자기 몫의 삶이라고 사내는 생각한다.
농부의 생각엔 삶이란 그저 누가 뭐래도 흙과 일뿐이다. 계절도 없이 쳇바퀴로 이어지는 노동. 농한기라는 겨울철마저도 융자금 상환과 농약값이며 비료값으로부터 시작하여 중학교에 보낸 큰아들놈의 학비에 이르기까지 이런저런 걱정만 하다가 보내고 마는 한숨철이 되고 만 지도 오래였다. 삶이란 필시 등뼈가 휘도록 일하고 근심하다가 끝내는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리라고 여겨졌으므로, 드디어 어려운 문제를 풀어냈다는 듯이 농부는 한숨을 길게 내쉰다- P145
서울 여자에겐 돈이다. 그녀가 경영하고 있는 음식점 출입문을 들어서는 사람들은 모조리 그녀에겐 돈으로 뵌다. 어서 오세요. 입에 붙은 인사도 알고 보면 손님에게가 아니라 돈에게 하는말일 게다. 그래서 뚱뚱이 여자는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손님들에게 결코 안녕히 가세요, 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또 오세요다.
그녀는 가난을 안다. 미친 듯 돈을 벌어서, 가랑이를 찢어내던어린 시절의 배고픈 기억을 보란 듯이 보상받고 싶은 게 그녀의욕심이다. 물론 남자 없이 혼자 지새워야 하는 밤이 그녀의 부대자루 같은 살덩이를 이따금 서럽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는 두 아들을 끔찍이 사랑했다. 소중한 두 아들과 또 그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에 쓰여질 돈, 그 두 가지만 있으면 과부인 그녀의 삶은 그런대로 만족할 것도 같다.
춘심이는 애당초 그런 골치 아픈 얘기는 생각하기도 싫어진다. 산다는 게 뭐 별것일까? 아무리 허덕이며 몸부림을 쳐본들, 까짓 것 혀 꼬부라진 소리로 불러대는 청승맞은 유행가 가락이- P145
나 술 취해 두들기는 젓가락 장단과 매양 한가지일걸 뭐. 그래서춘심이는 술이 좋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게 해주는 술님이 고맙다. 그래도 춘심이는 취하면 때로 울기도 하는데 그 까닭이야말로 춘심이도 모를 일이다.
대학생에겐 삶은 이 세상과 구별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스물셋의 나이인 그에게는 세상 돌아가는 내력을 모르고, 아니 모른척하고 산다는 것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그런 삶은 잠이다. 마취 상태에 빠져 흘려보내는 시간일 뿐이라고 청년은 믿고 있다. 하지만 그는 얼마 전부터 그런 확신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는 걸 느끼고 있다. 유치장에서 보낸 한 달 남짓한 기억과 퇴학. 끓어오르는 그들의 신념과는 아랑곳없이 이루어지고 있는강의실 밖의 질서...... 그런 것들이 자꾸만 청년의 시야를 어지럽히고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P146
행상꾼 아낙네들은 산다는 일이 이를테면 허허한 길바닥만 같다. 아니면, 꼭두새벽부터 장사치들이 때로 엉켜 아우성치는 시장에서 허겁지겁 보따리를 꾸려나와, 때로는 시골 장터로 혹은인적 뜸한 산골 마을로 돌아다니며 역시 자기네 처지보다 나을것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시골 사람들 앞에서 거짓말 참말 다발라가며 펼쳐놓는 그 싸구려 옷가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녀들에겐 그따위 사치스런 문제를 따지고 말고 할 능력도 건덕지도 없다. 지금 아낙네들의 머릿속엔 아이들에게 맡겨둔 채로 떠나온 집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 어린것들이 밥이나 제때에 해먹었을까, 연탄불은 꺼지지 않았을까. 며칠째 일거리가없어 빈둥대고 있는 십 년 노가다 경력의 남편이 또 술에 취해서 집구석에 법석을 피워놓진 않았을까......- P146
그러는 사이에도, 밖은 간간이 어둠 저편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왔고, 그때마다 창문이 딸그락거렸다. 전신주 끝을 물고 윙윙대는 바람 소리, 싸륵싸륵 눈발이 흩날리는 소리, 난로에서 톡톡튀어오르는 톱밥. 그런 크고 작은 소리들이 간헐적으로 토해내는 늙은이의 기침 소리와 함께 대합실 안을 채우고 있을 뿐, 사람들은 각기 골똘한 얼굴로 생각에 빠져 있다.
대학생은 문득 고개를 들어 말없이 모여 있는 그들의 얼굴을하나하나 눈여겨본다. 모두의 뺨이 불빛에 발갛게 상기되어 있다. 청년은 처음으로 그 낯선 사람들의 얼굴에서 어떤 아늑함이랄까 평화스러움을 찾아내고는 새삼 놀라고 있다. 정말이지 산다는 것이란 때로는 저렇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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