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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서른넷의 나이에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그녀는 (1981년까지 발표되지 않았던) 자신의 기념비적인 1959년 연설 <흑인작가와 그의 뿌리>(강조는 우리가 한 것이다)를 두고 자신이 이연설 제목을 잘못 달게 만든 영향이 과연 무엇인지 분석했다. 우리가 『노턴 여성문학 앤솔러지』 초판에 포함시키기 전까지출간된 적이 없던 1961년의 글 「남성 평등 옹호」에서는 여성을 "이류의 지위"에 효과적으로 묶어놓으면서도 "남성에게 가장 불합리하고 불필요한 ‘우월성‘과 ‘권위‘라는 짐을 강요하는 일에대해서는 비판을 덜 가하는" 사회 질서를 혹평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런 ‘우월성‘이나 ‘권위‘는 남성의 인간다움을 모욕하고, 그들이 문명화된 상태라는 현실을 부정하는 데만 효과가 있다."
핸스베리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수전 B. 앤서니, 엘리자베스케이디 스탠턴, 해리엇 터브먼을 인용하면서 가정주부의 신화를 거듭 벗겨내기도 했다. "자기 운명에 대한 여성의 불만은 페미니스트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페미니스트는 그들이 등장할 수 있는유일한 장소에서 생겨난 존재다 - 이 세상 주부들의 자리 말이다!" (강조는 헨스베리가 한 것이다.)  베티 프리단 이전에, 로레인 핸스베리가 있었다.- P92
지금의 독자들은 시대를 앞서 살았던 한 여성의 눈부신 아름다움과 위트를 포착한 이매니 페리의 로레인을 찾아서』를 읽으며 핸스베리의 일부 글이 여성들과의 에로틱한 관계를 다루었다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면의 자기 검열과외부의 검열 때문에 생겨난 피해를 지적했던 에이드리언 리치가 옳았다. 핸스베리가 제안했던 프로젝트 <제니 리드의 창문에 걸린 간판>은 <시드니 브루스테인의 창문에 걸린 간판>으로 변형되었다. (이 쇼는 그녀가 죽기 전날 밤 막을 내렸다.) 원래 여성 인물들이 주역으로 나왔던 그녀의 차기작 극본 <백인들>도 최종 버전에서 돋보였던 인물들은 남자 주인공들이었다.
그녀는 "무수히 깨부수어진" 여성의 강력한 대변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에 관한 장편 드라마도 계획했었지만 집필할 시간이 없었다. 한편 핸스베리는 (레즈비언 인권단체 ‘빌리티스의딸들‘이 1955년에 창간한) 레즈비언 간행물 <래더>에 익명으로 기고하기도 했다. 이 글들은 레즈비언에게 가해지는 결혼 압박, 동성애자 핍박, 안티 페미니스트 도그마 등의 문제를 다루었다. - P93
<매콜스>가 그녀의 글 게재를 거부했던 것은 아마 그 내용이 너무 격렬했기 때문일 것이다. <홈 저널>이나 <마드무아젤><레드북> 같은 잡지도 거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침묵을 거부했고, 기사 형태의 그 글을 개작해 단행본으로출간하자는 제안을 하며 출판권을 W. W. 노턴 출판사에 팔았다. 1963년 『여성성의 신화』 초판 3000부가 출간되자 곧바로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 놀랍게도 서점에서 날개 돋친듯 팔렸다. 그러나 프리단은 불만 사항들을 억지로 만들어내기록한 사람도, 그런 사실을 최초로 탐구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녀 스스로 밝혔듯이, "덫에 갇힌 가정주부"라는 주제는 <라이프>와 <뉴스위크> 같은 잡지들이나 <뉴욕 타임스>에 거듭 등장하는 주제였다. 당시 한 평론가는 이런 공표까지 했다. "프로이트에서 냉장고까지, 소포클레스에서 소아과 의사 스폭까지 이- P184
르는 길은 울퉁불퉁한 험로였음이 밝혀졌다."
정말로 그랬다. 프리단의 주장처럼 "1960년,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가 미국의 행복한 가정주부라는 이미지를 뚫고 부글부글 끓어넘치고 있었다. "- P105
1960년대로 들어설 때 1950년대는 그 시대의 성격을 계속해서 잘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한 가지 극적인 공적 변화가 있기는 했다. 젊은 존 F. 케네디와 그의 우아한 아내가 백악관의 아버지 같은 아이젠하워와 다소 세련되지 못한 그의 아내 메이미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존 F. 케네디와 재키는 새로운시대의 대표자로서 1950년대가 욕망했던 모든 것의 아이콘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부유하고 지적인 남편과 매력적인 ‘사교계 인사‘ 아내로 말이다. 아이젠하워 부부는 말하자면 1940년대의 유물이었다.- P109
1963년 11월 22일에는 존 F. 케네디가 자동차를 타고 댈러스의 다운타운을 통과하는 도중 암살당했다. 마릴린 먼로 때와 마찬가지로 앤디 워홀은 거의 즉각적으로 재키를 미술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재키의 스무 가지 모습>(1964)에서 워홀은 남편의 장례식장에서 한 정복 경호원 앞에 선 채 침울하게 눈을 내리뜨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포착했다. 
품위 있는 로맨스를 꿈꾸었던 1950년대는 끝났다. 먼로와 존F. 케네디, 실비아 플라스 휴스가 세상을 떠났듯이. 개인사에묻혀 있던 플라스가 남긴 초기 페미니즘적 시들은 그녀의 동시대인이었던 에이드리언 리치가 가부장제에 반대하며 표현한 항의와 니나 시몬이 노래했던 항변을 예고한다. 두 사람은 민권운동의 에너지를 여성 문제 쪽으로 튼 이들이었다.- P113
이제 그 시들은 잘 다듬어진 새로운 자아, 지면 위에서 구축뢴 차이를 자랑하는 작품들이었다. 그렇게 새로 창조된 지면위의 자하는 의미심장하게도 페미니스트였다. 저자가 시몬 드•보부아르를 읽어보지 못한 사람인데도 말이다. 마침내 그녀는「화씨 103도의 고열」부터 「에어리얼」, 「레이디 라자로」, 「벌침」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시들에서 해묵은 스테레오타입을 벗어던졌다. 특히 휴스가 짐을 꾸리기 위해 코트그린에 들렀던1962년 10월 6일에 쓴 마지막 작품에서, 그녀는 앞으로 양봉에열중하겠다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나는 꾸준히 일만 하는 일벌이 아니야 / 여러 해 동안 먼지만 먹고 살아왔어 / 내 빽빽한털들로 접시를 닦아왔고"
이것이 바로 그녀를 거의 "질식시켰던 가정생활이었다. 코트그린의 실제 먼지 속에서뿐만 아니라 그 집의 오랜 과거라는 비유적인 먼지 속에서, 남편을 위해 가정을 꾸리고 그의 시를 대신 타이핑하고 그의 식사를 준비하고 그의 식기를 설거지하면서 들이마신 실제 먼지와 비유적인 먼지 속에서 그녀는 질식해갔다. 마침내 이제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결심했다. "내게는되찾아야 할 자아가 있어, 여왕벌처럼."-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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