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전체보기

알라딘

서재
장바구니
길 위에서

아마도 혼자서는 처음 나섰을 먼 길을 오며 이 작은소년은 무엇을 느꼈을까요? 어느 순간에는 방향을 잃어혼란스럽고, 혹 두려웠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소년에게는 올 곳이 있었고, 그곳에 닿기 위해서 용기를 낼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방황할 일도 없겠지만, 새로운 경험으로 세상을 배울 수 있는 기회 또한 없겠지요. 예전에야 그 나이에 공부를 하러 아주 집을 떠나기도 했지만 요즘에는 동화 같기만 한 이 이야기가 어쩌면 우리의 인생 여정처럼 느껴져서, 가만히 곱씹어 생각하며 한동안 들여다보았습니다.- P13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선한 인간은 바른 길을 잘의식하고 있다." 이 부연의 문장에서는 비문이 더욱 두드러지게 보입니다.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인간, 단순히 생각해보면 그저 나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선함이 있을 수 있고,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혀 있어도 그 선의 알맹이가 있기에 그에게는 바른 길의 의식도선연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이해하라, 용서하자가 아닙니다. 이 비문은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에게 던지는 참으로 큰 포용의 메시지입니다. 이 얼마나 잊히지 않는 커다란 껴안음인지요.- P17
사람은 늘 무엇인가에 추동되어 살아갑니다. 꿈이든, 이상이든, 사랑이든, 야심이든, 그 어떤 욕망이든 말입니다. 추동력은 좋은 동기가 되는 것이지만, 그것이 과해지면 스스로 시달리고 실족도 하고, 민폐도 끼치고, 악행도저지를 수 있습니다. 사회의식이나 윤리나 교육, 종교 등은 모두 궁극적으로, 이 과잉 부분을 개인이 조금 조절하게 하여 충돌이 적은 공동의 삶이 가능하게 하기 위한규제 장치의 개발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금 과잉되어도 자신이나 남에게 해가 없거나 적은것은 세상에 없을까요.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이득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럴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를- P24
테면 주는 사랑 같은 것. 그러나 바라는 것 없이 주기만하는 사랑처럼 그렇게 성스럽고 비범하지만은 않은, 현실적인 무엇이 없을까도 생각해보게 됩니다.
알고 싶은 마음. 아마도 주는 사랑 다음으로 그런 것에 가까운 것 아닐까 합니다. 어린 아이들의 호기심을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온갖 것을 만져보고,
먹어보고, 해보며 세상을 알아가는 아이들. 아이들은 심지어 꽃도 꺾어보고 쥐어뜯어보고, 곤충도 해체해볼 때조차도 스스로 세상을 알아가고, 옆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어른도 행복합니다.- P25
그리하여 우리는 대단한 한 생애를 거쳐 다시 원점의물음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로 말입니다. 파우스트라는 인물의 어마어마한 방황 앞에서 나의 보잘것없는 방황쯤은 충분히 용서할 만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도도한 서구 문명 3000년을 누빈 듯한 느낌과 함께 방황하는 저자신도, 방황하는 많은 다른 이들도 껴안을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흉내야 못 내지만 시늉이라도 해보려고, 저 역시 오랫동안 공동체를 위한 공간을 생각해왔고 그 끝에 여백서원도 지은 것 같습니다.

사실, 첫머리에 이야기한 소년의 아버지가 저의 옛 제- P28
자입니다. 소년이 돌쯤 되어 첫발을 땅에 디디던 어느 날,
아이를 데리고 와서 서원 뜰에 나무 한 그루를 심었습니다. 소년은 오래된 자기 연고지를 찾아온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제 자기를 위해 심은 밤나무 묘목을 붙들고사진을 찍었던 그의 첫돌 맞이가, 어느새 훌쩍 자라 데미안을 손에 들고, 온갖 질문을 품고, 혼자서 저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저 예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소년 하나가세상에 대한 신뢰를 저에게 심어주었습니다. 너무나도 어지러운, 때로는 참혹한 뉴스들이 횡행해서 갈수록 TV 화면을 쳐다보기도 겁이 나는데, 그렇게 손에 책을 들고 나타난 소년은 정말이지 맑은 샘물같이 귀했습니다. 다음번에는 자고 가겠다고 했기에, 소년을 위해서 다락방을 잘치워두었습니다.- P29
"그대 ‘선‘에 대하여 보답을 받았던가?"
나의 화살은 고운 깃 달고 날아갔다오.
온 하늘 열려 있었으니
어디엔가 맞았을 테지요.


좋은 뜻으로 시작했건만 일은 자주 꼬이고, 좋게 만났건만 준 것도 많건만 인간관계는 가끔 험하게 틀어지기도 합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알면서도 수긍에 시간이걸립니다. 그런데 여기저기 숨긴 것처럼 작은 시판들이놓여 있는 서원의 오솔길, ‘괴테 길‘에서는, 가운데 있는높은 전망대에 올랐다가 내려오면, 첫 시비에서 돌연한물음을 만나게 됩니다. "그대 선에 대하여 보답을 받았던- P30
가?"
화살 하나, 고운 것이 달린 화살 하나의 은유가 눈부셔서 시어의 힘을 확인하게 되는 짧은 시입니다. 시와 지혜의 어울림이 부드럽고도 참 힘있습니다.
단도직입적인 물음으로 시는 시작됩니다. "선에 대하여 보답을 받았던가?" 제아무리 대가를 생각하지 않았더라도, 제아무리 마음을 비운다 해도 범인인 이상, 뭔가 좋은 일을 하고 난 사람의 마음 바닥 어딘가에는 남아 있게 되는 보상심리의 잔재를 이 물음은 정조준합니다. 그러나 부드럽게 풀어냅니다. 그 열림과 너그러움이 읽는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남습니다. 영롱한 오색 깃털을 단화살이 방금 눈앞을 날아가는 걸 본 것 같기도 합니다.
은유의 힘이 참으로 큽니다.- P31
은유Metapher의 힘. 만인이 아는 구절들을 떠올려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보복의 양형인 것처럼 들리는이 오래된 함무라비 법전의 경구가 실은 똑같이 보복해주라는 것이 아니라 응징이 도를 넘으면 안 된다는 경계라고는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여도, 좀 무섭습니다. 차용된 이미지가 무서울 만큼 무자비하게 선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오래 인류의 기억에 남아 있기도 할 것- P31
입니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 성서의 사랑의 복음도 온유함과 겸손을 설파하고 있지만 역시 강합니다. 손‘이라는 구체적 이미지의 동원으로, 전하려는뜻이 무서울 만큼 강렬합니다. 전하려는 강한 뜻 자체가절대적으로 선명하고, 그것이 은유의 힘을 빌려 더더욱강해졌습니다. 두 구절 다 시적 은유의 힘이 두드러져 보이는 좋은 예입니다.
그러나 시는 어떤가요. 역시 은유에 힘입고 있는데구나 온유는 이 한 장의 그림은 시의 요체지요- 우리의시는 어떤가요. 어떤 폭력도 없습니다. 아름답고, 부드럽고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마음에 남습니다. 아무런 강요가 없습니다. 참 고운 깃 달고 날아갔다니 온 하늘 열려 있었으니 어디엔가 맞았을 거라니.
그 무한한 열림과 너그러움이 그냥 아름답게 마음에 남습니다.- P32
들장미


보았네 소년이 작은 장미
들에 핀 장미
갓 피어 아침처럼 고왔네
얼른 달려갔네. 소년은 가까이서 보려고
큰 기쁨으로 바라보았네
장미, 장미, 장미, 붉어라
들에 핀 장미

소년이 말했네 널 꺾을 테야
들에 핀 장미
장미도 말했네 널 찌를 테야
네가 영원히 날 생각하도록
그리고 참고만 있지는 않겠어.
장미, 장미, 장미, 붉어라
들에 핀 장미

그 거친 소년이 꺾었네
들에 핀 장미
장미는 거부하며 찔렀네- P33
‘앗‘도 ‘아얏‘도 소용없었네
참을 수밖에 없었네
장미, 장미, 장미, 붉어라
들에 핀 장미

참으로 소박하고 평범해 보입니다. 짧은 이야기를 담고있습니다. 그리고 발라드입니다. 발라드, 독일어로 발라데 Ballade는 서정적, 서사적, 극적 요소가 짧은 시에 집약되어 있는 형식입니다. (괴테는 이를 장래의 모든 것이 담겨있는 어떤 원초적인 알 같은 것, 원란이라고 불렀습니다.)- P34
시는 메타포를 통해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는 것이 있지요. 사람의 마음속을 오가는 것, 시인은 그얽힘, 착종을 들여다보고 헤아리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아직도 젊은, 그러나 깊어진 눈길로 더 자신을 들여다보던 즈음의 어느 밤, 어스름한 달빛 속을 거닐며 시인은 씁니다.


달에게

너 다시 수풀과 골짜기를 채우는구나
고요히 안개의 광휘로
너 마침내 다시 한번
나의 영혼마저 모두 풀어놓는구나- P38
너 나의 벌판 위로 펼치는구나
어루만지며 네 눈길을
친구의 눈처럼 온화하게
내 운명 위로

기쁨의 시간이며 슬펐던 시간
그 모든 여운을 나의 마음은 느낀다
나는 거닌다 기쁨과 고통 사이
고독 속을.

흘러 흘러라, 강물아!
결코 나 즐거워지지 않으리니
그렇게 장난도 입맞춤도 사라진다
사랑의 맹세 또한 그러하리.

하지만 나 한 번 소유하였더라
그토록 값진 것을!
고통 속에서도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을!

철철 흘러라, 강아, 골짜기를 따라- P39
그침도 멈춤도 없이
철철 흘러라. 내 노래에다
선율을 넣어다오

네가 겨울 저녁
성난 듯 넘치거나
봄의 찬란함 에워싸고
어린 꽃봉오리 솟거든.
행복하여라. 세상 앞에서
증오 없이 자신을 닫는 이
한 친구를 가슴에 안은 이
더불어 즐기는 이

사람들이 알지 못해도
혹은 유의하지 못해도
가슴의 미로를 지나며
어둠 속에서 오가는 것
그것을 더불어 즐기는 이.- P40
청년 괴테가 이 시를 쓴 건 가닿을 길이라곤 없는 사람을 막막히 사랑하던 시절이었고, 또 사랑으로 괴로워하다가 그 집 앞 작은 강에다 몸을 던진 한 젊은 여성의 시신을 수습해주고 난 어느 겨울밤이었습니다. 시인은 거닙니다. 그저 강가가 아니라 "기쁨과 고통 사이를" "고독 속‘을 거닙니다. 외로움이 하나의 장소 같습니다. 그가 거닐며 살아갈 강가, 삶의 터 같습니다.
그렇게 운명을 생각하며, 젊은 시인은 작은 강가 작은 집에다 고요히 자신의 거처를 짓습니다. 시를 씁니다. 자신의 세계를 짓고, 고요히 들여다봅니다. 사람의 마음속을, 운명을, 그 얽힘, 착종을 예리한 눈길로 들여다봅니다. 예리한 눈길이지만, 깊고 그윽합니다.
그런 눈길로써 진정한 시작詩作은, 진정한 글쓰기는 제대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P42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