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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선물


그에게 시간을 선물했네
나에게 남겨진 모든 시간을
심장이 멎은 뒤에도
두근대며 흘러갈 그 시간을
친구가 눈감던 날
나 문득 두려움 느꼈네
이 사랑 영원할 수 있을까
그에게 시간을 선물했네
나 죽은 뒤에도 끝없이 흐를
여울진 그리움의 시간을
시인


그대에게 가닿고 싶네
그리움 없이는 시도 없느니
시인아, 더는 말고 한평생
그리움에게나 가 살아라
바람 부는 날


송정으로 드라이브를 했다
선생은 차창 너머로 내다보며
바닷물이 정말 짜냐고 그러신다
젊은 시인 하나가 신발 벗고 달려가
숫된 아침 파도 한움큼을 모셔온다
놀랍지만 누구에게나 신성한 의식 같은
첫 경험이라는 게 있는 법이라고 생각하며
고운 사람 하나 숨겨두고 싶을 만큼
작고 예쁜 어촌 마을을 더듬어 돌아나온다
일행 중 누군가가 탄식하듯 바람에 눕는
을숙도 갈대숲이 보고 싶단다
생각느니 바람처럼 살아온 나날
나는 이 나이 되도록 새들이 깃들인
아직 처녀인 갈대숲을 눕혀본 일이 없다
곰삭은 젓갈 같은


아리고 쓰린 상처
소금에 절여두고
슬픔 몰래
곰삭은 젓갈 같은
시나 한수지었으면
짭짤하고 쌉싸름한
황석어나 멸치 젓갈
노여움 몰래
가시도 삭아내린
시나 한수 지었으면
근황
2009년12월15일의 기록


암 수술 받고 병원 문을 나서다보니
골목 한켠으로 영안실이 눈에 들어오고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의 내일을 위해
인쇄소는 새해 달력을 찍느라 분주하다
생각느니, 죽음과 삶의 경계는 무엇인가
후미진 세월 모퉁이에서 몰래 만나
입 맞추듯 서로 피를 빠는 이 황홀경!
시가 어디 아픈지


시가 어디 아픈지
이마에 열이 나서
백담사나 어디
마음 서늘해질
계곡물 소리로 식혀볼까 하고

무릇, 시란,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의 숨소리같이

생각하며 길을 나서서
시는 쓰다 말고
원고지는 그냥 놔둔 채
차가운 바위에 손을 얹어보고
눈시울 붉어지도록 뺨도 대보고
바람의 노래


한라산 꼭대기에 올라
귀 기울여보라 제주에서는
바람도 파도 소리를 낼 줄 안다
여기는 천상에 속한 나라
누구든 이곳에 오려거든
무기를 버리고 오라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노래하기 위해 세상에 왔다
바람이 노래하는 이 장엄!
하늘이 바다고 바다가 하늘이다
표절


사랑은 길들지 않은 말과 같아서
고린도전서에 가둘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사랑한다는 말 그 앞에 있어
누가 무슨 말을 해도 표절이 되지요
나의 아코디언


이것은 가슴을 여는 소리
설레는 내 마음 들었느냐
오직 너만을 그리워하는
골 깊은 이 가슴 보았느냐
우리나라가 아름다운 것은


너도밤나무가 있는가 하면 나도밤나무도 있다
그런가 하면 바람꽃은 종류도 많아서 너도바람꽃 나도바람꽃 변산바람꽃 남방바람꽃 태백바람꽃 만주바람꽃 바이칼바람꽃뿐만 아니라 매화바람꽃 국화바람꽃 들바람꽃 숲바람꽃 회리바람꽃 가래바람꽃 쌍둥이바람꽃 외대바람꽃 세바람꽃 꿩의바람꽃 홀아비바람꽃 등 종류도 많은데 이들은 하나같이 꽃이 아름답다
어떤 이는 세상에 시인이 나무보담도 흔하다며 너도 시를 쓰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시인이 많은 게 무슨 죄인가 전국민이 시인이면 어떻단 말인가 그들은 밥을 굶으면서도 아름다움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다 우리나라가 아름다운 것은 시인이 정치꾼보다 많기 때문 아닌가
그리운 나무


나무는 그리워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애틋한 그 마음 가지로 벋어
멀리서 사모하는 나무를 가리키는 기라
사랑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나무는 저리도 속절없이 꽃이 피고
벌 나비 불러 그 맘 대신 전하는 기라
아아, 나무는 그리운 나무가 있어 바람이 불고 바람 불어 그 향기 실어 날려 보내는 기라
여름은 가고


가을은 허공이 깊어가는 계절
철 지난 바닷가에서 고개 숙인 채
모래를 차며 걷고 있는
저이도 잃어서는 안될 무얼 잃은 걸까
오래 지니고 있던 뜨거운 것들을
잃어버린 가슴 한구석이 텅 빈 듯
오오 지나온 일들을 생각느니
서쪽 허공을 헤아릴 수나 있겠는가
젖은 수평선이 그렁그렁
눈시울에 와 굽이칠 뿐
봉화산

당신 떠난 그 자리에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당신 떠난 그 자리에
사람들이 서성이며 울고 있습니다
아아 천둥 번개 비바람 지난 뒤에도
당신 떠난 빈자리에
사람들은 숲이 되어 서 있습니다
유목민


아마도 사랑에는
유목민의 인자가 들어있는 게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랑 끝에
다시 그대를 그리워할 수 있겠는가
여전히 나는 배가 고프고
사랑에는 죄가 없네
님이여 그대 평생 일군 초원으로
나는 내 어린 짐승들을 몰고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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