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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주여, 언제까지입니까? 영영 숨어 계시렵니까? 언제까지 주님의 진노를 불처럼 태우려고 하십니까? 내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얼마나 허무하게 창조하여 주셨는지를 기억해주소서.(「시편」89편 46~47절)- P49
30여 년 전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가보자.
미국의 여러 도시를 돌았던 나는 워싱턴 DC에 비교적 오랜시간 머물렀다. 수도인 만큼 미국 정부나 각 정당을 향한 로비 활동을 펼치기 위해 다양한 인권단체가 워싱턴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나 역시 그중 하나였던 초교파적 기독교계 단체에 신세를지게 되었다. 그곳을 거점 삼아 미국 국무부 인권국의 담당관을만나기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사회안전법의 비인도성과 반인권성을 알려서 국무부가 간행하는 연차보고서에 반영시키는일이 목표였다. 나의 형 서준식이 바로 사회안전법의 희생자이자,
옥중에서 그 부당함을 고발한 자였다. 서준식은 징역 7년의 형기를 이미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재범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형- P49
기가 연장되었다. 2년마다 5월이 되면 연장된 형기의 갱신 시기가다가왔다. 그날을 앞에 두고 우리 가족이나 관계자들은 그가 석방될 가능성에 실낱같은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무자비하게도 형기는 언제나 ‘갱신‘되었다. 어머니가 일본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랬다.
나를 지원해주던 인권단체 사무실은 미합중국 국회의사당 근처에 있었다. 암트랙 Amtrak (전미여객철도공사) 철도 유니언역에서도 멀지 않았다. 찾아가보니 예상외로 좁고 작은 방이었다. 거기서 국무부를 포함한 각기관이나 저널리스트와 인터뷰를 소개해주었다. 국무부 같은 경우는 특히 그랬지만, 그쪽에서 시간이 빈다고 연락을 주기까지 경우에 따라서는 며칠 동안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만 했다.- P51
작은 사무실에는 스태프 몇 명이 소식지 발송 작업을 하고있었다. 주된 내용은 한국에서 전해오는 인권 관련 소식이었다.
일본에서도 이 단체의 뉴스레터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멀리 미국 워싱턴에서 보내오는 통신을 보면서 나는 어째선지 젊은 활동가들이 바쁘게 일하는 활기찬 모습을 떠올렸었다. 하지만 직접목격한 작업 풍경은 내 상상과는 크게 달랐다. 더딘 수작업이었다. 무엇보다 활동 자금이 부족해 쪼들리는 모습이 한눈에도 들- P51
어왔다.
스태프 중에는 여성이 둘 있었는데 한 사람은 당시 40대 중반쯤이었을까. 젊어서 한국을 떠나 세계 각지의 현장에서 노동을하면서 전도 활동을 펼쳐왔다는 수녀였다. 일본의 가와사키시에서도 활동한 적이 있다고 했다. 경험이 풍부하고 쾌활하고 명랑한이였다. 나는 그를 ‘누나‘라고 부르며 서툰 조선어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또 한 사람은 재미한국인 여자 대학생 사회학인지 정치학인지를 전공하고 있었는데, 당시 미국에서 일반적으로 그러듯 이런 민간단체에서 인턴으로 활동하며 현장 경험을 쌓는 중이었다. 그녀는 명석했지만 꽤 차분한 성격이라 ‘누나‘와는 대조적으로 말수가 적었다. 두 사람 모두 가난했다. 대학생은 늘 해진 구두를 신고 다녔는데 터진 구멍 사이로 하얀 발가락이 보였다.- P53
WASHINGTON, D.C.
1964년 8월, 한국 중앙정보부는 북한의 지령을 받은 반국가단체 인민혁명당 관계자 41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제1차 인혁당사건). 그렇지만 실제로 검찰이 기소할 수 있었던 사람은 13명뿐이었고, 최종적으로는 3명에게 징역 6년, 다른 10명에게는 징역1년 집행유예 3년이라는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빈 껍데기일 뿐인 날조 사건이었다. 1970년대 전반 한국 사회는, 1972년 박정희유신독재 정권이 들어서고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인해 반정부 민주화운동이 고양되던 시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정권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관계자를 적발하고(민청학련 사건), 1974년 4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총23명을 체포했다. 그들의 죄상은 "인혁당을 재건하여 민청학련의 국가 전복 활동을 지휘한 점"이었다. 다음 해인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피고인 8명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판결로부터 불과 18시간 후인 9일 아침에형을 집행했다. 오글 목사 부부는 국가에 의한 무자비한 살육 행위에 당당히 항의했던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고, 그 까닭으로 한국에서 강제로 추방당했다. 인민혁명당 피고의 사형 집행은 박정희 시대의 한국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P55
주어, 언제까지입니까......"
이 문구는 말 그대로 끝이 없을 어두운 밤과 같았던 그 당시,
많은 한국인들이 공유했던 말버릇과도 같았다. 나도 그들 중하나였다. 다만 나는 이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고 할 때마다 당황해서 삼켜버리기 일쑤였다. 신을 믿지 않는 스스로를 자각했기 때문이었고, 한편으로는 ‘언제까지‘라고 물어봤자 희망적인 대답따위는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앞에 인용한 구약성서 시편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일본에서 읽은 한국 민주화운동 정보를 전해주던 소책자에 윌리엄블레이크 William Blake (1757~1827)의 회화 작품 「느부갓네살」과 함께 게재되어 있던 이 글귀를 생생히 기억한다. 이 작품은 구약성서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의 이야기를제재로 삼았다. 바빌로니아의 왕 느부갓네살 2세는 교만의 죄악에 빠졌고, 그 벌로 풀을 먹는수소처럼 살아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P57
워싱턴 체류가 제법 길어질 무렵, 재미동포 유지 한사람이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했다. 한국 식당에서 포토맥강의 명물인 게요리를 먹었다. 값비싸고 맛있는 음식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차안에서 몸에 이상이 느껴졌다. 온몸의 피부가 참을 수 없이 가려웠다. 운전해주던 동포 청년에게 알리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나는 영어로도 우리말로도 ‘가렵다‘라는 말을 알지- P61
WASHINGTON안전보장법‘이라든지, ‘기본적 인권‘이라든지, ‘천장에 매본 매질을 당하는 고문‘과 같은 말은 영어로도 한국어로도가했다. 찾아갔던 곳곳에서 그런 이야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가렵다."라는 간단한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일본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일본어 이외에는 일상생활을 위한 어휘를 알지 못했던탓이다. 나는 너무 피곤해서 신경과민 상태였다. 호들갑스러운 말이겠지만 그때 차 안에서 "몸이 가려워요."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만으로도 망명자라도 된 듯 마음속 저 밑바닥에서 고독감과 비애가 솟아올랐다.
차창 밖을 보니 언뜻 People‘s Drug라는 간판이 보였다. ‘번역하면 인민 약국쯤 되려나... 멍하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나갔을 따름이다. 아주 잠깐지나 퍼뜩 깨달았다. ‘알레르기‘라는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이다. 운전하는 청년에게 차를 좀 세워달라고 부탁하여 그 가게에서 항히스타민제를 사 먹고 위기에서벗어날 수 있었다.- P63
내셔널 갤러리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1519), 렘브란트 Rembrandt van Rijn (1606~1669), 페르메이르Jan Vermeer(1632-1675), 고흐, 모네 Claude Monet (1840~1926), 피카소 Pablo Picasso(1881~1973), 고갱 Paul Gauguin (1848~1903)의 작품을 비롯한 걸작이널려 있었다. 실로 ‘보물창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수틴의 초상」과 같은 예외는 있었지만, 놀랄만한 발견이라 할 작품은 그다지 없기도 했다. 그렇다고 기대 이하였던 것은 아니다. 나와 같은 ‘망명자‘가 잠시 팽팽해진 신경을 누그러트리며 쉬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다만 이런 유럽 회화의 ‘명품‘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대부호가 응접실에서 뽐내던 컬렉션을 구경하는듯해서 피렌체와 파리, 런던에서 보았을 때 같은 감흥이 생겨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신흥국 미국의 큰 부자가 자기의문화적 뿌리를 향한 동경과 콤플렉스 때문에 아낌없이 돈을 들여사모은 작품들...... 그런 나의 선입견이 방해한 것이었을까. 그선입견이 반쯤은 맞다고 해도, 그때는 공부가 부족했던 탓에 그리 단순하게 생각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깨닫긴 했지만- P65
화가 벨로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건축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던 그는 1901년부터 오하이오 주립 대학에서 영문학을 배우고, 농구와 야구 선수로도 활약했다. 아마추어 화가에게 그림을 배우다가 대학 졸업을 기다리지않고 화가가 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났다. 좋은 의미에서 아마추어 출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말하자면 바닥에서부터 실력을 쌓아나간 화가다. 1911년부터 아트 스튜던츠 리그 오브 뉴욕 The ArtStudents League of New York에서 수학했고, 마흔두 살에 복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벨로스는 이른바 ‘애시캔파Ashcan School‘ 화가에 속하며, 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에드워드 호퍼도 그중 하나이다. 이들은 20세기 초반 뉴욕의 변두리와 노동자 계급 사람들의 생활을사실적으로 그렸다. 드디어 미국을 그린 미국인 화가와 만났다는생각이 들었다.- P69
일본에서 열리는 서양회화 전시는 아주 예전부터 인상파를중심으로 한 19세기 후반 이후의 프랑스 회화에 편중되어왔다. 이런 전시 구성이 흥행으로 이어지므로 관람객을 동원하는 데 유리했다는 까닭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는 에른스트루트비히 키르히너 Ernst Ludwig Kirchner (1880~1938)의 「달빛 아래겨울 풍경」이 출품되어 반가웠다. 일본에서는 키르히너의 작품을접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처럼 나 역시 독일이나 스위스의 미술관에서 비로소 독일 표현주의의 매력에 눈떴다. 하지만 전시를 보러 간 첫 번째 목적은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였다. 복제화였지만 예전에 본 괴물 같던 벽화의 잔상이 되살아나기억을 재구성할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P77
U군은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며 시민운동에 힘을 기울이는타입은 아니었다. 간단히 말하면 사회성이 부족한사람이었고, 양실수 지원 활동에서도 중심 멤버가 되지는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일찌감치 중공업계열 기업에 취직하여 공장이 있는 규슈지방어느 도시로 부임했다. 그 뒤에 아프리카 자이르(콩고)에 파견근무를 나가게 되었다. 콩고 남부에 위치한 카탕가주는 구리와코발트 같은 지하자원이 풍부해서 U군의 회사도 광산개발과 운영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U 군은 대학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했기에 프랑스 식민지였던 콩고에 발령이 날 수 있었다. 나도 대학에서 불문학과를 졸업했지만 내 프랑스어는 ‘카르티에 라탱QuartierLatin (라탱지구: 학문의 중심지, 1968년 학생운동이 발발한 현장의 의미로도 쓰인다.)‘의 말이었다면, U군이 쓰는 프랑스어는 광산 현장에서쓰는 말이었던 셈이다. 자이르에서 돌아와서 몇년인가 지나 그는디트로이트 지사로 떠났다.- P83
인권단체 방문만으로 말할 수 없이 지쳤지만, 미술관이라는특별한 장소가 피로를 배가시켰다. 좋은 작품과 만나기라도 하면, 흥분 지수가 올라서 내 쪽에서 기가 빨리는 듯한 피곤함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어디를 가도 미술관에 들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일종의 병적인 심리 상태이다. 디트로이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U 군의 집에서는 오랜만에 넓은 침대에서푹 잘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하루 휴양하듯 쉴 수도 있었지만, 무언가에 내쫓기듯 미술관으로 향했던 것이다. 디트로이트미술관에 관해 충분히 알고 있다거나 꼭 가야만 하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P99
DETROIT그런 리베라가 1929년에 세 번째로 결혼한 상대가 스물한 살어렸던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1907~1954)였다. 리베라는 프리다를다음과 같은 말로 묘사했다. "그녀는 머리카락이 길었고, 검고진한눈썹은 코 위로 이어졌다. 마치 검은 새의 날개와도 같은 새카만아치가 근사한 갈색 빛깔 눈을 두르고 있었다. ‘개구리 왕자‘라는 별명으로 불린 거한이 검은 새의 날개를 가진 여성과 사랑에빠진 것이다. 나와 파트너 F는 2016년 모마를 찾았을 때, 박물관상점에서 두 개 한 세트짜리 머그컵을 샀다. 하나에는 커다란 눈알과 함께 Diego라는 이름이, 다른 컵에는 날개를 펼친 듯한 검은눈썹과 Frida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두사람사이는 늘 위태로웠다. 앞서 말했지만 멕시코에 망명중이던 트로츠키와 프리다가 짧은 연인 관계에 빠진 적이 있다.
벽화 제작에 조수로 참가하기 위해 멕시코를 찾은 일본계 미국인조각가이사무노구치 Isamu Noguchi (1904~1988)와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고용인의 임기응변 덕분에 노구치는 도망칠 수 있었지만 리베라가 권총을 들고 뒤를 쫓았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프리다가오른쪽 다리가 악화되어 입원했을 때 문병을 왔던 노구치와 리베라가 맞닥뜨린 적도 있다. 리베라는 권총을 빼 들고 경고했다. "다음에 만나면 진짜로 한방먹여줄 테다!"- P119
사상가, 정치가로서 리베라는 패배자다. 하지만 나는 그런 리헤라를 우습게 여길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저 벽화 앞에서 나는마치 고대 유적 앞에 섰을 때 느낄 법한 깊은 흥미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외경심을 품게 된다. 리베라의 벽화는 인류의 정신사에 있어 중요한 사료다. 리베라가 아즈텍의 지모신母神 코아틀리에에게 영감을 얻었듯, 미래의 인류가 폐허 속에서 이 벽화를 발굴하여 인간해방의 새로운 꿈과 활력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를 비웃는 것은 인간 정신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천박함에 몸을맡겨버리는 일은 아닐까.
세계 각지에서 해방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리베라의 작품은지금도 말을 건네고 있다. 이를 받아들여 계승하려는자 역시 끊이지 않는다. 한국의 민중미술 운동이 좋은 예다. 사상가, 정치가로서는 패배자인지 모르지만, 예술가로서 디에고 리베라는 다른평가를 받아야만 한다.-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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