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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서경식

1951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1974년 와세다 대학 문학부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하고 도쿄케이자이 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했다. 2006년부터 2년간 성공회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머물며 한국의 다양한 지식인,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1995년「소년의 눈물로 일본에세이스트클럽상을 받았고 2000년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민주주의 실현과 소수자 인권 신장에 기여한 공로로 제6회후광 김대중학술상을 받았다. 1970년대 ‘재일조선인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알려진 조작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형들(리쓰메이칸대학 교수인 서승과 인권운동가인 서준식)의 석방과 한국 민주화를 위해 활동한 경력이 있다. 이때의 경험은 이후의 사색과 문필 활동, 강연으로 연결되었다.
일본에서 1991년 출간된 『나의 서양미술 순례로 한국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그 밖에 『청춘의 사신』,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고뇌의 원근법, 언어의 감옥에서』, 『나의 서양음악 순례』, 『역사의 증인 재일조선인』, 『나의 조선미술 순례』, 『시의힘 내 서재 속 고전」,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 『나의 이탈리아인문 기행』, 『나의 영국 인문 기행』, 『나의 일본미술 순례』, 『서경식 다시 읽기 2: 회상과 대화, 최종 강의』 등의 책이 소개되어 있다.
2023년 12월 18일, 향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릿터>는 한 번만 더 미국 기행 마지막 마무리로 쓰고싶고, 그 후는 조금 쉬고 나서 독일, 불란서로 갈 작정입니다.


7장 원고를 탈고한 후, 서경식 선생은 2020년 11월 16일 메일에서 이렇게 전했다.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은 바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좀처럼 마감을 어기지 않던 그가 유독 힘겨워했던 연재였다.
잠정 휴재가 결정되었고 또 훌쩍 시간이 흘러 저 맺음말‘ 글의 개고와 퇴고를 거듭한) 최종판이 도착한 날이 2023년 12월 17일이다.
다음 날 영면하셨으니, 이 책의 맺음말 「‘선한 아메리카‘를 기억하기 위하여」는 그렇게 선생의 마지막 원고로 남았다.
예기치 않게 인문 기행의 종착지가 되고 만 ‘미국‘을 뒤돌아보는 서경식 선생의 시선은 무척 어둡다. 생각해보면 『나의 서양미술 순례 이후 30년이라는 문구 아래 기획된 그의 ‘인문 기행‘은 줄곧 쓸쓸하고 암울했다. ‘슈트케이스가 또 망가졌다. (......)- P4
슈트케이스처럼 나 역시 슬슬 사용기한이 다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라고 시작한 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이 그랬고, 벤저민 브리튼 Benjamin Britten (1913~1976)의 가곡 가사 "How long, howlong? (앞으로 얼마나, 얼마나 오래 걸릴까?"을 들으며 "아, 여전히 세계는 피투성이다. 대체 언제까지? (......) 얼마나 더 시간이 흘러야 할까?"라며 탄식했던 영국기행의 나날도 다를 바 없었다. 어느 대담에서 반고흐와 모차르트, 윤이상, 존 케이지의 이름을 들며 "사실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제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일입니다. 끝없이 끝없이 계속하고 싶어요."(서경식 · 김상봉, 만남서경식 김상봉 대담』, 돌베개, 2007년)라고 웃으며 말했던 그가 조금은 편안해져 그림과 음악을 만끽하는 여행자였어도 좋았으련만.
하지만 그저 바람이었을 뿐, 나는 서경식 선생이 쉽게 마무리 짓지 못했던 미국기행을 ‘인문 기행‘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느낌으로 읽고, 옮겼다.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세계사적 위기, 정년퇴임에 뒤따른 어수선함과 건강악화같은 변화를 우선 들수 있겠지만, 그 탓만은 아닐 것이다. 서경식 선생이 직접 언급한 것처럼 ‘독자 여러분이 왕복할 세 단위의 시간대‘(131쪽) 때문이다. 그건 최근(이자 마지막으로) 미국 땅을 밟았던2016년, 두 형의 석방과 지원 활동을 위해 미국의 인권단체와 국- P5
무부를 방문했던 1980년대 중·후반, 그리고 이 책에 담긴 글을쓰던 2019~2020년이라는 시점이다.
첫 시간대는 차별주의자 도널드 트럼프가 유력 대통령 후보로 부상하던 무렵이다. 서경식 선생은 "우리는 앞으로 긴 악몽의 시대를 살아가게 될 것이다."(155쪽)라고 되뇌며 휘트니 미술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현대미술관을 우울한 심정으로 거닐었지만, 그 반대편에서 ‘선한 아메리카‘를 지켜내고자 하는 이들을 향한 희망의 마음을 접지 않았다. 두 번째 시간대는 우리에게 처음 각인된 그의 청년 시절이다. "해 저무는 하늘이 늘 피고름 색으로 보였고", "탁한 청록색의 수면 위로 허연 익사체가 두둥실 떠오르는 환상에 사로잡혔다."(「길 위에서」, 『서경식 다시 읽기』, 최재혁옮김, 연립서가, 2022년)고도 했던 시절과도 겹친다. 안전보장법, 기본적 인권, 고문 같은 단어는 알지만 "가려워요."라고 제 몸 상태하나 표현할 일상어조차 영어로도 우리말로도 꺼내지 못한 재일조선인 청년은 광활한 미국 땅에서 ‘망명자‘라도 된 듯한 고독과 비애를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도 곁에는 헤어질 때 달걀을 삶아 건네준 재일조선인 여성 B씨, 어머니를 챙기며 두 형의 판결을보러 대신 한국까지 건너가 준 소꿉친구 U군이 있었다. 인권단체의 수녀와 여자 대학생 인턴이 서경식 선생이 선물한 새 구두를- P6
신고 햇살이 내리쬐는 워싱턴 거리를 걸어가는 장면을 읽으며 눈시울을 붉혔다고 이야기하자 환해지던 선생의 얼굴이 떠오른다.
세 번째 시간대는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책의 본문을 써 내려간 시기다. 그는 참혹한 역병이 몰고 온 먹구름과 자기중심주의, 불관용이 횡행하는 "복잡하고 곤란한 상황 속에서 ‘인간‘을 다시 바라보게끔 하는 정신적 행위", "요컨대 ‘인문학‘의 기본이라고 해야할정신(131쪽)을 지키고자 악전고투하며 인문 기행을 계속했던 셈이다.


비유컨대 나의 저술은 질식해가는 카나리아의 비명과도 같은 것이다.(「책을 펴내며: 탄광 속 카나리아의 노래」, 『난민과 국민사이 임성모·이규수옮김, 돌베개, 2006년)


이 책을 읽기 위해 왕복해야 할 세 단위 시간대에 하나 더 추가해야한다면 7장과 유고(맺음말) 사이에 가로놓인 3년 남짓한 기간이겠다. 그때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2022년 7월 미얀마군부의 민주화운동가 네 명 사형 집행, 그리고 2023년 10월부터는 가자지구에서 끔찍한 유혈이 이어졌다. 그런 사태가 서경식 선생에게 미친 타격은 나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던 것 같다.- P7
미국 기행은 미완으로 남겨두었지만 이 시기에 선생은 ‘더 나빠지는 세계. 이상은 사라지고 ‘진화‘되는 세계를 향한 우려를 일간•지 칼럼을 통해 쉬지 않고 발신했다. 그의 번역자이자 편집자라는자부심과 책임감으로 놓치지 않고 찾아 읽긴 했지만, 고백하자면나는 서경식다운(서정식이니 쓸 수 있는) 글이구나.‘라고 생각하며어느 곁에 조금씩 둔감해졌던 것 같다. 또는 내 수준에서는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서경식의 감각‘이라고 변명하면서 부질없지만 그가 떠난 자리에서 광부가 갱도안으로들고 들어간다는 카나리아의 이야기를 뼈아프게 기억한다. 사람보다 먼저 일산화탄소의 농도에 반응하기에 고통을 느끼고 죽음으로서 위험을 알리는 카나리아 선생은 위기가 닥쳤을 때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경고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재일조선인과 자신의 글을 카나리아에 빗댔다. 홍콩이, 벨라루스가, 미얀마가, 우크라이나가 시간이 지날수록 진부해지듯 그의 글과 마음까지 내 속에서 그렇게 진부해진 것은 아니었을까. 카나리아의 비명을 흘려들은 건 아니었을까. 마음이 저려온다.


허락된 지면을 빌려 2023년 12월 21일, 평온히 잠든 듯 누운 서경식 선생 곁에서 파트너 F. 후나하시 유코裕子 선생이 조문객에- P8
게 건넨 인사를 독자에게도 전하고 싶다.


그가 조금 더 살았다면 분명 사람들에게 도움 되는 일을더 많이 했으리라 생각하니 아쉽기 그지없습니다. 한편, 그는 ‘인간으로서의 죄‘를 두고 내내 괴로워한 사람이었습니다. 매일이 그것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이제 겨우 싸움에서 벗어났는지도 모릅니다. 죽음을 통해 그 무거움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합니다. ‘수고했어요. 간신히 편해졌지요? 많이 애썼어요.‘라고말해주고 싶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그가) 힘을 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타자의 고통을 향한 상상력에 유달리 민감했던 디아스포라 지식인의 인문 기행은 독일로, 불란서로 이어지지 못하고 끝을 맺었다. 여행과 관련해 서경식 선생이 남긴 글 가운데 좋아하는 몇 문장을 옮겨본다.
저는 지금도 툭하면 여행을 떠나곤 합니다만, 


그것은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닙니다. ‘거주‘를 찾아 헤매는 방랑과도 같은 것이죠. 나이를 먹으며 여행을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 P9
워져 갑니다. 하지만 여행을 떠날 수 없게 된다 한들,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 겁니다. 저에게는 일상의 ‘거주‘ 또한 여행 같은 것이니까요. 그럼 봉 보야주 Bon Voyage ! (즐거운 여행을!)(서경식·다와다요코, 「경계에서 춤추다』, 서은혜 옮김, 창비, 2010년)


서경식 선생은 세상에 없지만, 거주와 여행이 다르지 않았던 그의 삶과 여정이 오래 기억될 수 있도록 힘을 다해야 할 책무가 남았다.


서늘한 가르침을 주던 스승이었고 다정한 친구였던,
그리운 서경식 선생님의 안식을 빈다.
2024년 1월 7일옮긴이 최재혁- P10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동네로 피하라.(「마태복음」 10장 21절~23절)- P13
이번 글을 준비하며 당시 여행에서 쓴 일기를 찾아보았다. 일본을 떠나 1986년 10월 2일 무렵 쓴 글에는 앞서 인용한 마태복음 구절 옆에 "근심으로 마음이 꽉 막힌 순렛길이다."라고 휘갈겨쓴 내 글씨가 있다.
나는 말 그대로 근심을 가득 안고서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인권운동단체와 시민단체, 종교단체, 국무부 인권국 등을 찾아다녔다. 뉴욕의 단체 사무소를 찾아가 보니, 고급스러운 정장을차려입은 금발의 여성 스태프가 나와 쌀쌀맞은 표정에 알아듣기힘들 만큼 빠른 영어로 "좋아요, OK, 당신에게 15분 드리죠."라고말했다. 15분! 열다섯 시간의 비행 끝에 내게 주어진 시간, 그것도더듬거리는 영어로 겨우 15분. 속이 상했지만 마음을 다잡고 기운을 내서 열심히 이야기했다.- P17
그 와중에도 나는 머무르던 도시에서 짬이 나면 혼자서 미술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결사적인 반독재 투쟁이 이어지고 있는시기였다. 형들은 옥중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런 시기에 걸맞은 바른 처신이었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사람에 따라서는그런 나를 괴이하다보았을 것이다. 나는 스물네 시간을 투쟁에 바치는 모범적인 활동가상에서는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다만 목마른사람이 우물을 찾듯, 좋은 미술 작품과 조우하기를 바라며떠돌아다니는 일이 내 자신의 생존에 필요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여행 도중에 워싱턴 DC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의 작품 「수틴의 초상과 만났다. 러시아의 유대인 마을에서 무일푼으로 파리로 건너온 섕 수틴ChaimSoutine (1894~1943), 그 거칠고 불온하지만 섬세했던 인물의 초상과 시간가는 줄 모르고 무언의 대화를 나눴다. 「수틴의 초상」은 그 후로 내 인생을 통틀어서 잊을 수 없는 작품이 되었고 나중에 졸저의 표지에도 사용했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 박이엽 옮김, 창비,
2002년 개정판)- P19
1990년에는 출소했던 형 서승을 안내하기 위해 미국을 찾았다. 석방 지원 운동에 힘써주었던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하버드 대학을 방문하면서 대학 부속 포그 미술관에서 반고흐 Vincent van Gogh (1853~1890)의 「머리를 민 자화상을볼 수 있었다. 나치가 퇴폐예술로 낙인찍어 루체른에서 경매에 부친 탓에 파괴를 면해 이 대학에 소장되었던 것이다. 나에게 이초상은 마치 긴 복역을 끝내고 막 출소한사람처럼 보였다.
미국에는 친구나 지인도 있고, 좋은 미술관도 있으며 훌륭한오페라나 콘서트 공연도 많다. 그런데도 그 이후 30년 정도 미국에는 그다지 발길을 두지 않았다. 트럼프(이 여행 당시는 아직 대통령후보자였다.)와 같은 존재, 단적으로 말해 반지성적이고 오만한 자기중심주의가 대두하면 할수록 미국을 향한 나의 기피감도 점점심해졌다. 하지만 2016년이 되어 오랜만에 뉴욕에 가볼 기회가생겼다. 코스타리카 대학 교수로, 신뢰하던 친구 C 교수가 초청- P21
강연을 의뢰했기 때문이다.
C교수는 한국인 여성이지만 수년 전에 과감히 한국에서 코스타리카 대학으로 떠났다. 거기서 살아보며 한국에서 매일 느꼈던 스트레스가 줄었다고, 좋지 않았던 몸상태가 금세 회복되었다고 말했다. 그런 교수가 권유한다면 조금은 무리를 해서라도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검토해보니 코스타리카는 너무 멀었다. 일본에서 출발하는 직항편은 없고, 텍사스주 댈러스나 뉴욕을 경유하는 환승편을 이용해야만했다. 고민 끝에, 어차피 간다면 이참에 오고갈 때 뉴욕에 들러 시간을 내서 예전에 방문했던 장소를 다시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않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제 내 나이를 생각하면 앞으로미국을 여행할 기회는 더 이상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자 먼 옛날 기억의 단편도 되살아났다. 좋은 기억만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나라는 인간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고 있는, 그런 절실한 기억이다. 그 기억들은 내 속에 있는 ‘선한 아메리카‘의 기억과도 연결된다.
이런 까닭으로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을 시작한다. 출발하면서부터 아끼던 모자를 잃어버리긴 했지만.- P23
나는 미숙하고 완고한 젊은이였다.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먼저 커뮤니케이션 문제가 있었다. 상의를 하고 있을때도 그것이 영어이건 한국어이건 당시의 나는 자세히 이해할 수 없었다. 모두가 사사로운 일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있을 때, 뭐가 우스운 걸까 알 수 없어서 상처받기도 했다. 누군가의 집에서 회의가 있던 어느 날, 내가 앉아 있던 의자가 갑자기 망가져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재미있어하며 웃었지만 나는 웃을수 없었다. 누군가가 돌아가기 전까지는 나를 숙소까지 데려다줄 사람도 없었다. 사람들은 한가롭게 담소를 나눴고 나는 한시라도 빨리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 말조차 꺼낼 수 없었기에 그저 잠자코 참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다. 30년 후에 찾아온 데자뷔의 감각이 그때의 긴장감과 불안을 또렷이 되살려냈다.- P33
음악이나 미술과 관련된 취향은 나와는 전혀 맞지 않았지만, 재일조선인으로서 가졌던 근심과 울분은 공감할 수 있었다. 풋내 나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정작내 자신의 상황은 모른 체하고, 한국인인데도 일본어를 쓴다거나 일본가요를 부른다며 꽤 비판적으로 그녀를 바라보기도 했다. 돌아보면 집회나 회의에서 익숙지 않은 영어나 한국어로, 그것도내 형제가 지금 어떤 고문을 받고 있는가 같은 무거운 내용을 말하는 것은 마음이 뒤틀리는 일이었다. 그랬던 나는 B 씨와 모어(간사이 사투리의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며 나도 모르게 위로받고있었던 셈이다. 당시의 나는 아직 그런 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지라도.- P37
그런 B 씨는 나를 지원하는 사람들중에서도 이질적인 소수자였다. 다만 당찬 성격이고 죽는소리 같은건 하지 않아서, 타인의 동정은 ‘노상큐‘였다.
얼마나 힘겨운 삶이었을까, 얼마나 불운했을까. 심약한 나는바로 그런 생각을 해버렸다. 미국 한구석에서 만난 이 불운한 여성,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나 같은 인간에게도 살아가는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만,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런 말을 입에 담는다면 도리어 상처를 주게 되기 때문이다. 그녀의 마음이어떨지 알 수 없다. 나같은 사람의 쓸데없는 참견은 ‘노상큐‘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나는 직업도 없는 젊은이였고 병든자였다. 정치범의 가족이며 매일같이 옥중에 있는 형들의 석방을 호소하며 다니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그들이 살아서 출옥하리라는 희망을 거의 갖고 있지 않았다. 나자신의 내일이 어떨지조차 전혀 내다볼 수 없었다. 그녀를 동정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이 위로받고 싶었던 것뿐이지는 않았을까.- P39
나와 B 씨는 호퍼의 그림처럼 한산하고 고요하기 그지없던 카페에서, 서로의 고독을 강하게 느끼면서 말없이 한참을 앉아있었다. 입을 열면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를 말해버리고 말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본으로 돌아가는 날, B 씨는 공항까지 배웅을 나와, "비행기에서 먹어."라며 오늘 아침 삶았다는 달걀을 대여섯 개 건네줬다. 언젠가 내가 삶은 달걀을 좋아한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게다.
그때의 감각이 30년 후에 되살아났다. 거꾸로 말하면 60대중반을 지난 내 자신이 뜻하지 않게 30대로 다시 돌아간 셈이다. ‘젊다‘고 해서 반드시 즐겁고 기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일에 어쩐지 어색하고 미숙하며, 가시가 돋혀 있으며, 더할 나위 없이 고독하기도 하다. 그런 감각까지 맨해튼에서 되살아났다. 30년전의 나는 광기와 죽음의 갈림길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 갈림길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지인들도 적지 않다. 그때 나는 지금 이 나이까지 살아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B 씨는 지금도 건강할까. 그때의 일을 생각해낸 것도 호퍼의 작품이 가진 힘 때문이다.-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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