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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딸의 편지
강은교


엄마, 여긴 추워요
엄마, 여긴 진흙이 너무 많아요
진흙이 내 팔을 휘감고 있어요
진흙이 내 입술을 꼼짝달싹 못하게 하고 있어요

엄마, 오빠의 차가운 팔이 나를 움켜잡고 있어요
오빠의 가슴 위로 진흙이 달려와요

아, 나를 진흙이 먹고 있어요
숨을 쉴 수가 없네요

진흙이 내 머리칼을 딱딱하게 해요
엄마가 황홀히 쓰다듬으며 땋아주던 머리칼
‘참 탐스럽기도 하지‘
엄마의 웃음소리 검은 물 위로 떠가요

버려진 심장 가득한 바다의 저 방- P13
어둠의 보따리들 사이로 둥둥 떠다니는 
피톨들
물의 검은 터널 속, 터널의 검은 입속
허우적이는, 미처 눈 못 감은 피톨들

어른들은 기다리래요
어른들은 춤추면서, 우리들의 바다를 밟아대면서
기다리래요, 기다리고 또 기다리래요

이젠 안 돼요, 더 이상은 기다리지 않을래요

어른들은 나를 두고 가버렸어요
이제 나는 떠나가요
나는 지금 어둠 속에 눈 꼭 감고 있어요
파도에 결박되어

평화란 이런 것인가 봐요, 아무도 없는 것,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진흙들만 살아서 나를 먹어버리는 것, 진흙의 거품이 되는 것- P14
나는 어른들이 평화를 접시 위에 놓고 맛있게 입맛 다시는 것을
평화의 쌈을 싸는 것을 보고 있어요
그래요, 엄마, 난 어젯밤엔 배추가 되는 꿈을 꿨어요
배추가 되어 엄마의 손길에 쓰다듬어지는 
꿈을
방방곡곡 맛있게 적시는 꿈을
엄마의 향기 피어오르는 평화의 소금간이 되는 꿈을

그래요, 엄마, 나는 노오란 꽃잎 배추가 되어 엄마의 뜰에 누울 거예요
노오란 꽃잎 배추가 되어 엄마의 부드러운 주름에 누울거예요
소금간이 되어 엄마의 혀끝에 앉을 거예요

노오란 종이배들이 떠와요- P15
파도 가득 노오란 리본들이 달려와요
나는 그 종이배를 타려 하지만
나는 그 노오란 리본들을 잡으려 하지만
선생님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호야, 저 노오란 리본, 잊지 마, 잊지 마, 저 노오란 너희들의 날개를‘
선생님은 지금도 뱃머리에서 소리치고 계시지만

아, 이 진흙을 치워주세요
저 노오란 종이배를 타고 싶어요
엄마의 뜰 송이송이 노오란 리본의 나무 아래 서고 싶어요
저 ‘노오란 리본의 정원‘ 거닐고 싶어요

엄마, 빛의 젖꼭지를 주세요
엄마, 평화의 눈을 주세요
엄마, 천국의 뺨을 주세요

엄마, 나를 꼭 껴안아주세요- P16
저 배의 날개 일어설 때까지

안녕
안녕- P17
반도의 자화상
곽재구


개들이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열 마리
천마리
만마리
.
.
.
끝없이
걸어가고 있다

한 손에 국화꽃을 들고
옷깃에 노란 리본을 꽂고
낑낑대며
끙끙거리며- P30
눈물 콧물 범벅 속 쭈그리고 앉아
세상 어디 떠날 곳도 기약할 곳도 없는
노란 절망의 종이배를 접고 있다

생각하면두 발로 꼿꼿이 서서
자유와 정의와 노동의 참해방을 부르짖던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자고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의 시절이 
있었다

오천만 마리의 개가 아닌
오천만의 따뜻한 피를 지닌 인간으로 서서
세상에서 제일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자고
절규하던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다- P31
퍼렇게 멍든 몸뚱이로
수배당한 대학생이 물 위에 떠오르고
스무 살의 풋풋한 아들이 욕조의 물고문에 숨을 거둘 때해도
스무 살의 아름다운 딸이 코스모스 씨앗을 뿌려달라며 분신하던
그 암울한 시절에도 우리에게 불같은 희망은 있었다
페퍼포그와 지랄탄의 향연 속에서 우리들은 매일매일
우리의 아들딸에게 물려줄 꽃 같은 대한민국을 꿈꾸었다

개의 이름으로 묻노니
언제부터 당신은 개가 되었는가?
50층 펜트하우스에 살며 연봉을 수십 억 받는다고 해서 개가 아닌가?
눈과 코와 귀를 지폐로 쑤셔 막고
바닷가재 식사를 하고 로열 발레를 보고 나스닥 시세를 점검하고- P32
먼 나라 섬의 은행에 이름 없는 통장을 개설하고
그림 같은 이국에 별장 몇 채를 지녔다고 해서 개가 아닌가?
이 뉴스를 싣지 마세요, 라고 사장이 말하면 살살 꼬리를 흔들고
최저임금이며 비정규직이며 전세금을 날린 이웃들의 절망과 슬픔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내 땅값 내 아파트값 한푼 더 준다는 노인 연금에 매달리는
당신은 어느 나라의 잡종견인가?
개천에서 용이 나오는 시절 다 지났다고 하하 웃는
당신의 공화국은 당신의 어린 자식에게 물려줄 고향이 되었는가?

슬픈 눈동자의 개들이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끝없이 반도의 어둠 속을 걸어가고 있다- P33
흰 국화꽃 한 송이를 들었다고 해서
갈 곳 없는 노란 종이배를 하나 접었다고 해서 우리가 개가 아닌 것은 아니다

진짜 개는
주인과 함께 살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멧돼지와 싸우다 죽는다
온갖 탐욕과 부조리와 헛된 명예를 거부하며
농장 안의 염소와 토끼
어린 닭들과
새로 피어날 아침의 나팔꽃을 위해
피침 흘리는 멧돼지와 싸우다 죽는다.- P34
적폐가 아니라 지폐
김사인

꼴좋다 나여 아큐여
으스대던 그 잘난 나라여
반만년이라더냐 조상의 빛난 얼이라더냐
오냐 민족중흥이겠구나
오냐 나라여 오냐 나여

세월은 잘 간다
가는 세월 원통하구나
제가 떠난 것이냐 누가 떠민 것이냐
세월은 가고 세월만 가고
더럽게 남았구나 나는 비겁하게도 남았구나 주머니 속 지전 몇 장에 팔려 세월 가는 줄 
몰랐구나
세월인지 네월인지 안중에 없었구나
더러운 거러지로구나
싸구려 허풍쟁이 똥걸레로구나
백주 대낮에눈 뜬 채 코를 잃었으니- P41
모가지를 털렸으니
이 우스꽝스러운 피칠갑을 아무도 동정하지 않겠구나
세상은 낄낄 웃겠구나
손톱 젖혀지고 손가락이 부러지도록 할퀴어 잡으며 세월가는 동안
공포와 비명으로 흘러가는 동안
물에 젖은 오만 원짜리 석장이여
꼴좋다 나 죽지도 살지도 못한 나여
아직도 꼭 쥐고 있구나

국민소득이 어쨌다고? 집값이 어쨌다고?
똥개야 조느니 차라리 나라도 물어라
이 따위를 시랍시고 적는 내 손목을 물어라
종이나 울려라 개 떼처럼 왕왕왕
입춘대길 만사형통때
늦은 입춘방이나 하나 그려
이마빡에 여덟 팔자로 붙여주마- P42
오냐 나여 그래도 잠은 또 오겠구나
배는 또 고파지겠구나 버러지처럼- P43
이 봄의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다
김선우

믿기지 않았다. 사고 소식이 들려온 그 아침만 해도
구조될 줄 알았다. 어디 먼 망망한 대양도 아니고
여기는 코앞의 우리 바다.
어리고 푸른 봄들이 눈앞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동안
생명을 보듬을 진심도 능력도 없는 자들이
사방에서 자동인형처럼 말한다.
가만히 있으라, 시키는 대로 하라, 지시를 기다리라.


가만히 기다린 봄이 얼어붙은 시신으로 올라오고 있다.
욕되고 부끄럽다. 이 참담한 땅의 어른이라는 것이.
만족을 모르는 자본과 가식에 찌든 권력,
가슴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무능과 오만이 참혹하다.
미안하다. 반성 없이 미쳐가는 얼음 나라,
너희가 못 쉬는 숨을 여기서 쉰다.
너희가 못 먹는 밥을 여기서 먹는다.
환멸과 분노 사이에서 울음이 터지다가- P44
길 잃은 울음을 그러모아 다시 생각한다.
기억하겠다. 너희가 못 피운 꽃을.
잊지 않겠다. 이 욕됨과 슬픔을.
환멸에 기울어 무능한 땅을 냉담하기엔
이 땅에서 살아남은 어른들의 죄가 너무 크다.
너희에게 갚아야 할 숙제가 너무 많다.

마지막까지 너희는 이 땅의 어른들을 향해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말한다.
차갑게 식은 봄을 안고 잿더미가 된 가슴으로 운다.
잠들지 마라, 부디 친구들과 손잡고 있어라.
돌아올 때까지 너희의 이름을 부르겠다.
살아 있으라, 제발 살아 있으라.- P45
화인(火印)
도종환

비올 바람이 숲을 훑고 지나가자
마른 아카시아 꽃잎이 하얗게 떨어져 내렸다
오후에는 먼저 온 빗줄기가
노랑붓꽃 꽃잎 위에 후드득 떨어지고
검은등뻐꾸기는 진종일 울었다
사월에서 오월로 건너오는 동안 내내 아팠다 자식 잃은 많은 이들이 바닷가로 몰려가 쓰러지고
그것을 지켜보던 등대도
그들을 부축하던 이들도 슬피 울었다
슬픔에서 벗어나라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마라 섬 사이를 건너다니던 새들의 울음소리에
찔레꽃도 멍이 들어 하나씩 고개를 떨구고
파도는 손바닥으로 바위를 때리며 슬퍼하였다
잊어야 한다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마라
이제 사월은 내게 옛날의 사월이 아니다
이제 바다는 내게 지난날의 바다가 아니다
눈물을 털고 일어서자고 쉽게 말하지 마라- P67
하늘도 알고 바다도 아는 슬픔이었다 남쪽 바다에서 있었던 일을 지켜본 바닷바람이 세상의 모든 숲과 나무와 강물에게 알려준 
슬픔이었다
화인처럼 찍혀 평생 남아 있을 아픔이었다
죽어서도 가지고 갈 이별이었다- P68
백일홍
박성우

박새가 이팝나무 아래 우체통에 둥지를 틀었다
하얀 이팝나무꽃이 고봉으로 퍼질 무렵, 박새는 알을 낳았다

희망촛불에서 받아 온 ‘희망 씨앗‘을 심는다
벽화동우회 ‘새봄‘ 식구들이
정읍우체국 앞에서 나눠주던 씨앗, 박새네 집 옆에 심는다

초췌한 얼굴이었다 눈에는
투명한 물방울이 아슬아슬 맺혀 있었다 가까스로
서 있는 유가족의 다리는 위태로워 보였다
하고픈 말이 너무 많은 입은 차라리 마스크로 가리고 있었다

앙다문 입을 가린 흰 마스크가
흘러내리는 물을 빨아들였다 콧잔등을 타고 흘러내린 물은 분명 피눈물이었으나,
핏기 없는 낯빛에서 나오는 물이기에 탁할 수조차 없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 안쪽,- P75
깜장 치마에 깜장 양말 깜장 구두 신고 조문 온
앞줄의 여자아이가 울었다 엄마 아빠 손잡고 울었다
사내아이의 거침없는 울음소리도 두어 줄 뒤쪽에서 보태졌다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은 거리로 나갔다

부디 백일 천일 살아 있으라
여러 꽃씨 중 고심 끝에 골라보던 백일홍,
우체국 앞에서 받아 온 씨앗을 우체통 옆에 심는다
아이들아 분홍 하양 노랑 주훙 피어나렴,
안산에 조문 갔을 때 따라온 ‘노란 나비‘가
이팝나무 아래 빨간 우체통에 매달려 꽃을 기다린다

거름 한 줌 보태고 일어서는 나와 눈 마주친 어미 박새,
까만 눈조차 끔쩍이지 않고 알을 품는다- P76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
송경동

돌려 말하지 마라
온 사회가 세월호였다
오늘 우리 모두의 삶이 세월호다
자본과 권력은 이미 우리들의 모든 삶에서
평형수를 덜어냈다
사회 전체적으로 정규적 일자리를 덜어내고 비정규직이라는 불안정성을 주입했다
그렇게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 노동자 세월호에 태워진 이들이 900만 명이다
사회의 모든 곳에서
‘안전‘이라는 이름이 박혀 있어야 할 곳들을 덜어내고
그곳에 ‘무한 이윤‘이라는 탐욕을 채워 넣었다 이런 자본의 재해 속에서
오늘도 하루 일곱 명씩 산재라는 이름으로
착실히 침몰하고 있다
생계 비관이라는 이름으로
그간 수많은 노동자 민중들이 알아서 좌초해가야 했다- P89
그렇게 수없이 많은 이들이 지하 선실에 가두어진
이 참혹한 세월의 너른 갑판 위에서
자본만이 무한히 안전하고 배부른 세상이었다
그들의 안전만을 위한 구조 변경은
언제나 법으로 보장되었다
무한한 자본의 안전을 위해
정리해고 비정규직화가 법제화되었다
돈이 되지 않는 모든 안전의 업무가
평화의 업무가 평등의 업무가 외주화되었다 경영상의 위기 시 선장인 자본가들의 탈출은 언제나 합법이었고
함께 살자는 모든 노동자들의 구조 신호는 외면당했고
불법으로 매도되고 탄압당했다
더 많은 이윤을 위한 자본의 이동은 언제나 자유로운 합법이었고
위험은 아래로 아래로만 전가되었다
그런 자본의 무한한 축적을 위해- P90
세상 전체가 기울고 있고 침몰해가고 있다
그 잔혹한 생존의 난바다 속에서
사람들의 생목숨이 수장당했다
그런데도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돌려 말하지 마라
이 구조 전체가 단죄받아야 한다
사회 전체의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이 처참한 세월호에서 다시 그들만 탈출하려는
이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들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이 위험한 세월호의
선장으로 기관장으로 갑판원으로 조타수로 나서야 한다.
이 시대의 마지막 남은 평형수로 에어포켓으로다이빙벨로 긴급히 나서야 한다
이 세월호의 항로를 바꾸어야 한다
이 자본의 항로를 바꾸어야 한다-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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