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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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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일의 능률만 생각한다면 가까운 데서 도울 인력을 구하는 편이 손쉬울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아주 가끔은먼 곳에 있는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유는 그러는 게 사람들과 땅을, 또 사람들과 사람들을 연결시켜주는 일인 것 같아서입니다. 그 어딘가에 자기가 심은 꽃이나 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건, 또 그걸 보러 가는 건 그냥 봄나들이와는 다른 힘을 주지 않을까요? 서원 안에는 누군가의 손길이 만든 꽃밭들, 아주 멀리서 보내온 씨앗들이 싹터서 자란 꽃밭들도 있습니다. 나무들도, 이름표를 달기도 하고 안 달기도 했지만 제각기 주인이 있습니다. 그주인들은 서원에 오면 자기 나무 주변의 잡초라도 뽑고갑니다. 나에게는 나무들이 그저 나무이기만 한 것이 아니고 또 그 누군가이기도 합니다. 이즈음 여기저기서 누군가가 뿌려놓고 간 씨, 심어놓고 간 알뿌리에서 놀랍게 고운 것이 돋아나고 꽃피어납니다.
- P98
꽃과 나무를 기르는 것은, 또 꽃과 나무가 자라듯 무언가 뜻과 보람이 천천히 자라나는 일을 하는 것은, 마치 아이를 기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생각해보면 두렵기는하지만, 그래서 출산율도 이 지경으로 곤두박질친 것이겠지만, 막상 아이를 길러본 사람들은 대개 아이에게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걸 압니다. 굳이 주고받는 일로 따져보더라도 말입니다. 다른 일들도 사실얼마만큼은 그런 것 같습니다. 나아가 내 아이에게 쏟는 마음을 조금만 주변에, 또 일에 나눈다면 사회적인 안정감은 물론 우선 나 자신의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P99
무언가 뜻과 보람이, 꽃과 나무가 자라듯 자라나는 일이 세상에 따로 있지 않습니다. 돌아보면 평생의 애씀이. 제가 하고 있는 힘겨운 노동에다가 어떻게든 뜻과 보람을 더해보려는 노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노동에 또 무얼 더하려니 등이 휠 것 같았지만, 덕분에 굽어지려던 제 등뼈가 오히려 좀 바로 선 것 같기도 합니다. 오로지 돈을받기 위하여 일한다면, 무슨 일을 하든 그야말로 막노동일 것이고 그 벅찬 노동의 와중에서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 더 힘든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배려해가면서 조금이나마 좋은 뜻을 심어가면, 그 작은 뜻들이 쌓여서 무엇보다 나 자신의 버팀목이 될 것입니다. 그런 ‘보람과 뜻 ‘을- P99
누가 나에게 줄 수 있을까요.
새벽녘까지 이 글을 쓰다가도 잠깐 눈 들어 창밖을 내다보니 어제까지 누렇던 잔디밭 전체가 파릇파릇합니다. 비껴 내린 첫 햇살 속에서 연초록이 눈부십니다. 어제 잠깐 내린 비가 초록빛 물감 묻힌 붓을 들어 천지를 한 획으로 칠해놓고 간 것입니다. 이런 기쁨을 선물받았는데,
잡초 제거 정도의 답례는 흔쾌히 해야 하지 않을까요. 찾아오는 나무 주인들도 기쁘게 거닐 텐데 말입니다.- P100
수천 권의 책 속에서 진실로
혹은 우화로 그대에게 나타나는 것
그 모든 것은 하나의 바벨탑에 불과하다
사랑이 결합시켜주지 않으면


사랑이 빠져 있는 모든 것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괴테는 일찍이 파악했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도 사랑이 참 유난했습니다. 사람에 대한 것이든, 자연에 대한 것이든 다 그랬습니다. 언젠가 한번 마음을 끈 것, 그 마음에 위로를 준 것은 오래오래 사랑했습니다. 눈여겨보았던 꽃에대해서는 평생 식물 연구가 이어졌고, 언젠가 마음을 의탁했던 바위에 대한 추억은 평생 지질 연구를 하게 했고,
언젠가 한번 신비롭게 본 색채 현상에는 40여 년 동안의- P104
광학 연구가 이어집니다. 남겨진 업적들은 사람과 자연에대한 그의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더구나 사랑이야 말해 무엇할까요. 한 사람에게 1800통이 넘는 편지를 보내며 괴테는 말합니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 편지의 자모 하나하나가 당신에게 그 말을 할 거예요."
그런 지극한 사랑이 있었기에 사랑 없음의 공허함도크게 느껴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파우스트」의 캐릭터 메피스토펠레스의 설정에서 대표적으로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악마는 그저 악마가 아니고 참으로 매력적인, 주인공 파우스트를 능가하는 매력을 가진 캐릭터입니다. 얼마나 옳은 말만 골라 하는지요. 그야말로 쿨하고, 시니컬한 그의 대사들은 그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P105
앞서 말한 바 있지만,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빠져 있는것 단 한 가지가 바로 사랑입니다. 그럼으로써 매끄러운 현대적 악의 화신이 참으로 설득력 있게 그려질 수 있었지요. 그런 사유의 끝머리에는 대담한 명령문도 놓입니다.


그대 나만큼 오래 떠돌았거든
나처럼 인생을 사랑하려 해보라- P105
큰 돌들이 바닥에 박혀 있는 여백서원의 진입로 바닥에는 군데군데,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돌멩이들이 큰 바닥 돌들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바를 정자, 어질 인자를 담은 손바닥만한 돌들입니다.
이 서원의 진입로, 작은 찻길에서 서원 대문에 이르는얕은 언덕길은 좀 유별납니다. 누군가가 만들어준 길인데, 그 자체만으로도 서원을 지은 뜻을 가득 담고 있습니다. 길 좌우에 고마운 사람들을 위한 소나무들이 줄지어서 있는데, 각각 "제자들을 위한 나무" "스승들을 위한나무 학문의 길을 함께 간 소중한 사람들을 위한 "동학마들의 나무, 다시 또다시 아끼는, 고마운 "제자들을 위한 나무‘ ‘서원 지키미들을 위한 나무"에다 옛 학창 시절큰 도움을 받았던 장학재단의 고마움을 기억하는 나무들 ‘우산‘ ‘경인송‘에서 ‘애독자의 나무"까지 그 의미가 매우 다채롭습니다.
진입로 첫 부분의 바닥은 단정한 네모 돌을 차곡차곡놓아 올라가도록 했는데, 나름대로 책의 모습을 담았습- P106
니다. 그 길을 만든 사람이 제가 마지막 수업을 하며 했댄 마무리 말 글 배워 책 읽었거든 바르게 살라는 당부를 기억하며 그렇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위로 큰 돌들을 바닥에 깔면서 사이로 군데군데 ‘‘자와 ‘‘자를박아넣으면서요진입로의 얕은 오르막이 끝나는 대문 오른쪽 기둥 아하는 자그마한 돌이 두 개 함께 놓여 있는데, 하나는 매끄럽고 갸름한 돌에 새겨진 ‘‘이란 글자이고, 또하나는 거친 돌에 새겨진 ‘Liebe‘라는 독일어 단어입니다.
유학의 정언명제라 할 ‘仁‘은 공자 자신의 해설을 따르자면 ‘애인‘ 즉 ‘사람을 사랑함‘입니다. 마을에 사람 사는 곳에 사랑이 있어야 함을 역설한 것이 논어의 ‘인‘
편입니다. 사실 무언가 거창한 주장을 하고 싶었던 것이아니라 나는 그저 서원이 이 작은 마을이 사랑으로 가득찬 곳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빌려 담고 싶었습니다.
‘인‘으로 채워진 동네. 뭐 그렇게 읽히기를 바랐습니다.- P107
꿈의 실현같이 좋은 일에도 조금씩 쌓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물며 어렵고 문제 많은 일들에서야 더욱더 그렇지 않을까요? 그런데 조금씩 고쳐가고 쌓아가는 일에우리는 별로 익숙하지 않은 듯합니다. 뭐든 확 바꾸고 와장창 뜯어고칩니다. 확 바꾸면 있던 그 문제야 사라지지만 대신 다른 문제가 무더기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데도문제 해결 방식이 대체로 그렇습니다. 사회적, 역사적으로도 이즈음은, 그사이 쌓인 문제가 워낙 많은 터라 그렇지만, 마치 드디어 꿈을 실현할 때라는 듯 여기저기에서 때로는 무리해 보이는 청사진이 쏟아져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집이야말로 조금씩, 최소한 몇십 년은 내다보며, 올바른 생각과 수단을 통해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꿈도, 집도 금방 폐가가 되어버리고 말것입니다.- P114
쓰고 있는 글에다 그 순간 가장 절실한 것을 그만큼 쏟아부었다는 뜻일 겁니다.
언제든 그 순간에, ‘현재‘에, ‘지금 여기‘에 충실했다는 것입니다. 당면한 문제를 생각하고, 그것을 글로 씀으로써 하나의 이미지로 모아서 문제를 선명하게 파악하고, 늘그런 식으로 그 한 문제를 넘어섰습니다. 생애 중 실의로 주저앉았던 한 대목에서 괴테는 썼습니다.


눈은 무엇보다 내가 세계를 포착하는 기관이었다. 나는어린 시절부터 화가들 사이에서 살았고, 대상들을 예술과 연관시켜 바라보는 데 익숙했다. 내가 나 자신과 고독에 전적으로 자신을 내맡긴 지금, 절반은 선천적으로 절반은 후천적으로 이 재능이 나왔다. 어디를 바라보든 나는 그림/이미지 하나를 보아냈으며, 내 눈에 뜨인 것, 나를 기쁘게 한 것을 붙잡아두려 했다. 그리하여 서툴게 그리기 시작했다.- P116
세상의 문제가 회피해서 해결될 리 없습니다. 정면으로 대결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곧바로 답이 찾아진다고생각하면 안 됩니다. 생각해보면, 세상의 문제에 원천적으로 답은 없습니다. 답이 있고 해결책이 쉬이 있으면 그게 문제이겠습니까. 얼른 답을 내려고, 답을 내어 그것을벗어나려고 모두 노력하지만, 때로는 발버둥을 치지만, 쉽게 찾아진 답은 장기적으로 계속 답이 되기 어렵고 그래서 답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문제가 무엇인지 알면, 문제의 전모를 바르게 파악하면, 기이하게도 생겨나는, 문제를 감당해가는 힘, 그 힘이, 답은 없지만 그중 답의 근사치일 수 있습니다. 그 힘으로 모색이 이루어지며, 그 길에서 쌓이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다보면그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슬기가 생기기도 하고, 문제 쪽에서 슬그머니 알아서 풀리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P117
"헤르만 헤세 괴테와 같은 독일 작가들뿐만 아니라, 움코와 같은 철학자. 케빈 켈리 같은 미래학자, 유발 하라리 같은 역사학자, 재러드 다이아몬드 같은 생물학자들이 이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 찾아낸 깊은 의미와 재미를 같이 즐길 수 있게 해주고, 제가 살아가는 순간들을 감사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순간들의 특별한 의미에감동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여백서원과 같은 공간이 번창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에서, 크지는 않지만, 앞으로도 읽은 책 정가만큼이라도 송금하고, 독후감도 쓰려고 합니다."
이렇게 읽힌 책들을 모아 숲속의 작은 ‘책 오두막‘ 한채를 채울 꿈으로, 이즈음이 참 행복합니다.- P146
세상이 진정으로 나아지려면, 정치인들부터 부디 주판을 내려놓고 사심 없이 의논하고 지혜를 모아야 하겠지만 우리가, 무력감만 끝없었던 시대를 지나 이렇듯 새로운 걸음도 뗄 줄 아는 우리가, 우리의 뜻에다 꾸준함을 더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무엇을 시작하는 첫 마음을잃지 않고, 세상을 걱정하며 잡았던 서로의 뜨거운 손을놓지 말고, 무엇보다 누구든 제자리에서 하던 일에서 손을 놓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각자 자기 일을 성심껏 해가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세상을 만드는 첫걸음이라 생각합니다. 불의에 대해 눈 부릅뜰 줄 알아야겠지만 주변 또한 돌아볼 줄 알고, 분수 넘게 이것저것 사느라 혹은 허겁지겁 남 따라가느라 허덕이던 손길로 제 옷깃도 좀여며볼 줄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 우리의 자긍심을 세우는일이 아닐까요. 모두가 뜨거운 가슴으로 자기 안의 등불을 켜는 시간이야말로 그 모든 것을 위한 성찰의 시간이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P162
"자기 삶을 치열하게 살았던 큰 사람들을 보면, 어쩌면생의 감각을 가장 치열하게 들으며 살았기 때문에 그게가능했던 것 같은데, 그걸 포기하도록 요구받던 사람들은 거리에서 그 길의 입구를 만나게 되는 건 아닌가 해요"
제가 안 한 말까지 짐작하고 있는 그 명함이 좋아서, 문득 머릿속에 "청출어람청어람靑出於藍靑於藍"이라는구절이 스쳐 지나갑니다.
"요즘은 앞으로 살아갈 길의 방향을 만들어나가야겠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됩니다. 사례로 드신 괴테의 행적을 보면 자기가 모든 세상을 고민하고 자기가 모든일을 할 수 있다는 자긍심을 가졌던 것 같은데, 저도 그부분을 정말 닮고 싶더라고요. 자긍심과 능력은 그에게있어서 상호 고양적인 힘이었던 것 같은데 저도 그런 선순환에 오를 수 있을까 동경해볼 때도 많고요."-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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